춘하추동단상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 2 )

이장춘 2010. 11. 26. 00:52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 2 )

 

 2월 28일은 원래부터 1989년도

결산을 위해 이사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날입니다. 법률상 KBS결산은 2월 말일까지 마무리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23일에 사장명의로 결산서가 제출되어

 26일, 27일 두 차례 소위원회를 거쳐 이날 마무리 하는 날 이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날 열리는 이사회가 경영진에 대한 인사처리를 위해서

 특별히 열리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이날 모든 인사가 처리 될 것이라고 단정적인

보도가 나왔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희망사항이나,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신문에 자료를 제공하고 신문은 그것을 받아 포장해서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제가 실무를 담당 하고 있어서

경영진의 임면에 관한 모든 서류는 제 손을 거쳐

 이사회에 상정되는데 저는 아무 얘기도 듣지도 못하고

제 손에 들어온 서류는 아무것도 없는데 계속 왜곡된 보도로

 압박하는 것입니다. 신문사에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건은 계속 확대 재생산 되어 갔습니다.

 

신문매체를 통해 KBS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여론을 호도하고 모든 경영진이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버리는 것 이었습니다.

이를 조직적으로 만들어 가는 세력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8일에 이사회가 열린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렇게 분위기를 끌어가는 흔적이

 역역 했습니다. 모든 경영진이 물러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사장, 부사장, 감사, 본부장등 경영진이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러 사직서가 이사회에 접수 되었습니다.

이날 네 시부터 열린 이사회에서 예정된 안건이 모두 처리된 후

제출된 사직서 처리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오후

 6시 이사회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결말 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3월 2일 오후 4시 임시 이사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잠시 휴회가 있었는데 이 때 본부장 사표는

 반려 되었습니다. 사장 사표도 반려키로 했으나 서영훈 사장은

 끝까지 이사회에서 처리 해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결국 투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영훈 사장님은 모든일을 법률의 절차에

따라 처리 했으므로 KBS최고 의결기구인 이사회

의사에 따르겠다는 것이었읍니다. 투표는 부사장, 감사,

사장 순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투표결과 부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결정 되었고 감사 면직

동의안에 반대하는 표는 한 표밖에

안나왔습니다.

 

감사가 왜? 그만 두어야 하느냐고

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그때 감사는 이사회의

많은 불신을 받고 있어서 이 일이 아니었어도

 기회만 되면 물러나게 하겠다는 것이

이사회의 분위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장면직동의안이

관심 대상이었는데 7 : 5로 가결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공사가 공백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임

본부장은 이정석 기획 조정실장님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이상의 공백상태가 계속 되었고 이사회로서도

 KBS운영에 적지 않은 부담을 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회가 

끝나고 일대 혼란이 왔습니다. 이사회 회의장 밖에 와 있던 

100여명의 사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설명을 요구 했습니다.

 

1990년 3월 2일! 이날을 전후해서

KBS는 6.25전란 이래 가장 큰 시련을 껶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사나 지역이나를

할것 없이 전 사원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한달 이상을 중앙

로비에서 길거리에서 전철안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돌아 다니며 사원들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목이 터져라 왜쳤

습니다.   마침내는 KBS터가 군화발에 짓 밟히면서

200명 가까운 사원들이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많은 사원들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날의 일들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방송민주화를 지켜 나가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줄 압

니다. 계속 얘기 하겠습니다. 사장, 부사장 등 지도부가 일시에

물러나 공백상태가 되어버린 KBS ! 이때 KBS인이라면 누구인들

그 마음 제대로 이었겠습니까? 사장, 부사장, 감사 면직 동의안이

가결되고 이사회가 폐회되면서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다른

이사님들은 다 돌아가시고 KBS출신 노정팔 이사장님과

박경환이사님만 남으신 가운데 100여명의 사원들이

이 두 분을 둘러싸고 설명을 요구 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저의 아픈 마음

감출길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하면 눈물

어리는데 해방되던 해부터 KBS에 몸 담아오신 연노하신

노정팔 이사장님과 1947년부터 KBS를 지켜 오신 박경환 이사님

 두 선배님들이 이 상황을 맞으면서 그 마음이 어떠했겠으며 그 자리에

 모습을 들어 낸 그 사원들의 마음 어떠했겠습니까? 설명회는 열렸고

 연노하신 노정팔 이사장님이 후배들에게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 해 주셨습니다. 계속적인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질문 하나 하나에 상세하게 답변

해 주셨습니다. 연노하신 노정팔 이사장님이

피로에 지치고 얼굴색이 변해가시면서 까지 성실하게

설명 해 주셨습니다. 사원들도 질문 대표를 뽑고 질서 있게

질문 해 주었습니다.이성을 잃을 법도 했지만 그날 그 자리는

 모두 질서를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질문에 응했던

몇 사원들의 얼굴과 언행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 사원들은 저를 몰라도 저는

그 사원들을 기억합니다. 하루인들 이틀인들

계속해도 모자랄 설명회였지만 피로에 지치고 마음

상하신 두 선배 이사님들을 보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때가 밤 10시 반이었습니다. 심신이 피로하신 가운데

수많은 사원들의 서슴없는 질문에 응답하자니

피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저러다 변괴라도 당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 모셔다 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노동조합의 몇몇 조합원들이 사무실로 가는 저를

따리와 이사회 실황 녹음을 들려주도록 요구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들려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사회 회의록은 실황을 모두 녹음해서

그대로 필사한 후 유인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장님의 승인 없이는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는

서여서 거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번 요구해왔지만

누구에게도 들려 줄 수 없었습니다. 또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사실상 대부분 이상장님 설명회에서

나온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은 그렇게 넘겼지만 그 이튿날

아침부터 이사장실과 사장실 문을 폐쇄 해버려

 출입 할 수없게 민주인사가 사장으로 선발되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아파진 사원들은 이때부터

대부분 일자리에서 떠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중앙로비 (그 때는

민주광장이라고 하였음) 에 모여 시위를 벌리고 또 한편으로는

유인물을 만들어 길거리로 전철 안으로 사람이 모인

곳을 찾아 사원들의 입장을 알렸습니다.

 

지역은 지역대로 그렇게 했고

또 본사를 찾아 합류하는 사원들도 많았습니다.

방송현장에는 빈 자리가 많았지만 방송을 중단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노조원과 모든 간부들이 불철주야 나서서

사원들이 비운 현업의 자리를 매 꾸었습니다.

 

1990년 3월 2일 서영훈 사장님에 대한

면직 동의안이 이사회에서 가결되고 절차를 갖추어

면직 발령이 난 것은 그 일주일 후인 3월 9일 이었습니다.

2일이나 3일이면 면직 발령이 1주일이나 걸린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줄 압니다.

 

12일 제1공개홀에서 이임식이 있은 후

 청사를 한바퀴 돌고 떠나셨습니다. 후임사장이

 쉽사리 선임 되질 못했습니다. 이러 저런 사연으로

 4월 초에 가서야 진통끝에 새로운 사장님이

선임 되셨습니다.

 

서영훈 사장님이 떠나시던 다음 날

 노 동조합에서 노조가 참가하는 이사회 간담회를 열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노정팔 이사장님께

여쭈어 보니 서로 얘기하는 것은 좋은 일 이라고 하셨습니다.

14일 오후 4시로 간담회 시간을 잡고 회의 장소는

이사장실이라고 하셨습니다.

 

폐쇄된 이사장실 문을 열고 거기서

 간담회를 해야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기는 했지만 노조가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그런 일로 일을 안할 수도 없고 해서 사장실

곁에있는 귀빈실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일곱 분의 이사님들과 노조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얘기가 진행 되어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민주인사를 사장으로 선임한다는

 원칙을 얘기하면서 이사장실 문도 열기로 하는 등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얘기인즉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그 합리적인 것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걱정을 했습니다.

이사회나 사원들이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해도

 현실문제에 들어가면 어려워지고 또 지금까지 경과 과정이나

 주변 분위기로 보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정팔 이사장님도 괴로움을 여러 번 실토한 적이 있었고

 그 커피값도 안되는 업무추진비 잘 챙기라는 얘기를 자주 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14일 이사간담회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나

 3월 16일에도 이사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도

 신문에서는 사실과 다른 기사를 내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회 내부에서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이사들이 책임을 지고

 전원 사직서를 냈다는 보도가 나오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신문사, 통신사에서 확인전화가 오고

 부인을 해도 또 그런 보도가 반복되는 가운데

 16일 오후 4시 이사간담회가 이사장실에서 열렸습니다.

이 이사 간담회에서 사원들에게 보내는 메세이지를 채택 했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방송을 알고 사원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장을 제청하기로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간략했지만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19일에 이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19일까지

자료를 수집하고 19일에 토의를 거쳐서 정기 이사회날인

 21일에는 제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일에도 이사회가 열리고

 21일도 이사회가 열렸지만 사장은 선임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사회는 4월 3일로 늦추어 져 버렸습니다.

 

 그간에 많은 풍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풍문이었기에

풍문으로 끝날 수 있었던 얘기는 생략 하겠습니다.

사장 후보로는 여러 분이 얘기가 되었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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