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꽃피는 팔도강산 연출가 김수동님이 쓴 그때 그 얘기

이장춘 2011. 3. 6. 17:58

 

 

 

1974년부터 1975년까지 KBS 일일 연속극으로

그때까지 가장 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했던  꽁피는 팔도강산

연출가 김수동님이 그때 얘기를 2001년 최창봉 선생님 방송 45년을

기념하는 출판물 "한국인의 방송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꽃피는 팔도강산 글 보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337

위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꽃피는 팔도강산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73년 봄에 방송공사로 바뀌고
홍경모 차관이 사장, 최창봉 국장은 부사장,
그리고 신임 TV 국장에 정순일(鄭淳日) 씨가 취임했는데
다음해 봄에 [꽃피는 팔도강산(八道江山)]이 기획되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새마을 노래와 잘 살아보세가
 울려 퍼지며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시절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배경에 담고올스타 캐스트로 일일 연속극을 한다는
기획 의도였다. 제작국 회의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문화공보부에서 '팔도강산'이라는 홍보 영화가 네 편인가
 제작된말하자면 뒷북치는 기획이라는 점, ENG 같은 카메라가
없는 시절이라 덩치 큰 녹화 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매주 스튜디오 녹화를 병행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그리고 위에서부터 내려온 기획안에
대한 반발도 있고제작 여건을 무시한
기획으로 규탄되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된다면서
기획은 강행되었고작가는 윤혁민 씨가 선정되고
PD로는 가장 강경하게 반대론을 핀 내가 뽑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팔도강산에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제목을 정한
 장본인이 문공부 장관이었던 윤주영(尹胄榮) 씨였다니.

 

 
 
이그제크티브 프로듀서는 문공부 장관이고
프로듀서는 최창봉 부사장이고 나는 디렉터인 셈인
것이다.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최선을 다하는 도리밖엔
 없었다.윤혁민 씨와는 [1통 2반 3번지]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고,
집도 삼양동산 중턱의 이웃이어서 협의하는 데 번거로움은 없었다.
홈드라마 터치의 코미디로 설정하고 과감하게 딸만 일곱을 둔 노부부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 집을 번갈아 가면서 찾아다녀 그때마다
 상황이 바뀌고 테마도 바뀌지만근간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 포인트를 두고이야기를 풀어가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봄 프로 개편의 최종 점검이 부사장
주제 하에 열렸는데,배역의 스케줄에서 세트 디자인,
그리고 야외 녹화의 장소 섭외 등으로기진맥진해 있던 나는
 "어때 자신있어?"라는 물음에"전혀 자신없습니다"라고 반항하였다.
안색이 확 바뀐 부사장은공사 출범 때 TBC에서 온 최상현(崔相鉉)
부장에게어째서 자신없다는 사람에게 프로를 맡겼느냐고 힐난하니
최부장은 영화 출신이라 야외 녹화에 강점이 있고 윤혁민 씨와는
호흡이 잘 맞아 흐뭇한 홈드라마가 되리라고 믿는다고
지금 PD가 피로의 절정에 있어 자신없다고 한 것인즉
너무 걱정마시라고 변호를 했다.
 
그때 [꽃피는 팔도강산]과 동시에 스타트하는
일일 연속극 [그리워]의 작가 겸 연출자인 이남섭(李南燮)
씨에게도"어때 자신있어?"라고 물은즉 이남섭 씨는 환하게
웃으며 "잘 돼가고 있습니다, 자신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부사장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려운 일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렇더라도 자신있게
 나가야지뚜껑을 열기도 전에 자신없다고 하니, 그럼 난 어쩌란 말이요"
하며 깊은 눈으로 응시하셨고, 나는 무색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 지나서 나도 관리직에 앉아서 기획 회의를 하다보니
자신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후배를 볼 때마다
최창봉 선배와의 한 토막을 떠올리곤 했다.
 
물론 자신있다고 해서 프로그램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자신없다고 해서 죽을
 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본인이 부인할 때는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꽃피는 팔도강산]은 영화계, 연극계의
연기자들을 대거 출연시킨초호화 캐스트로 출발하였다.
김희갑, 황정순의 노부부 밑에큰 딸 내외(최은희, 장민호. KIST의
박사로 전문 분야를 빼면 무능),둘째 딸 내외(도금봉, 박노식. 유랑극단의
떠돌이로 양자를 키움),셋째 딸 내외(김용림, 황해. 남매를 둔
목장경영인,아들애가 백혈병에 걸린다),
 
넷째 딸 내외(태현실, 박근형. 6ㆍ25전쟁 때
 외팔이가 된 퇴역 해병 중위,아내의 횟집 경영으로
생활 유지),다섯째 딸 내외(윤소정, 문오장. 포항제철 기사),
여섯째 딸 내외(전양자, 오지명. 울산공단의 맞벌이 부부),
일곱째 딸이 한혜숙으로 대한항공의 스튜어디스, 재벌
승계자로 인생 수업차 신분을 숨기고 속초에서
물지게를 지고 있는 민지환이 그 짝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김희갑 노인이
사위와 딸들 모두를서울로 불러 올려 가게를 접고
 은퇴를 결심 팔도 유람을 다니면서자식들 집을 번갈아 가며
 찾겠노라고 선언하는 장면이김노인의 한옥에서 펼쳐지는데,
20명 가까운 대가족이 모이니 안방에서 마루까지 펼쳐 놓아도
궁둥이를 부칠 데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서 이러다간 세트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겁이 날 정도였고 행동선을
긋는 데 무척 고민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대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몇주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김노인 부부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그때마다 연기자들과 의논해서약 2달간을 스케쥴을 비우게 하여
 무대를 설정 하였으며매주 작가와 나는 먼저 출발하여 현지에 도착
취제와헌팅과 촬영 장소를 물색하고야외용 대본을 작가가 써 놓고
스튜디오 녹화대본 집필을 위해 상경해버리면 나는 혼자 남아서
 콘티를 작성하고다음날 촬영반이 도착 하면 숨돌릴틈없이
야외 녹화를 강행하고는서울로 올라와서 편집을 하고
 
연습을 하고녹화를 끝내고는 다음날 다음 장소로 
떠나는문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년반이었으나
다행히 녹화차가 양재동 톨게이트에서 노견으로 굴러 떨어져 기제가
손상한 것 빼고는 사고가 없었던 것이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강원도 속초 항을 무대로
부둣가에서 조그만 생선횟집을 꾸려 가는 넷째 딸과
상이군인으로 굴절된 성격을 갖게되는 박근형, 태현실 부부의
애틋한 이야기가 먹혀 들어 초장부터 시청자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윤혁민씨의 필력과 계산의 소산일 것이다.

 

 

 

그때부터 드라마의 인기는 높아져
가는곳마다 환영을 받게되고 일은 쉽게 풀리곤
하여 TV로 밥을 먹으면서도 TV는 무섭구나를 새삼 느꼈다.
일일연속극을 오래 하다보면 별의별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번은 삼천포시 유지들이 몰려와서 공영 방송이 삼천포
 시민을 모욕했다고 강력하게 항의를 해왔다.
 
사연인즉 박노식 씨가 "잘못하면
삼천포로 빠져버린당께로"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억에 없는 일이라 녹화테이프를 들어보니 춘천의 어느
다리 밑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약을 파는 데
그때 즉흥적으로 신나게 떠드는 속에 삼천포가 있지 않은가.
인쇄된 대본을 보여서 작가가 무죄임을 증명하고. 박노식 씨도
 흥이 나서 떠벌리다가 내뱉은 말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모든 게 연출자의 불찰 탓이니 용서하시라고 기회가 닿으면
명예 회복을 위해 삼천포로 야외 녹화를 가보겠다고
백배 사죄하여 매듭을 지었다.
 
또한 드라마가 방송되자마자 포항제철에서
항의전화가 왔는데포철 임직원 중에 콧수염을 기른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포철 부장 역을 맡은 문오장 씨가
얼굴이 펑펑해서 관록이 없어 보인다고콧수염을 기른 것이 화근이었다.
콧수염을 기르건 말건 개인의 자유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포철에
가보니 박태준(朴泰俊) 사장 휘하에 준 군대식 경영 관리 체제임을
보고는 콧수염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KAL 스튜어디스인 한혜숙을 만나고자
민지환이가 기숙사를 방문한 장면이 나오자마자
 KAL에서도 난리가 났다. 스튜어디스 기숙사는 금남의 집인데
 제집 드나들 듯남자가 드나드니 스튜어디스의 이미지에 금이
갔을 뿐 아니라양가집 규수들이 KAL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방송된 분은 어쩔 수 없고 다시는 기숙사
장면은 만들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

 

 

 

1975년 봄에 KAL에서 유럽 노선이 취항하게 되자,
첫 비행기에 좌석을 7개를 제공할 터이니 파리로케이션을
하겠느냐는 제의가 왔다.공짜로 파리 구경이라니 마다할 까닭이 없다.
정순일 국장을 인솔자로 하고, 김노인 부부, 한혜숙 스튜어디스,
작가 윤혁민, 촬영 기사와 나 김수동은 첫 취항기를 탔다.

 

 

왼쪽부터 PD김수동, 황정순, 김희갑, 한혜숙, TV제작국장 정순일, 작가 윤혁민 

 

 

마침 장예준(張禮準) 상공부장관이
 무역 관계 회의를 주재하러파리에 가느라
동승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뭐를 찍어야 될지
 고심하던 우리들은 장관께 출연 요청을 했더니
[꽃피는 팔도강산]의 위력은 대단해
쾌히 승낙하지 않는가.
 
 
작가가 즉석에서 대사를 만들어
 한혜숙 스튜어디스의 기내식 서비스를 받으면서
 장관이 유럽 시장 개척을 위한 전략을 몇 마디 이야기하는
장면을 녹화하였으니 홍보 드라마 역할도
이런저런 데서 수행한 셈이다.

 

 

 

정부 홍보 프로그램이라는 이단아로
출발을 하면서도대가족 제도 안에서의 인간 모양과
정을 그린 내용이 소구력이 있어서 398회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
같으며잘 살아보세라는 국민적 공감대 아래 드라마가 보조를 같이 한 것이
성공 요인으로 짚인다. 그러고 보니 26년 전에 끝난 [꽃피는 팔도강산]은
 국민들과 일희일우를 함께 한 행복한 일일 연속극이었으며,
출연자 중에 이미 김희갑, 박노식, 문오장의 세 분은
유명을 달리 하였다. 모두가 호랑이 담배 먹던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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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金秀東)
 
 
1958 동경 세이죠대학 문예학부 졸업
1955~1963 동경 다이에이 촬영소 조감독
1965~1971 '신필름' 등에서 영화감독
 1972~1992 KBS 드라마 PD
 
 상훈 
 
백상예술대상 (1978, 1981, 1987)
 서울시 문화상(1992)
 
 작품 :
[꽃피는 팔도강산]
 [아내] 
 [옛날의 금잔디]

팔도강산 좋을씨고 딸을 찾아 백리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 찾아 천리길
에헤야 데헤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 살림 절씨구
잘살고 못사는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살고 못사는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팔도강산 좋을씨고 천리길 하루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새나라를 이루네
에헤야 데헤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 살림 절씨구
잘살고 못사는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살고 못사는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내일의 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왼쪽부터 그때의 담당  PD 김수동, 작가 윤혁민, 출연진: 최정훈, 황정순, 최은희, 장민호, 이향자님.

 

 

팔도강산.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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