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서명석님 (2)
수도가 부산에 있던 전쟁 중의 어렵던 상황에서도
유럽의 헬싱키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44명의 선수를 보냈고
역도와 복싱에서 메달을 얻어 태극기를 날렸습니다. 이 대회에
대한민국 중계방송반은 서명석 아나운서 단 한사람이 갔습니다.
1인 3역을 해 냈습니다.그리고 4년 후 1956년 서명석님은 KBS를
떠나 최초의 TV방송국 HLKZ에서 방송과장을 했습니다. 그때
서명석님의 생생한 글을 지난회에 이어 옮깁니다.
이 글은 1983년 8월 방송월보에 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1952년 6월 중순까지 나는 용감하게도 (?)
금주를 단행했다. 술좌석에서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술은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그래 6월 초에
핀란드 올림픽 대회에 중게방송차 파견되는 것이 결정되고
수속절차를 밟느라고 매일같이 동부서주 했다.
출발하기 전날인 6월 20일 당시
공보부장관 이철원 박사가 경상남도 지사관저를
임시 경무대로 쓰고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갔다. 외화 사용결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받기 위함이다. 나는 경무대 경찰서장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3찬달라 가까운 외화 사용승인은 당시 대통령이
직접 재가 할 때이다. 오후 늦게 결재를 받아 한국은행에서
외환을 바꾸고 방송국에온 시간이 6시경 노창성 국장이하
간부들과 동료들이 환송회를 열어 주었다.
닭표 브랜디가 수십병, 오징어와
마른안주 여러 사람에게서 술잔이 한잔씩
들어오니 수개월 금주했던 나의 내장은 순식간에
만취가 되어 버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 빈속이 어찌 되었겠는가?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됐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방송국의 공용물인 시계가 없어지고
임시여권과 외환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채로
다음날 10시에야 초량동 숙소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정말로 다행스럽게 여행서류와
외환을 그 당시 어느 동료 직원이 잘 보관 하였다가
되 돌려준 것이다. 이런 상태로 그날 오후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동경에 도착하고 UN군 사령부에서 대 이북방송을
담당하던 작가 김영수, 아나운서 위진록, 유덕훈, 세분의
도움으로 겨우 며칠 만에 식사를 한 샘이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해서는
양식으로는 속이 편치를 않아 가지고 갔다 고추장과
날 오이로 비위를 가라 앉혀야만 했다. 올림픽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곳 방송국장 최초로 각국 방송 팀을 위한 환영 리셉션이
있었다. 각국 방송 팀의 단장만을 부른 모양이다.
주최 측 인사와 합해서 약 80명 정도,
물론 나는 한국인 유니폼으로 정장을 하고 참석하였다.
그런데 립셉션 데스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실레지만 당신이
한국 방송 팀의 단장이십니까? 그런데요!”증명서를 가지고 계십니까?
ID카드 사진을 보고 내 얼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나를 연회장으로 안내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방송 팀으로는 나 혼자만 갔으니 내가 단장이요, 총무요,
아나운서요, 기술자일 수밖에 너무 젊은 사람이 한 나라의
중계방송 팀의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사전 곡절을 파티 장에
들어가서야 더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50전후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 가운데 26세의 한국의 젊은 청년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소련,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태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각국 대표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환담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신문기자와 카메라맨이 내 옆에 다가왔다.
“코리아에서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 코리아에서는 중국어, 또는 일본어중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십니까?”
영어로 묻는 그자의 말투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사람도 아니고 소련 사람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자에게 반문했다. “우선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당신은 어느 나라분인지 모르겠지만 귀국에서는 영어와
러시아어 중에서 어느 말을 사용하십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서전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죠.” 하고 펄펄 뛰는 시늉이다.
“실례지만 한국의 세종대왕을 아시나요?” “모르는 데요”
“그 분이 500년 전에 한국 글을 제정하신
우리의 문화 창달의 대왕이셨지요.
한국에서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어느 사람도 발음 할 수 없는 한국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오고 가고 옆에 있던 여러 나라 대표가
한국문화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다음날 신문에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는
기사가 실리고 나는 방송 팀 단장들의 리셉숀에서
얘기치 않았던 부산물의 얻은 샘이 됐다. 이 신문을
나는 방송국과 공보부 장관실에 보내고 귀국 후
대단히 칭찬을 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범아고 말았다.
입장식 실황을 중계방송 할 때는 너무도 피로하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연일 1인 2역 자연 삼역을
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만 탓이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잠시 후에 약 60여명의 대한의 아들과 딸들이 참가한 제 15회올림픽 대회의 개회식이 시작 되겠습니다.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이 무슨 소린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이지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가 무슨 소린가. 그것도 양념으로
두 번씩이나…….순간적으로 아차하고 이마를 쳤다. 물론
이마 치는 소리는 중계방송으로 안 나갔지만……. 이
얘기는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얘깃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강준호 선수가 권투에서 태극기를 올렸다던 지 김성집선수가 역도에서 태극기를 올린
순간을 중계방송 할 때는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는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부터 특히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에
열중했다. 농구, 축구, 권투를 비롯한 각종 경기를 …….
그래서 스포츠 관계 인사나 그 당시 선수들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 지금은 60이 거의 가까운 노인들이지만
서로 만나면 그분들이 지난날에 활약하던
모습을 회상 해 보기도 한다.
1956년 초, 전에 중앙방송국 기술직 간부로 있던 황태영씨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이며
상업방송인 HLKZ-TV개국을 위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당시 미국
RCA한국대리점을 경영하던 황태영사장이 공보부 의뢰로 KBS라디오
자재 도입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RCA로부터 받을 커미션대신
그 회사와 합작으로 TV자재를 도입키로 하고
회사를 만든 것이다.
회사명을 한국 RCA배급회사(KORCAD)라고 한
황태영은 TV수상기 보급도 목적으로 했다. 나는 이 회사의
방송과장으로 취임 1956년 5월 12일 HLKZ-TV수상기에
그 모습을 나타낸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다.
서울 종로 관철동 종각 뒤 동일 빌딩에서
발사되는 영상주파수의 가시청 거리는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20Km정도였다. 개국 초에는 서울시내 중요지역에 RCA21인치 수상기를 설치하고 가두 TV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끓었다. 생방송으로 시작된 개국 식에서
나는 그 당시 자유당의 이기붕씨를 소개 하였고 성경린씨가 지휘하는 아악이 방송되었다. 박시춘 악단의 현인, 남인수, 백설희 등도 출연했다.
매일 두 시간씩 방송을 실시했는데
9시 방송이 끝나면 항태영사장과 거의 매일 밤
같이 구수회의를 하곤 했다. 그 당시 서울의 수상기는
약 350대미 만이었다. 상업방송이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 지지 않아 많은 결손을 보아야만 했다.
이러한 앞뒤의 사정도 있고 해서 결국은
1957년 5월 한국일보 장기영사장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다.
이름을 대한 방송주식회사로 바꾼 장기영시는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고 나는 방송부장이 됐다. 프로그램 내용도 많이
보강 되었는데 매주 수요일에는 중학동 한국일보
사장실에서 간부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내가 본 장기영 사장의 정력은 대단 하였다.
서울시내 여러 곳의 화재 보도를 필름에 담아 신속히
알리기도 하고 신임 각료의 취임인사도 TV를 통해서 했으며
미국, 영국 등의 해외뉴스 필름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홍콩의
하후한이란 배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국내 탤런트로는
복혜숙, 천선녀, 장민호, 백성희, 코메디언 김희갑
구봉서, 서영춘등이 출연했다.
방송, 편성, 연출진으로는 최창봉, 황문평,
이규석, 이기하, 최덕수, 황은진, 이평재등 여러분이 수고했고
나는 김봉구, 공승규, 진영희등과 일선화면에서 활동했다. 당시의
TV뉴스 대담프로는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관심을 가졋는데
정부요인이나 군 고급 장성들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각료중에서는 거의 TV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당시
김일환 상공부 장관은 TV인터뷰를 가장 적절하게
이용한 분이다. 육군 참모총장 이형근 대장도 뉴스 필름으로
자주 보도가 되는데 이 대통령도 그분의 움직임을 화면을
통해서 소상히 알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무렵 나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분들과는 지금도 잘 알고
지내고 있다. 지금은 전국 아나우서 수백 명이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내가 근무하던 KBS시절에는 고작 20여명
또 TV방송에서는 불과 5명 정도였다. 매일 몇 시간씩 화면에
얼굴을 나타내니 자연히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TV수상기를 가지고 있는 젊은이와
학생들 간에는 특히 이름과 얼굴이 잘 팔리곤 했다.
당시 TV싱\청자 중에서 열렬했던 나의 팬들은
지금쯤 5O대의 중견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선배들의 지도와 사랑을 받고
KBS라디오와 HLKZ-TV에서 일하던 10여 년간
여러 가지 보통사람은 당하기 어려운 생사의 고비도 넘겼지만
그 나름대로 나의 청춘을 불태운 곳이다. 지난 6월 중순 새서울
로터리 클럽에서 안영모 전 교통부장관의 연설 내용 중
나에 대한 몇 가지 소개도 곁들여 졌었다.
‘KBS아나운서 시절 많은 활약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얘기해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지난날의
이런 일이 다시 알려질 필요가 있는가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젊음과 정력과 전력을 투구해서 일하던
지난날의 아나운서 시절은 떳떳하고 의젓하고 보람 있는
나의 생활 일부였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서명석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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