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다원방송, 김구선생님 국민장
백범 김구 선생님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45년
11월 23일 해방조국에 돌아오셨습니다.정국의
흐픔을 바로잡기 위해무척 노력하셨고 신탁통치가
불거졌을때 그래서는 안된다고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벌려 나가셨습니다.
남.북이 갈라져서는안된다고 남북을 드나드시며
노력을 기울이셨지만 북한의 고집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셨을때 온국민은 비통해 했습니다.장례는 열흘
후인 7월 5일 국민장으로 올렸고 KBS는 처음으로
그 실황을 다원방송으로 중계했습니다.
이날의 중계방송은 장례식이 거행된
서울운동장에서는 당시 방송과장이던 민재호
아나운서가맡았고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을지로
거리중계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경성전기 ( 한전의 전신 )
건물 옥상에서홍양보 아나운서 ( 현재 미국 메릴랜드
거주 )가 마지막으로 효창공원의 하관식은 위진록
아나운서가 맡았습니다.
재미 방송인협회 30주년 기념호에서 그날을 회상
하면서 그날 중계는 생방송으로 하게 되어 있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방송과장이던 민재호 아나운서가 현장에
달려와 준비한 방송원고를 회수해 가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고
진땀을 빼면서 겨우 현장중계를 끝냈다고 술회 하셨습니다.
정시 정치권의 미묘한 관계때문에 김구선생님을 크게
부각시키는것을 막기위한 조치였던것
같다고 덧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덕근 선생님은 이날 중계방송에
관해서해방후 가장 큰 중계방송은 김구선생님의
장레식이었다고하셨습니다. 방송국은 이날 처음으로 장례식을
다원방송으로계획해서 경교장에서 효창공원까지 여러곳에 마이크를
장치 중계방송을 했는데 홍양보 아나운서가 방송도중
울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이때 민재호 아나운서가 " 산천초목도 운다"
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효창공원에서 중계방송을
위해 기다리던 위진록아나운서는 영구가 올 시간이 훨씬 넘어
도착한 것을 보고 그만흥분 "고대했던 영구가 마침내 도착
했습니다" 라고 방송하는 실수를 범하기도했다고 써 놓으셨습니다. 이날 중계방송을 하신
민재호, 홍양보, 위진록 아나운서는
6.25가 일어나자 VUNC, VOA로 가셔서
그곳에서 오랫 동안 방송 하셨고 홍양보 아나운서와
위진록 아나운서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위진록 아나운서는 6.25 첫 뉴스를 방송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아래 장례식 사진은 OhmyNews가
제공한 것으로 2004년 2월 27일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2층 문서 자료실에서
조사반원(팀장 이선옥씨)들이 미 육군정보파일을 열람하던 중
발견한 것입니다. 이 사진은 백범 선생님의 운구가 소공동을
지날 때 미 육군 정보 팀에서촬영하여 본국에 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백범 선생님이 운명하신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새삼 경건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이 사진을
고국에 있는 독자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영대회장에서 얘기하시는 김구선생님과 이승만박사 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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