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VOA 미국의 소리 방송과 한국인의 인연

이장춘 2011. 1. 23. 14:57

 




 

VOA 미국의 소리 방송과 한국인의 인연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아침일직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오는

 독특한 억양에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뉴-스를 들으신 분 들이많으실 줄 압니다.  이것이
미국의 소리 방송이었습니다.  제 2 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탄생한  VOA 미국의 소리 방송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부터깊은
인연을 맺은이래 1972년 KBS에서 VOA방송을  중단할때까지
오랜세월 우리의 친숙한 벗이었고 KBS에서 방송이 중단된
뒤에도 민영방송이나 단파방송 또는 위성방송등을

 통해서 그 방송에 접하시는 분들은 많습니다.

 

2차대전중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VOA는 해방후 우리 방송이 제 기능을 발휘 하면서
국내에서 다소 관심밖으로  밀려 날 때도 있었지만 1950년
 4월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실황을 KBS가 녹음방송하는데
VOA가 협조 하는 등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나라 방송국이 거의 파괴되는 상황이
되어국내방송이 어려워지면서 VOA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위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을 강화하면서
  한국어 방송과를 신설하고  방송시간도 확대되어 아침 저녁으로 
  30분간씩  편성 되었는가 하면 내용도 다양 해져 국내에 중계방송
되면서 KBS에서 차지하는 방송비중이 커졌습니다.

 

 

 


 한국인이 방송에 참여해야
한국인에게친근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6.25전쟁을 전후로 여러사람의
한국인을  채용했습니다.     황재경목사,
박경호님이 이때 VOA에 참여 했습니다.
 
황재경 목사님은 선교활동을 위해
6.25전에 미국에 가셨다가 VOA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6.25로 돌아올 수 없게된터에 거기에 오래
계셨습니다.  6.25때 VOA에 가신분은  박경호님으로  님은 
1930년대부터 KBS에서 방송을 해 오시면서 1946군정청에서
 KBS기획과장, 편성과장을 맡으신 분이었습니다. 박경호님은
 1949년 미국  록팰러 재단의 초청으로 송영호, 배준호,
김옥열님과 함께 6개월간 연수차 미국에
가신 분입니다.

군정청 방송고문관을 사위로
 맞았던 박경호님은     6개월간의
연수가 끝나고 미국에서 머무르던 중
 6.25를 맞아  VOA로 가셨습니다.  


 

 

 


이 분들은 VOA와 개별계약으로
가신 분이고  전쟁 중에   VOA에 가신
이계원님은 KBS기감자리에서물러나 부산
피난살이를 하시던중 VOA초청으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생을   다 하시던 1968년 2월까지
방송을 하셨습니다. 6.25때는 KBS 국내청취마져
제한적이었을 때라 오끼나와에 VOA대출력
 송신소도 마련해서 국내에서 직접 들을
수도 있도록 하는 등  여러가지
배려를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에서
몰래 숨어 듣는  VOA나 VUNC는 국민들의
유일한 귀였고  길잡이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취재나 제작기능을 갖추지못한 KBS도 이 두 방송
중계를 통해서 KBS기능을 보완 했습니다. 그런데 
 VOA방송중계는 KBS가 방송시간은 할애 했어도 내용은
미국방송인지라  한국정부의 생각에 거슬리는 내용들도 종종
 있었습니다.그래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해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1952년 대통령 간접선거 헌법으로
당선이 어렵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선거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VOA가 한국정부시각으로는 
받아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VOA방송 
중계를 중단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과의 갈등관계는 
어떠했든간에  VOA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방송이라는 인식을
갖게된 우리국민은 오랫동안 VOA를 믿고  친절한
벗으로  우리곁에 있었습니다.   특히 6.25전쟁
중에 우리에게 준 영향력은 컸습니다. 
 

 

 

우리나라 방송환경이 열악했던
1950년대 그때로서는 VOA를 비롯한
미국 방송계를 돌아보면서 그곳에서 방송을
 하거나 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때 방송인의
교류나 연수등을 통해   오랜기간 우니나라 방송에
영향을주었습니다. 윤길구, 조남사, 한기선, 유병은,
노정팔, 최창봉닌등미국 연수 유학을 가면
의레히 들리는 코스가 VOA 였습니다.
 

 

 


 1959년부터는   KBS아나운서가
2년간 VOA에 가서방송 한다는 협약이
채결되어 우리방송인이 본격적으로미국의 소리
방송에 참여 하기도 했습니다.이 협약에 의해서
 최초로 2년간 VOA에 근무 하게된 분이 장기범
님이고 님은  다녀 오신 후 중앙방송국의
방송과장 맡게 되셨습니다.

    장기범님은 우리나라
 방송이 공정성을   잃을때면
우리방송이 이러면 안되는데.....라고
 아쉬어 하시면서 VOA공정성을 예로 들으
셨습니다. 그 뒤 VOA에 다녀오신 분이 강익수님
으로돌아 오신 뒤 얼마 안 있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고 그      뒤를 이어 가신분이
송한규님으로 미국에 머물렀습니다.


 

 



강찬선님은 다녀오셔서 아나운서실장,
방송과장을 거쳐 공사 초창기 이사를 하셨지만
그 뒤를 이어 가신    이광재님은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송한규님 이광재님이 미국에 머부시고
 얼마 안있다가 1972년 우리나라 10월 유신이 있을 무렵
 VOA방송 내용이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VOA중계
방송이 KBS에서      사라지면서 공식적인 
아나운서 파견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VOA방송을 듣기가 어려워지기는
했어도 민영방송이나 단파방송 위성
방송등을 통해서 그 방송에 접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많은줄 압니다.
 

 

 

 

다음은 미국의 소리 홈에 올라있는 내용을 옮겼습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 (Voice of America)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 24일 독일어
뉴스로 첫 방송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이 2차 대전에 휘말려들게 된지 79일
후의 일이었다.  뉴욕에 있는 한 작은 사무실에서 송출을
시작한 “윌리암 할란 헤일”    대위가 맡았던 15분짜리
첫 독일어 방송은 “뉴스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전해드릴
것입니다”라는 다짐으로 시작되었다.
 
이 첫 약속은 지금까지도
미국의 소리 방송의 보도 지침이 되고
 있다. 독일어 방송에 뒤이어 이탈리아어,
 불어, 영어 방송이 시작됐으며 한국어 방송은
 6개월 후인 1942년 8월 29일 첫 전파를 탔다.  
전쟁 중에 VOA는 “전시 정보국” (Office of
 War Information) 소속이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미국무부 산하로 들어갔다.

그후 1953년 미국정부의
 해외 공보 업무와 문화 교류 사업을
관장하는 “해외 공보처” (U.S. Information
 Agency)가 신설되면서 VOA는 USIA로 옮겨갔다.
1999년 10월1일, USIA가 미국무부에 통합되자, 미국의
소리는 “방송 위원회” (Broadcasting Board of Governors)
아래 독립하게 되었다. “방송 위원회”     (BBG)는 9명의
방송위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8명은 대통령이
 임명해 상원의 인준을 받도록 되어있다.
나머지 한 위원직은 국무부장관이
자동으로 맡게 되어있다.
 
미국의 소리는 지난 60년동안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해 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약 120 개의
비슷한 국제 방송들과 경쟁하고 있는 VOA 는
 매주    9천 백만 전세계 청취자들에게 단파와
중파, 그리고 현지의 AM과 FM 방송국들을
통해 53개 언어로 방송되고 있다.
 
 매년 VOA가 전세계 청취자들로
 부터 받는 편지는 20만   통이 넘으며,
2000년도 VOA 예산은 기술 부문과
 다른 지원분야를 제외하고 1억
5백60만 달러였다.

 
편집권의 완전 독립:


VOA가 국영 방송이기 때문에
혹시 미국의 좋은 점만 알리고 나쁜점은
 감추려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VOA는 편집권의 완전한
 독립을 행사하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70년대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최근의 “
클린턴 대통령의 모니카 르윈스키
 추문사건”등 미국 대통령들이 연루된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서도 VOA 는 정부의
 부처나 그 누구로 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방송했다.
 
이 기사를 삭제하라던가
 중요하지 않은 기사로 처리하라고
지시받는 일이 전혀 없다.    한국어
 방송의 경우    편집권은 한국어
방송국장이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소리 헌장:


1976년에 제정된 미국의 소리
 헌장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포괄적인
 뉴스를 방송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또 미국
사회의 실상과 주요 사상 및 제도를 균형 있게
제시하고   미국의 정책을 분명하게 알리는
한편 이에 관한 책임 있는 토론과 견해를
 제공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헌장에 부응해서
 미국의 소리에서 내보내는 뉴스는
 2개 이상의 뉴스 소식원(news sources)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전파를 타지 못한다.
그만큼 정확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정보의 생명줄:


VOA는 평화시나 정치적 소요의 시기에
해외에 있는 청취자들에게 정보의 생명줄이 되고 있다.
워싱톤 본부에 있는 50 여명의 기자들과 편집인들, 미국과
 전세계에 나가 있는 약 30명의 특파원들은 매일 평균 150개의
 뉴스 기사를 송고해 오고 있다. 그밖에 “통신원”이라 알려진
 현지 주재 기자들도 매일 새로운 뉴스와 현지
보도를 보내오고 있다.
 

제휴 방송국들:


오늘날 VOA의 53개 언어 방송들은
전세계 1,700여개 래디오 방송국들에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휴 방송국들은 VOA 방송을 송출하는 11개
인공위성을 통해 프로그램을 전달 받는다.

 
VOA 텔레비전:


미국의소리는 주간 TV 시사 프로그램
 “This Week”과 “News in Review”를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에 방영하고 있다.   또 알바니아어와
보스니아어, 영어, 화시어, 인도네시아어, 만다린어,
세르비아어, 스페인어등 8개 언어방송들은 일부
프로그램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동시 방송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


VOA Web site는 매일 53개
 언어 방송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인터넷을 통해 음성 파일로 각 언어
 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일부 언어 방송은
생방송    또는 녹화된 비디어 화면을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기도 한다.



워싱톤에서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VOA 워싱톤 본부는 40여개의

라디오 스튜디오와 3개의 TV 스튜디오

그리고 Digital stereo master control (주조정실)을

갖추고 있다.   또 전 세계에 파견되어 있는 특파원들과

 통신원들이 보내오는보도를 24시간 녹음하는 버블 (Bubble)

이라는 녹음실이 있다.     22개의 중계소와 임대 시설을

 통해 VOA는    5대양6개 대륙에 있는 청취자들에게

인공위성과 단파, 중파로 프로그램을 송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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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방송의 날, VOA 원로방송인 특집 좌담회/1964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951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