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A 미국의 소리 방송과 한국인의 인연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아침일직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오는 독특한 억양에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뉴-스를 들으신 분 들이많으실 줄 압니다. 이것이 미국의 소리 방송이었습니다. 제 2 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탄생한 VOA 미국의 소리 방송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부터깊은 인연을 맺은이래 1972년 KBS에서 VOA방송을 중단할때까지 오랜세월 우리의 친숙한 벗이었고 KBS에서 방송이 중단된 뒤에도 민영방송이나 단파방송 또는 위성방송등을 통해서 그 방송에 접하시는 분들은 많습니다.
2차대전중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VOA는 해방후 우리 방송이 제 기능을 발휘 하면서
국내에서 다소 관심밖으로 밀려 날 때도 있었지만 1950년
4월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실황을 KBS가 녹음방송하는데
VOA가 협조 하는 등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나라 방송국이 거의 파괴되는 상황이 되어국내방송이 어려워지면서 VOA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위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을 강화하면서 한국어 방송과를 신설하고 방송시간도 확대되어 아침 저녁으로 30분간씩 편성 되었는가 하면 내용도 다양 해져 국내에 중계방송
되면서 KBS에서 차지하는 방송비중이 커졌습니다.
한국인이 방송에 참여해야 한국인에게친근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6.25전쟁을 전후로 여러사람의 한국인을 채용했습니다. 황재경목사,
박경호님이 이때 VOA에 참여 했습니다.
황재경 목사님은 선교활동을 위해
6.25전에 미국에 가셨다가 VOA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6.25로 돌아올 수 없게된터에 거기에 오래
계셨습니다. 6.25때 VOA에 가신분은 박경호님으로 님은
1930년대부터 KBS에서 방송을 해 오시면서 1946군정청에서
KBS기획과장, 편성과장을 맡으신 분이었습니다. 박경호님은 1949년 미국 록팰러 재단의 초청으로 송영호, 배준호, 김옥열님과 함께 6개월간 연수차 미국에 가신 분입니다. 군정청 방송고문관을 사위로 맞았던 박경호님은 6개월간의 연수가 끝나고 미국에서 머무르던 중
6.25를 맞아 VOA로 가셨습니다.
이 분들은 VOA와 개별계약으로
가신 분이고 전쟁 중에 VOA에 가신 이계원님은 KBS기감자리에서물러나 부산 피난살이를 하시던중 VOA초청으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생을 다 하시던 1968년 2월까지 방송을 하셨습니다. 6.25때는 KBS 국내청취마져
제한적이었을 때라 오끼나와에 VOA대출력
송신소도 마련해서 국내에서 직접 들을 수도 있도록 하는 등 여러가지 배려를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에서
몰래 숨어 듣는 VOA나 VUNC는 국민들의
유일한 귀였고 길잡이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취재나 제작기능을 갖추지못한 KBS도 이 두 방송 중계를 통해서 KBS기능을 보완 했습니다. 그런데 VOA방송중계는 KBS가 방송시간은 할애 했어도 내용은 미국방송인지라 한국정부의 생각에 거슬리는 내용들도 종종 있었습니다.그래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해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1952년 대통령 간접선거 헌법으로 당선이 어렵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선거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VOA가 한국정부시각으로는 받아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VOA방송 중계를 중단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과의 갈등관계는
어떠했든간에 VOA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방송이라는 인식을
갖게된 우리국민은 오랫동안 VOA를 믿고 친절한
벗으로 우리곁에 있었습니다. 특히 6.25전쟁
중에 우리에게 준 영향력은 컸습니다.
우리나라 방송환경이 열악했던
1950년대 그때로서는 VOA를 비롯한
미국 방송계를 돌아보면서 그곳에서 방송을
하거나 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때 방송인의
교류나 연수등을 통해 오랜기간 우니나라 방송에
영향을주었습니다. 윤길구, 조남사, 한기선, 유병은,
노정팔, 최창봉닌등미국 연수 유학을 가면
의레히 들리는 코스가 VOA 였습니다.
1959년부터는 KBS아나운서가
2년간 VOA에 가서방송 한다는 협약이 채결되어 우리방송인이 본격적으로미국의 소리 방송에 참여 하기도 했습니다.이 협약에 의해서 최초로 2년간 VOA에 근무 하게된 분이 장기범 님이고 님은 다녀 오신 후 중앙방송국의 방송과장 맡게 되셨습니다. 장기범님은 우리나라
방송이 공정성을 잃을때면 우리방송이 이러면 안되는데.....라고 아쉬어 하시면서 VOA공정성을 예로 들으 셨습니다. 그 뒤 VOA에 다녀오신 분이 강익수님 으로돌아 오신 뒤 얼마 안 있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고 그 뒤를 이어 가신분이 송한규님으로 미국에 머물렀습니다.
강찬선님은 다녀오셔서 아나운서실장, 방송과장을 거쳐 공사 초창기 이사를 하셨지만
그 뒤를 이어 가신 이광재님은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송한규님 이광재님이 미국에 머부시고 얼마 안있다가 1972년 우리나라 10월 유신이 있을 무렵 VOA방송 내용이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VOA중계 방송이 KBS에서 사라지면서 공식적인 아나운서 파견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VOA방송을 듣기가 어려워지기는 했어도 민영방송이나 단파방송 위성 방송등을 통해서 그 방송에 접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많은줄 압니다.
다음은 미국의 소리 홈에 올라있는 내용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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