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KBS 초기 보도방송의 인맥을 찾아

이장춘 2010. 12. 31. 17:53

 

 

 

  

KBS 초기 보도방송의 인맥을 찾아

 

 

이 글은 1945년 해방되면서 비롯된

 KBS보도 방송의 뿌리를 찾아 1973년 3월

공사발족까지의 인맥을 더듬어 보려고 쓴 글입니다.

기록이 많지 않아 그 시절을 살아오신 선배님들의 얘기에

기초를 두고 썼고 앞으로도 수정 보완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선배님들의 의견을 들었으면 합니다. 

 

 

 

1947년 11월의 방송과 직원들입니다.

방송과에는 아나운서와 기자가 근무했습니다.

번호따라 1.문제안, 2.이계원, 3.윤길구, 4.민재호,

5.전인국, 6.최용희, 7.  9.김인현, 10.이덕근, 12.강문수, 

13.윤용노, 14. 편용호, 15.강준원, 16.이진섭, 17.

홍준, 18.이성수, 19. 위진록 아나운서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7. 8.  11번은 확인

되는데로 올리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통신이나 신문인들이 발행하는 신문을 번역개서

방송하거나 일본방송을 중계하는데 그쳐서 특별히

보도방송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해방된날부터 사정이 급격히 달라져서

해방되던 그 다음날 당시의 우리말 방송을 전담하던

이혜구 방송과장은 아나운서 문제안을 불러 취재활동을 하도록

 구두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문제안은 그로부터 우리나라 방송기자의

 제1호가 되었다. 곧이어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조동훈 기자가 취재활동에 나서면서

두 사람의 취재기자가 활동하게 되었다.

 

이무렵에는 기사마다 취재기자의

네임 사인이 들어가 우익진영을 주로 취재하던

문제안기자가 청취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반면

좌익진영을 주로 취재하던 조동훈기자는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 안 있다가 이덕근 아나운서가

 기사편집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강준원, 조한긍이

보강되면서 방송과 안에 기자실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덕근기자는 새로 마련된 보도계장을 맡았다.

 

밖에 나가 취재활동을 하는 기자를

필생기자라고 하고 편집 기자를 사자출(寫字出)이라고

 부르던 때다.   문제안, 조동훈기자가 방송국을 뜨면서 최재요,

권중희, 김인현, 편용호, 김우용, 김광국기자가 보강 되었다.

김광국은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를 하다가 월남해서

대북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일이 많아지면서 1949년 10여명의 기자를

공개채용 했다.  현재 방우회 회장 한영섭 기자를 비롯해서

 신기철, 이건정, 이경수, 김영철, 조동표, 조낙기, 구주현기자가

그리고 한해뒤인 1950년초에 입사한 조용하, 홍순구, 양무용기자등

 보도실은 모두 18명의 기자가 활동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는

오랫동안 KBS를 지키신 분들도 있었지만 문제안, 이덕근,

편용호, 김우용, 조동표기자 처럼 신문사나 정계

또는 학계로 진출한분도 있었다.

 

6.25직전에 강준원기자에 이어 보도실장이 된

 조한긍기자는 부산피난시절을 거쳐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온 뒤까지 보도실장을 맡았고 1949년에 들어온

한영섭,   김인현기자는 6.25때도 생과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취재활동에 임했다.

 

6.25기간 중 어려운 상황에서

기자의 수도 많이 줄었지만 활발한 취재활동을 했다.

방송국이 부산에서 사울로 돌아오면서 보도실의 활동범위가 넓어져

 보도실의 일은 밤낮없이 넘쳐났다. 이 무렵에 이낙용, 손졍호, 송석두,

이창규기자 등이 보강되었다. 이런 가운데 1955년 들어 보도실에

 처음으로 해외기사수신용 텔레타이프가 설치되고 윤태로,

박상진,  한기욱등 외신기자를 새로 모집했다.

 

 

 

 

프린트되어 배달된 통신에 의존하던

외신기사가 한층 더 신속하고 다양해졌다.

오랫동안 보도실장을 맡았던 조한긍기자가 1958년

 공보실로 옮기면서 한영섭기자가 그 후임으로 20명 가까운

 기자들이 활동하던 보도실을 이끌게 되어 4.19가

일어나던 해 1960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방송국을 떠난 한영섭기자는

1990년대부터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감사,

6.25종군기자회 회장, 방우회(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6.25전부터 한영섭기자, 조동표기자와 함께 활약하던 김인현기자는

 1961년 MBC 문화방송을 창설할 때 보도책임자로 옮겨 오랫동안

방송과 인연을 맺었고 제10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방송영상산업진흥원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4.19, 5.16을 거치면서 많은 분들이 보도실을

떠났지만 윤태로, 박상진기자가 보도실의 맥을 이어오면서

1961년 윤태로기자가,  1963년 방상진기자가 보도실장을 맞게

되었다.  이때의 기자는 20명 내외로 그 구성원을 보면

 

실장 ( 계장 ) 박상진, 이경수, 황태수, 서종화, 

노영대, 강윤영, 김경호, 김창식, 전재만, 신정호,

곽노환, 주창순, 송형근, 김명진, 송정기, 김운찬,

최석진, 박성열, 김귀영, 최이자등이다.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보도실장이 된 박상진기자는

보도의 선진화를 위해 새로운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공개채용을 통해서 황규환, 나형수, 배학철, 임연택 등

 10명의 기자를 모집했고 이때 들어온 기자들은 KBS는 물론

민영방송까지 진출해서 오랫동안 방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했다.

 

오랜기간 보도실을 지켜오던 박상진기자가

1966년 광주방송국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는 서종화기자가

이어받았고 1968년 7월, 중앙방송국, 국제방송국, TV방송국의

 직제가 통합될 때 보도과가 신설되면서 박상진기자가

다시 보도과장을 맡게 되었다.

 

1969년 보도부에 과가 폐지되고

차장제도가 신설되면서 KBS보도방송을 이어오던

 박상진기자는 해외공보관장을 맡아 국위선양에 힘을 기울였다.

신문이나 TV를 보는 사람이 적던 시절 1960년대까지 남녀노소,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라디오와 함께 생활하던 시절에 이들

기자들이 쓴  뉴스는 모든 국민들의 벗이었다.

 

1970년대가 열리면서 TV보급대수가 늘어나고

 주요방송 뉴스시간에 기자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기자는 시청자와 한층 더 가까워졌고 그 역할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해방 직후부터 오랫동안 중앙방송국의 일개 과 안에

 소속되던 보도실은 1968년 직제개편 때부터 라디오부, 텔레비전부,

기술부와 함께 방송의 한 독립부서로 자리 잡게 되었고

1973년 3월 공사창립과 더불어 방송총국 안에

보도국이 되었다가 1980년 방송 통폐합을

계기로 보도본부가 신설되었다.

 

 

 

초기 보도방송을 지켜 오셨던 문제안선생님은

 올해 90으로 건강한 모습이고 이덕근 선생님은 2007년

 세상을 뜨셨다.  1950년대 최초의 방송 종군기자와 보도실장을 한

한영섭님은 82세로 6.25종군기자 회장과 방우회회장등을

맡아 활동 하시고, 60년대 보도방송의 주역이었던

박상진님 역시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 하신다.

 

김인현님은 MBC창설당시 보도국장등을 거쳐

해외 특파원생활을 했다. 퇴직후에는 방송윤리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내시고 1993년 세상을 뜨셨다.

 

조동표님은 스포츠기자 1호로 널리 알려져있고

지금도 건강항모습으로 활동 하신다.

 

 

 

 


 

강홍식 처녀 총각-1.wma

 

강홍식 처녀 총각-1.wma
1.4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