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7) 마지막회

이장춘 2010. 12. 30. 21:28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7) 마지막회

 
 
1990년 4월 30일 KBS에 2차공권력
투입을 계기로 각계각층에서는 공권력 투입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방송민주화가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해주는 가운데   방송, 신문을
포함한 대한민국의모든 언론이 KBS방송
민주화 운동을 지원 했습니다.
 
KBS사원들이 나라의 기틀을 흔든다면서
밀어부치기식으로 내 놓은 허울 좋은 통치권적
차원이라는  것도 깨어난 국민들 앞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KBS사원들은 국민의 힘을 뒷받침 받는 가운데
감옥에 가는 것, 과로로 쓰러지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방송민주화에
매진 했습니다. 이 때의 투쟁을 노동자의  부당한 노동투쟁이라고
몰아부치면서 KBS인들에게  도덕적 굴래를 씌워 매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방송민주화, 언론민주화를 어느 세력도
후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사원들도
방송현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방송이 정상화 되어
갔습니다. 악법도 법이라고 했으니 실정법에 위배된 사원들은
감옥살이를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응어리는 아물어 가고  5월 12일
 7개사 신문사의 제작 거부를 마지막으로 방송이나 신문제작거부는
마무리 되고  5월 15일에는 서기원 사장님이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정상적인 지역방속국장 회의를 여는등 업무는 차츰 정상화
되어가고고 5월 18일부터 모든 사원들이 방송
현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렇다해도 아직 전투경찰이
 KBS를 점령하고 있어 사원들과 종종
실랑이가 있었고  서기원사장님 퇴진운동의

여진은 남아 있었습니다. 구속사원 석방과 무 노동

무 임금 문제가 제기되면서 어수선한 가운데 방송이

진행 되었습니다. 깊은 상처가 하루아침에

 마무리 될 수는 없었습니다.

 
 방송이 정상화 되기 시작 하면서    
방송제도 개편이 표면에  올라 왔습니다.
 KBS문제는 처음부터 방송제도 개편과
맞물리는 사안이기도  했습니다. 
 
방송제도 개편  논의는 1989년부터 
있었습니다.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실시 등
뉴미디어 시대를 눈앞에두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가는 것 이었습니다.
 
방송제도 연구 위원회가 발족되고  
방송위원회가 앞장서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KBS문제는 교묘하게 전개 된
방송개편의 전초전이었습니다.
 
방송제도 연구위원회의 연구결과가
보고서로 나왔지만 갖가지 설이 난무 하면서  
세상은 또 한차례 시끄러웠습니다. 공보처가 자체 안을
가지고  밀어붙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긴장감은  감돌았
습니다. 공보처도 KBS문제로  큰 저항에 부딪쳐 큰 상처를
입었는지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방송 민주화를 후퇴시키기 위한
워낙 강한 집념을 갖은 정부여서 아무도
마음놓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공보처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는 다는 것이었고  KBS에게도 안을
내 놓도록 요구 했지만  KBS로서는 새로운안을
내 놓을 필요성이 별로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6월 11일 최병열 공보처 장관과 노정팔 KBS이사장,
서기원 사장님이 만나 방송구조개편 논의를
했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이때 기획조정실장은 이정석님이었지만
실무에는 거의 관여 하시지 않았고 부 본부장은
 황규환님이었는데  비합리적인 안을 받아 드리거나 작성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서기원 사장님 역시  KBS사장으로서 이미
 KBS를 대표하는  KBS인으로서 마음을 굳혀가시는 분위기였습니다.
공보처가 안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국무회의를 통과한 방송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파행국회가 야기되어
 야당의 장외 투쟁 등으로 정국은 소용돌이치고 세상은
시끄럽기만 했습니다. 공보처의 방송구조 개편 안이 국무 회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되자 이를 놓고 여당과 야당이 격돌하고문공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를 거치는 동안국회는 파행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KBS관련조항은 서기원 사장님과  사원들의
노력으로 독소조항은 다소 제거 되었습니다.
 
6월 20일 이사회가 열리고 여기서
KBS가 내 놓을  방송구조 개편(안)을 보고 받을
것이라면서 그 보고서 안을 준비 하라는 지시가 저에게
있었지만  그 보고서는  어느 부서에서도 작성되는 흔적이 없었
습니다.  이사회에 올라갈  보고서는 제가 작성하기도 하고  해당
부서에 의뢰해서 보고 하기도 하는데  이 안은   담당부서에서 
 직접 작성 보고 해야 될 사안 이었지만 정작  
이를 담당하는 부서는 없었습니다.
 
편성 운영국에서 하는 일인데 거기서도
 모르겠다는 것이고 아니면 기획 조정실에서
해야 하는데   기획조정실의  총수인  본부장님이
 저에게 KBS방송 개편(안)을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실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얘기가
 없으시니 저로서는 답답할 일이었습니다.
 
 6월 18일 확대 간부회의에서 사장님은
 방송구조 개편에 관한 KBS공식 입장 이외에는
일체 얘기 하지 마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장님도
 말씀이 없으시니 방송제도 개편은  아무도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제도 개편에 관한 KBS 안이
마련되지 않은체  6월 20일 이사회가 열렸
습니다.  사장님이 그 자리에서  KBS방송제도 개편에
관한 입장을 직접 설명 했고  지금보다  불리한 안은 있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편성운영국에서
 세부(안)을  작성하도록  했습니다.
 
 편성운영국에서 서술식으로 작성된 안은 
  정부 측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일관 되어  뚜렷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안을 내 놓을 수 없다는
 뜻 이었습니다.  기획조정실에서 안을 작성하기로
했지만 여기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KBS의 공식적인 안은 제출되지 않은체
공보처(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되었고  KBS의견과는
 관계없이 한국방송공사법에  몇 가지 독소조항이  있었습니다.
6월 25일 국무회의에 올렸다는 그 초안을  입수 했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정부의  개입근거를 교묘히 포장 해 놓은 것이었
습니다. 공사법규를   담당하고 있던 저는 그날 밤  1시까지 
그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다음날 아침
보고서를 이사회에 올렸습니다.
 
공보처가 올린 한국 방송공사법
내용에는  이사회가  KBS경영 평가를 해서 
그 결과를공보처장관에게 보고하고공보처 장관의
경영요청이 있을 시 신중 검토해야 한다는 것과 광고방송의
최대한 범위내실시, 연간 사업 계획의 공보처 보고, 부동산

  취득 시 공보처 장관 승인 등이 문제 조항 이었습니다.

 
7월 3일에 법률안이 국회로 넘어간다는
소식에 접하고  국회를 상대로 문제 조항을 수정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서기원 사장님은 문공 위원장으로 내정된
이민섭의원을 비롯해서 이와 관련 있는 국회의원들을 만나셨
습니다. 국회와 관련 있는 사원들도 모두 나섰습니다.
 
 이사회가 KBS경영평가를 해서
결과를 정부에 제출하고  방송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알리는등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때 마련된 제도가  이사회의 경영평가 제도이고
평가서의 정부 제출과 방송을 통해 발표하는 조항입
니다. KBS문제는 이것으로 마무리 되어 갔지만
 정국은 계속해서 소용돌이 쳤습니다.
 
6월 28일 법률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언론은 정부의 방송장악의도라고 일제히 포문을

열고 공보처에서는 최병열 장관, 강용식 차관 등이 방송에

 출연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매체를 총 동원해서
 대대적인 홍보전에 나섰습니다.
 
  야당은  방송관련법이 이대로
법률화 되는것은 절대 불가함을 역설하고
 몸으로 막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전국의 방송인들은
모두 연대해서 방송관련법개악의 저지 투쟁에 나섰습니다.
 한국방송공사법은 현행 법령에서 크게벗어나지 않게 사전 조정
되었지만  전체적인 방송 관련법을 놓고는 문공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 모두 파행으로 진행 되면서  야당이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 투쟁에 나서는 등 정국은 시끄럽기만 했습니다.  
  3당 통합후라 수적으로 적은 야당이 몸싸움도
 안 될 때였습니다.
 
SBS, CATV 등 뉴미디어 관련법도 이때
 통과 되었습니다.  뉴미디어  새로운 방송시대는
이렇게 해서 열렸습니다.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지만
뉴미디어를 열어가는 방송 관련법은 그런대로
방송민주화의 바탕위에서 마련되었습니다.
 
방송제도 개편과 맞물린 방송을

장악 하려던 정부의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들과  방송인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방송은 국민의 것 이여야 하고 방송민주화는 실질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방송사 (放送史)는 힘 있는 자가 방송을  제일 먼저

수중에 넣고자 한다는 사실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1988년

민주화된 방송관련 법률을 갖기 전까지 정부는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방송을

장악 해 왔습니다.

 
일제 때 기구는 사단법인이다
조선 방송협회다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해방되자 그 다음날
부터 건국 준비위원회라는 것이 생겨  정부도 아닌
일개 단체가 방송을 접수하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군정이 시행되자 조선방송협회는
 놓아둔 체 방송기능만 군정청에 귀속시키는
이상한  운영형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1948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이름뿐이던  대한방송협회 마저
없애버리고 아예 국유화 해 버렸습니다.
 
6.25로 남침한 적군이 방송국이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오자  제일먼저
방송국을 점령 해 버렸습니다. 4.19로 들어선
민주 정부도 KBS보도가 마음에 안든다고 검열
 운운 하자 당시의 보도실장은 자리를 떴습니다.
5.16은 방송국을 사전 점령하고 그날
방송을 신호로 일을 벌였습니다.
 
60년대 중반 방송이 말을 안 듣자
 앵무새 사건 이라는 희안한 일어 났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동아방송편에 있습니다.)  10.26이
일어나자 방송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방송국에
군대가 밀어 닥쳤고 계엄령을 통해서 모든 것을
그들의 뜻대로 좌지우지 했습니다.
 
6.29는 방송을 비로소 국민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가
복잡하게 돌아갔습니다. 새로이 탄생한 문민정부는
방송장악은 꿈도 꾸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뒤이어 탄생한 국민의 정부는
정부부처에 방송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으면
필요 이상의 일을 할 수도 있어 아예 기구를  없애 버렸
습니다. 오랫동안 방송장악에 앞장서 오던 실무기구
방송관리국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방송위원회라는 독립기구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서 일을  하라고 그 기구에

일을  맡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걸림돌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방송위원회를 앞세워

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그런일이

있을때마다 KBS사우회는 이에 반대하는
강력한  성명서를 냈습니다.
 
2008년 요즈음도 KBS 재정이 어려워지자
이를 교묘히 이용하려는 기도가 있다는 얘기들이
들립니다. 언제나 힘 있는 자의 유혹은 있기 마련입니다.
힘 있는지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던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방송을 장악 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인사와 재정이 확실하게 독립되어야 
방송민주화는 실질적으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KBS재정구조는 시청료와 광고료가 2대축
입니다.  요즈음 다른 수입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주재원은 여전히 수신료와 광고료입니다. 광고료는 광고공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자율적인 운영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신료는
 국회의 승인 사항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기화로 국회는 수신료인상등을
놓고 정치적 흥정거리로 삼으려는 기도가 있어 왔습니다. 수신료는 물가
연동제 등을 통해서 늘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KBS가 민주화를 지속적 지켜나가려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방송이 되어 국민의 힘을 뒷받침
받아야 합니다.  방송의 내용도 문제지만 경영도 또 사원들의
일하는 태도도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방송으로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보수는 더 받으려 하고 일은
적게 하려한다는 생각이 국민의 마음속에 심어져서는
 사랑 받을 수 없습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바탕위에서 방송을
운영할 수 있는 재원과 인사가 어느 세력의 지배
 하에서도 벗어나  국민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제도적
장치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모든

 방송인 들이 힘을 기울일 때 방송민주화는

지켜 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KBS여 영원  하시라 !  
 
 KBS인이여 자랑 스러워라 !
 
 
저는그 현장에서  겪고 본 것을 사실대로

썼습니다. 이 글에 관해서 많은 분들이 말씀 해

주셨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생생 하다고도 하시고  

이런일까지 속속들이 모르셨다고도 하셨습니다. 어느

분은 방송사에 꼭 기록되어야 할 일 이라고도 하셨

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시고 격려 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관련 글 더 보기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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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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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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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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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5)

http://blog.daum.net/jc21th/17780669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6)

http://blog.daum.net/jc21th/17780670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7) 마지막회

http://blog.daum.net/jc21th/17780671

 

동영상으로 본 1990년의 KBS 방송 민주화운동 현장 

http://blog.daum.net/jc21th/17780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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