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6)

이장춘 2010. 12. 30. 01:03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6)
  
 
3당통합으로 거대 여당이 된  민정당의
인기는 밑바닥을 해메고 있었습니다. 민정당 스스로
조사한 각 당의 인기도는  민정당 14.8%, 국회의원수로
 제2당 평민당이 18.6% 제3당 민주당 23%였습니다.
민정당의 14.8%의 인기도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도는 추락 해 있었습니다.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부동산을
비롯한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오르고
전세 값 역시 연간 50%에서100%까지  
뛰는 상황 속에서 사방에서 들리노니
 한숨소리 밖에 없었습니다.
 
 KBS문제를 유발시킨 그 장본인들은
이런 사회 상황들이 KBS문제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고 하면서 KBS사원들에게
화살을 쏘아 댔습니다.
 
그러나 KBS문제에 관해서 정부가
홍보수단을총동원 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의 60%가 정부 측에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 주듯이 국민들은 그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4 .23담화가 발표되던 그날 4월
23일에는 KBS지키기 시민모임이 KBS
신관에서 열려 서강대 박홍총장, 국회의원 이철,
 여성의 전화 김희선,작가 김홍신 등 60여명의 뜻있는
 인사들이 참여해서 방송민주화가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4월 25일 KBS를 비롯한 언론사
사원들은 평화 대행진을 벌리기로 했습니다.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평화적으로 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여의도까지
평화적인 행진을 한 것이었습니다. 
 
 4시부터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이사회 준비에 바빴지만 그 소식을 듣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같이 핸드폰 같은 것이
있는때도 아니어서 여간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이사회를
담당하고 있던 저는 이사회가 잠시 지연되고 있어서
 옥상으로 가 보았습니다. 질서 정연한 행렬의
선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의 행진은 아주 모범적으로 진행
 되었고 외신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평화 행진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가운데  4시 반부터 이사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방송정상화 소위원회의 활동상을
 報告 받고 결의문을 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결의문다운 결의문이 나올 상황은 아니
었습니다. 격론 끝에 결의문이 나왔지만 문제 해결에는
별로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답답해진 이사님들은
 언론과의 개별적인 인터뷰에 나서기도 하고 나름대로 방안을 궁리
해 보기도 하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회 결의문이 유인물로 배포 되었어도 별로 관심의 대상은
못 되었습니다.  소위원회 인원을 보충해서활동을 계속
하기로 하고 이 날의 이사회는  끝났습니다.
 
월 27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원로들이 모여 KBS문제
해결과 방송정상화를 위한 담화를 내고 시국방안을
내 놓았습니다.  4월 28일 방송민주화에 찬물을 껴 안기려던
주체세력의 대표 최병열 문화공보부장관과 민자당의 김용갑이
 KBS 본관 6층에 나타나 자기들이   문제를 풀 열쇠를
쥐고 있다면서 활동을 했습니다.
 
온탕, 냉탕을 오가며 KBS사원
대표들과 합의서라는 것을 마들었습니다.
의지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 될 일이었지만
KBS안에 와서 문제를 풀어갈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60명에 달하는 내, 외신
기자들이 KBS에 몰려들었습니다. 최병열 장관이 부사장실에
들려 기자 회견을 하고 김용갑 의원이 청와대의 교감을 갖고
 온 듯한 인상을 풍기면서  비상대책 위원회가 선정한
다섯사람의 대표 위원을 만나는 등 부산히 움직여
 사원대표들과 합의문을 작성했습니다.
 
 농성은 이 시간부터 풀고 30일부터
방송을 정상화하면 서기원 사장님이 사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정상화 전에 사원투표를
실시해서 그 결과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고 농성도 풀었지만 김용갑 의원이 정부대표라는 것도
증명이 안 된데다 서기원 사장님이 그렇게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합의에 참석했던 대표마저 사원총회장에서  
부결  발언을 하는 등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사원총회가 열릴 4월 30일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임 중에서 가장 많은 사원들이
한 자리에 참여 했습니다. 지역에서도  1,000명에 달하는 
사원들이 왔습니다. 투표 대상은 본부장을 제외하고 국장급까지
6,922명이었습니다. 노조원들의 투표가 아니라  전 사원들이
참여하는 사원투표였습니다. 오후 4시 20분부터 7시까지
투표가 진행되어 8시 40분, 결과가 발표 되었습니다.
 
지역 사원 921명을 포함해서 3,839명이
투표에 참여 했습니다.  방송 정상화를 반대하는
표가 2408명으로 62.7%가 되었습니다.  9시 뉴스에
그 결과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11시부터 전투 경찰들이 KBS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야당의원으로 국회 문공위원장을
 맏고 계시던 정대철의원이  KBS에 오셔서 공권력 투입에
관한  걱정을 했습니다.  각계각층에서  공권력 투입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는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날 밤 11시15분에는무려
2,300명이나 되는 전투경찰이 KBS를
포위 했습니다.  농성을 풀지 않은 사원들을 연행
하겠다고 하면서  마지막 까지 중앙로비 (그때는 그곳을
민주광장이라고 불렀음)에 남아 있던 사원들을
포위하고 333명을 연행 해 갔습니다.
 
그로부터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전투경찰이  
KBS안  곳곳에 배치되고  16명의  사원이 구속되었으며
두명의 사원이 과로로 숨졌습니다.  김용갑의원은 극우적인
발언으로 총무처 장관을 물러난 적이 있는 사람이고 최병열 장관은
 방송장악을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인데
그런분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것 자체가
전후가 맞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KBS 전방송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전투경찰을 동원해서 두 차례나
 작전을 벌리고  한달이 넘도록 정상적인 방송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나라 방송사에  6.25전쟁
때를 제외 하고는  없었습니다.
 
이날의 공권력 투입에 항거해서 
   MBC가 5월1일부터 4일까지, 그리고
 CBS가  5월 1일부터 7일까지 방송제작을
 거부했고  신문사에서도  제작 거부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5월 12일 하루동안
주요 일간지  7개사 신문제작이 
거부 되었습니다.
 
KBS사원들은 물론 모든 언론사 사원들과
국민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이 그 지긋 지긋한
 5공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KBS문제는
정부가 방송을 장악해서 방송을  입맛에 맞도록 해 보려는
세력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교묘하게 진행 시켜
갔지만 역사는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5공 이전 독재가 지배적이던 시절
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가 있을 때 마다
 “통치권적 차원 ”에서 라는 말을 썼고 이 때도 방송민주화를
거역하던 세력들은  말을 앞세워 자기들 뜻데로 밀어붙였습니다.
 333명의 사원들은 여러 경찰서에 분산 구금되고   밤을 새워
조사를 받았습니다.    16명의 사원이 구속 되고    사람의
사원은 과로로 숨졌습니다.  한 사람은 일터에서
 한사람은 농성장에서 숨졌습니다. 
 
 김태준, 구능회, 이임호, 이경희 사원이
이날 구속 되었고  다섯 명의 사원에게는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 되었습니다. 5월 4일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KBS사원을 채포한다는 명분으로  수색영장도 없이
 제작 거부 농성중인 MBC에 150명의 전투 경찰이 투입되었습니다.
무소불위의 행위가 빚어지고 이를 거세게 항의하는 방송인들 앞에서
 경찰이 사과를 했지만 그들 앞에 방송민주화를 거역하는 것 외이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전영일 사원이
 채포되어 구속 되었습니다.
 
안동수 사원은 몇가지 마무리 할 사항이
 있어서 피신했다가 5월 9일 2시부터 열린 사원총회를
 끝내고 자진출두 구속됐습니다. 최창훈, 고범중, 김영달 사원도
 자진출두해서 구속 되었고 뒤에 몇 사람의 사원이 구속 되었지만
 구속 대상 사원 중한사람은 정권이 바뀔 때 까지
피신해서 구속을 면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1990년 5월 8일
이 나라 지성의 대변인이라고 불리는
전국의 1041명의 언론학 교수 이름으로
방송민주화에 관한 시국선언문이 나왔습니다.
 
 “방송민주화는 보장 되어야 하고
 
KBS방송민주화 운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의 정치적,
경제적 자주권은 보장 되어야 하고 서기원
사장은 퇴진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민주 사회단체들은 KBS방송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 주셨습니다.
 
서기원사장님의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을 국민의 방송으로
지켜가려는 투쟁이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투쟁의 의미를  알게 되었기에  방송민주화를
지키는데  함께 해 주셨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