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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환구단(원구단)과 조선호텔, 황궁우

이장춘 2010. 10. 15. 18:54

 

 


역사의 현장 원구단과 조선호텔, 황궁우

 

 

정동의 경성방송국에서

500m정도의 거리에 있었던 조선호텔은 

그 시대에 최신 건물로  조선의 명소가 되어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소공동 이름의 유래를

낳게한 태종때의 소공주 택으로부터 남별궁,  임진왜란때 일본군

 사령부,  명나라군 사령부를 거쳐 선조때의 남별궁,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던 원구단 그리고 원구단이 헐려 철도 호텔을 지었다가

조선호텔로 바뀌고 1960년대 오늘의 조선호텔이  새로

 세워지는 등 갖가지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고종은 1897년 9월 17일 !

대한제국의 대 황제임을 만천하에

선포했습니다. 외세가 판을 치던 그 시절

로시아 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이 1897년 2월

20일 1년만에 경운궁(慶雲宮)으로 이어(移御)해

남별궁 터에 화강석으로 3층의 제천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으니 이곳이 바로

 원구단(圓丘壇)이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 보겠습니다.
  
 
조선 제3대 태종 때의 일입니다.
태종은 여섯 공주가운데 둘째딸 경정공주
(慶貞公主)를 사랑했고 또 그 남편이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인지라 태종은 이곳에  집을  마련 해 주었습니다.
그 집이 小公主宅이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1935년
5월 15일, 조선일보, 방송국과 조선호텔 참조)

 
 

小公主宅이 있던곳은  선조때 이르러
그의 셋째아들 의안군이 머무르면서  南別宮이라고
불렸습니다. 서울이 대부분 불타버린 임진왜란때 남별궁은
남아 있어서 일본군은 이곳을 총 사령부로 삼았다가 1년후에
물러나니 이제는 명군이 들어와서 이여송이 이곳에 머물렀
습니다.  그 뒤로 명나라와 인연이 깊어져 명나라
사신이 오면  여기에서 머물렀습니다.
 


 
1910년 일제가 이 나라를
식민지화 하면서 1913년에 이르러
남별궁과  원구단은 헐리고그 자리에 철도호텔이
 들어섰습니다. 이로서 역사의 사연을 안은 남별궁과
원구단은 사라지고 일본 초대 통감의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 (長谷川 )라는 붙는 등 일본
식민지의 중심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원구단 옆에 있던 황궁우는
초라한 모습으로 그때 그 자리에
 있는 황궁우를 원구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구단과 황궁우는 엄연히 다름니다.
 

 

황궁우는 1899년에 조선의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해 원구단의
바로 곁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입니다.
지금도 소공동 조선호텔과 담으로 경계를 이루고
조선호텔에서 잘 바라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읍니다.
 

 
  
1897년 9월 17일 조선왕조의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했고. 1913년
원구단은 헐려철도호텔이 새워져
오늘의 조선호텔이 되었습니다.
 

 


재미작가 김유미님이 역사의 현장 원구단을 찾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63년 이화여대를 나온 김유미님은

 그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오랜동안 작가로, 교육자로 활동 해

왔고 요즈음도 칼럼리스트로 활동한다.  1970년대까지의 선도적인

 방송작가 김영수선생님의 둘째따님이기도 하다.

 

 

 

 

환구단과 조선호텔 역사 글 더보기

 

환구단 사적 제157호 황궁우 조선호텔

http://blog.daum.net/jc21th/17781822

 

 

원구단과 황궁우 일대의 모습입니다.

 

 

 

  

 

현 조선호텔이 지어지기 전의

환구단과 황궁우, 조선호텔, 소공로

 등을 볼 수 있는 사진 몇장을

더 올렸습니다.





황궁우 뒤의 큰 건물은 반도호텔,  지금의 롯테호텔자리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가야금 산조 이슬기-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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