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84년 7월호 월간 방송지에 실린 황문평님의 초기 한국방송 특히 음악부문에 관해서 채험담을 쓰신것으로 방송에 관심 있으신 분에게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되어 사진을 첨부해서 원문 모두를 올렸습니다.
황문평님이 쓴 초기 한국 방송비사
1933년 4월 29일 (토요일) “2중방송 축하 특별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저녁 8시 45분 유행가 방송이 있었다. 노래는 당시 연극무대의 인기배우 겸 30년대 레코딩 가수였던 강석연 (姜石燕)인데 노래 반주 악단 멤버가 아주 이색적이다. 바이올린 전수린, 크라리넷 김교성, 기타 백견, 드럼 문호월 이었다. 강석연의 노래 “꼭각시 설움” 등 네 곡을 15분 동안 반주한 이 4인조 악단 멤버들은 당대의 가요 작곡가들이었던 것이다.
전수린 작곡 황성옛터, 문호월작곡 노들강변, 김교성작곡 능수버들, 우리가요의 고전명곡으로 요즈음도 디스크의 스텐다드 넘버이며 수시로 전파에 실리는 멜로디이기도 하다. 1935년 홍난파선생 주관으로 JODK 오케스트라가 조직 되었다. 그러나 1941년 말 일제의 태평양전쟁 소용돌이 속에서는 나가 가와 (中川榮治)라는 엉터리 음악 지휘자가 방송국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인기가수 백년설이 아들의 혈서라는 노래 (반도출신 지원병이 전지에서 싸우다가 백골로 돌아와 호국신사에 뭍이겠다는 충성성의 각오를 노래하는 것) 노래를 방송하기 위해 매일 밤 방송국에 출근하기도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8.15 해방직후 다분히 미국방송식인 프로와 시간 편성이 되어 가던 때 부정기적으로 일반 공연 장소에서 연주하던 경음악단들의 방송국 출입이 더러 있었다.
1947년을 맞으면서 KBS방송극회가 발족되었고 5월에 방송 전속 경음악단이 김생려씨의 지휘로 선을 보였다. 뒤이어 6월에 방송 경음악단이 편성되었다. 일찍 댕까스(天勝)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발레리나였던 배구자(裵龜子)레뷰단의 악장이던 서영덕(徐泳德)이 악단 편성을 맡았다.
4리듬(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4색스폰, 3부라스 2트럼피트, 1트럼본) 4명의 바이어린과 에코디언이 곁들인 16인조의 구성이었다. 악단 지휘에는 가요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이 전담했었고 드럼 연주하던 이봉룡과 피아노 파트이던 필자가 편곡일도 맡아 보았다.
전속가수 제도를 실시 이예성, 김백희, 옥두옥, 원방현, 이계운등의 노래가 전파에 실렸었다. 노래와 경음악의 정규방송은 매주 일요일저녁 한 시간짜리 와이드 프로그램으로 엮어졌다. 이 시절 손목인 작곡인 자유의 종이라는 국민가요는 KBS 전속합창단 (최희남 지휘) 화음으로 씨그날 뮤직처럼 메아리 졌었다.
가요의 왜색 풍을 추방코자
민족의 주체성 확립과 왜색가요 일소운동을 위해 신작 라디오 가요창작에 집중 투자하기도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작사는 당시 방송국 문예계에 속해있던 방송작가 김영수, 유호, 이익, 영화감독 김화랑 등이 좋은 가사를 써 주었다. 48년 정월에 전속가수 팀에 들어온 송민도, 금사향 등이 있었다.
박시춘 작곡 고향초를 최초로 방송, 그리고 디스크로 내놓은 여가수 송민도이다. 김백희가 불렀던 손목인 작곡 아내의 노래 옥두옥의 목장의 노래 등 그리고 심연옥이 부른 한강 등이 이 시절에 나온 히트송이었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보처 방송국 으로 국영방송국이 되었고 청취료도 100원에서 300원으로 인상하고 그것이 단파 50Kw, 중파 50Kw등 송신기 증설의 주요 자금원이기도 했다.
일반 서민 대중들에게는 트랜지스터라디오 수신기가 미군 물자 덕분에 널리 보급되던 시절, 라디오가 일상생활 정보제공 그리고 연예 오락 프로로서 절대적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1949년 늦가을 서울 중앙방송국이 저녁 5시부터 하룻밤을 명동 한복판 국제극장 (일제 때 명치 좌) 으로 옮겨졌던 일이 있다.
초대권으로 발행된 입장권 암표로 팔려 나가던 진풍경
모든 방송이 생방송이던 시절 전파로 듣기만 하던 어떻게 해서 방송국이 움직이는가를 청취자들에게 눈으로 보여주는 말하자면 공개방송을 했던 것이다. 국제극장 무대 오른쪽에서 아나운서가 차임 밸을 손수 쳐서 시보를 알리고 저녁 뉴스를 시작, 이어서 어린이 프로 꼬마들의 합창이 서막을 장식했다.
청취자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었던 방송 드라마 인기성우 장민호를 비롯해서 최은희, 박상익의 익살스런 대사와 방송극 작가 겸 연출가인 김영수의 드라마 진행하는 손짓과 움직임은 마치 심포니 지휘자 처럼 정열적이었다.
당시 방송인으로 제일 인기 있던 방송아줌마, 복혜숙씨를 무대에서 직접 볼 수 있다. 해서 초대권으로만 발행했던 입장권이 암표로 팔려 나갔던 진풍경이 연출 되기도 했다. 방송드라마 줄거리보다 극중에서 효과음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 지는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구상이었다.
여기서 한 목보는 효과원 이상만은 원맨쇼론 해야만 했다. 붓대로 만든 피리로 황소 울음소리, 고리짝에 팥을 담아 키를 까불듯 해서 비오는 소리를 내었고 밥공기(나무로 만든 것)를 마룻바닥에 두들겨서 말달리는 소리를 내는 등……. 이상만의 묘기(?)를 마술사의 신기처럼 .객석 에서는 웃음과 함께 감탄사가 연발했었다.
KBS개국이래. 처음 공개되는 종합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노래와 경음악으로 엮어지는 버라이어티 쇼의 방송이었다. 이때처럼 전속가수들의 노래가 돋보이던 때는 다시없었다. 특별케이스 싱어는 역시 신 카나리아 등이었지만 코미디언 이종철과 박옥초의 인기는 장내가 떠나갈 듯 한 박수소리가 증명 해 주었다.
방송국 전속 경음악단의 월급은 8천원에서 1만 2천원이었는데 악단이 출연해야 하는 방송시간에 미군부대 연주공연 이 있어서 차출되는 연주자들은 2천원을 개인부담 해서라도 연주자를 보충, 방송에는 지장이 없도록 충실하게 복무했었다.
제5대 방송국장 노창성씨가 취임하면서 KBS직속으로 방송 문화사가 설립되었다. 1950년 1월 노병철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극작가 유치진을 운영위원장으로 연극인, 악극인, 가수 그리고 전속악단을 총 망라해서 결속시켰다. 이 방송문화사의 첫 사업으로 50년 4월, 명동에 있는 국제극장 무대에서 종합 음악극 십 용사의 막을 올렸다.
6.25전에도 38선 가끔 작은 충돌 다시 말해서 도발이 있어왔다. 그중에서도 개성 뒷산 속칭 까치 산에서 북괴와 큰 전투가 있었다. 이때 우리국군의 용맹한 10명의 용사가 특공대를 조직 적진을 파괴했었다. 이들 10용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장렬한 결사대의 전투를 음악극으로 재현하는 뜻있는 음악극 이었다. 두 달 뒤에 북괴의 불법남침 6.25에 휘말려갔다.
시민증 이외에 직장 신분증 있어야 편리하던 시절
적지 90일간의 악몽 속에서 9.28서울 수복 후 군 방송 반을 통해 전파를 탄 노래 제 1호는 “전우여 잘 자라.” 유호작사 박시춘 곡이었다. 모든 연예인들은 군의 정훈 공연대에 입대 전, 후방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라디오 가요는 대적방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4후퇴, 부산방송국(HLKB)에서 곁방살이 하던 시절, 가요인들의 봉사활동은 군 방송 계통에서의 비중이 컸었다.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광수의 탱고 밴드가 수시로 KBS 프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녹음방송이 실시 되었다. 처음으로 마그네틱테이프를 이용한 녹음이 보편화 되어가던 때이다. 부산 광복동 거리에도 여기저기 검문소가 있었다. 시민증 외에 직장 신분증이 따로 있어야 편리하던 시절, HLKA이라고 인쇄돼있는 방송전속악단 신분증이 제일 대우 받기도 했다.
녹음테이프에 의한 녹음 레코딩 방식이 손쉬워지던 무렵 대구에서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만들어낸 진중가요 그리고 이시절의 대중가요가 레코드로 출반되기 시작했다. SP레코드 제작시대라서 보다 좋은 음질을 수록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부산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 한밤중에 녹음한 가요 곡들의 테이프이었다.
이 테이프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레코드를 제작해온 손 영준의 수완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름하여 스타 레코드사라는 SP레코드 였는데 이중에서 히트송을 골라보라고 하면 황금심이 부른 삼다도소식과 B면에 수록된 박단마양의 슈샤인 보이 단 두곡이었다.
레코딩할 스튜디오가 한군데도 없던 당시상황
1952년 봄에 국방부 정훈국에서 군가 제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사업은 각 군마다 임의로 만든 모든 군가를 정리하는 한편 육, 해, 공군 즉 3군의 군가 중 널리 보급 해야 될 군가 24곡을 선정 레코드제작을 하기로 결정했다. 엄선된 24곡을 정식으로 녹음 하기란 1954년 초 여름 환도 후 정동에 임시로 자리 잡은 (조선일보 뒤편) KBS 라디오국 스튜디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단 한군데도 레코딩 할 스튜디오가 없었던 것이다. KBS음악계장 김창구씨의 주선으로 정동 스튜디오를 밤에만 2일간 사용 할 수 있어 서울 심포니를 동원했고 당시 일류 성악가들을 총 동원하는 수선을 피우기도 했다.
김성태, 김동진, 필자 그리고 육군본부 군악대장이던 김희조씨가 편곡과 지휘에 제일 수고를 했었다. 남성으로 이인범, 이우근, 임만섭, 오현명, 황명덕 그리고 여성으로는 김천애, 김혜란, 이규순 제씨가 밤 세워 가며 군가 취입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군가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SP레코드 12매를 제작하기위해 백은선씨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1953년부터 SP레코드 제작에서 LP레코드 제작시대로의 전환기여서 새삼스럽게 옛날방식인 SP레코드를 제작하느라고 많은 애로가 겹쳐 6개월 만에 3만매라는 레코드가 선을 보이게 되었다.
정동방송귝시절 노명석악단이 단골로 출연해주어 전속악단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고 미 8군에서 활약하던 송민영악단도 좋은 연주 실력을 보여 주었다. 1956년 가을에 공보처에서 최초로 대중가요 작가들에게 건전가요 작품을 의뢰해서 정동방송국에서 녹음제작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노래가 꽃 중의 꽃, 소녀의 꿈, 청춘목장, 금수강산에 백화가 만발했구나, 고향역, 고향에 찾아와도, 등이었는데 자주 방송되면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대중가요들로 손꼽힌다.
1956년 5월 12일 극동에서는 4번째로 TV방송국이 선을 보인 날이다. 이름하여 HLKZ-TV였다. 쇼 공연은 자유 가극단 멤버들이 총 출연한 삼천만의 합창 (판자음악)이었고 TV쇼의 사회자는 코미디언 양석천과 영화배우 노경희였다. 매주말 토요일 저녁 O. B쇼라는 가요프로가 100회를 넘는 장수프로였다.
술 광고만은 할 수가 없어
어느 주말 쇼프로에 출연하기로 한 영화배우 박노식과 여배우 겸 인기가수 나애심 그리고 파리공연에서 돌아온 안나영 (那英)양등이 방송 직전에 출연거부 소동을 벌였다. 우리는 명예를 존중하는 예술가다. 방송에서 술 광고를 하라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이들과 친숙했던 필자가 나서서 상업방송국의 개념과 예술인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TV적인 화면처리)를 구구하게 설명, 겨우 납득을 시켜 아슬아슬 하게 방송은 끝낼 수 있었다.
시은성합창단의 명지휘자 이동일이 “콜로디 패밀리”라고 명명한 TV합창단을 조직 방송 할머니 복혜숙 여사와의 대담을 곁들여 대중가요 가수와 클래식 합창단의 동일무대를 시도했던 것은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만남의 길을 자연스럽게 열어놓기도 했다.
방송국에 자주 출연하던 악단 중에서 손석우의 열의는 대단했다. 저녁방송을 위해 한낮부터 풀 리허설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 이럴 때 손석우자신이 호주머니를 털어 커피 한잔씩이라도 출연진에게 선사했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악단 멤버나 무용수들이미국회사(초창기는 RCA 회사가 직영한다는 인상이 짙었었다) 라서 커피까지 무료로 먹여 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모든 프로가 생방송이던 시절 예기치 않던 중간 CM(스퍼트 광고)이 자주 나가는 것은 프로가 진행이 잘 안되어 이를 땜질하는 방법이었는데 이 중간 CM이 예정회수보다 많아지면 싱글 벙글하는 것은 스폰서 측뿐이었다.
TV 신인가수로 입상해 톱 싱어가 된 1호 이미자
1958년 아마추어 싱어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예능로타리 라는 프로의 연말 결선대회에서 1위 입상자는 후일 이선희라는 팝싱어로 미 8군에서 활약하다가 월남 위문공연대 이후 미국 LA에서 활동하고 있다. (송민영 부인)
이때 3위 입상이라는 아주 나이어린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후일 엘리제의 여왕, 이미자이었다. 60년 초반 각 방송국이 신인가수들의 등용문이 되었지만 TV방송을 통해 신인가수로 입상해서 톱 싱어가 되기로는 이미자가 제1호인상 싶다.
1961년 12월 31일 KBS-TV가 개국 이 나라 TV시대의 장을 열게 했던 중요 역군들은 최창봉을 주축으로 HLKZ-TV 출신의 주요 멤버들이 KBS-TV개국 준비 요원으로 맹활약했다.
라디오 가요라는 생활음악을 개척한 공로
1957년 말 KBS라디오방송국이 남산연주소로 확장되어 떠나간 뒤에 정동방송국은 국제방송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 국제국의 음악 계장이던 이희목이 중심이 되어 은종합창단을 조직했었다. 20여명으로 구성된 혼성 합창단의 특색은 대개가 대학 재학생으로 구성 되었으며 음악적인 수준도 전문가 못지않았다.
국제방송국에서의 이들의 역할은 새미 클래식 음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희목의 재치 있는 편곡 솜씨는 단 선율적인 종전의 대중가요를 화음의 묘미를 살려 음악적으로 대중가요의 새로운 맛을 풍기게 했다. 은종합창단의 활약으로 대중가요가 방송음악으로 대중들의 정서함양에 한몫 한다는 새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이희목의 이런 공로가 인정을 받아 1963년 방송문화상 부문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이 함창단의 중심 멤버 중후일 방송국 현업에 뛰어들어 유능한 PD로 성장한 이가 KBS 오용한과 박창학이었다. KBS국의 음악프로의 공적으로는 라디오 가요라는 생활음악을 개척한 공로는 길이 남을 것이다.
1962년 이후 수많은 상업방송국들이 전파를 띄우면서 라디오 전국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HLKZ-TV 개국의 역사들 -좌로부터 신광우, 황영수, 황문평-
HLKZ-TV 학생 음악콩쿨 입상자 기념 -1957년 피아노 복진태, 심사 김상두 황문평, 사회 최희태
HLKZ, 1957년 연말특집 (좌로부터 이수열, 한사람건너 황문평, 한사람 건너 민병욱, 홍이연
HLKZ에서 황문평 PD의 노래자랑 시상식을 마치고
황문평 (黃文平)님 약력
1920년 10월 23일 황해 해주출생 2004년 3월 13일 사망
경 력
1948 ~ 한국무대예술원 음악원장(문총산하단체) 1950.2 ~ 종군극작가단 상임 위원 1950.10 ~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제2소대 가협창작부(문관) 1952 ~ 1954 정훈국 군가제정위원 1954 ~ 예술타임즈 문화부장(주간지) 1956 ~ 1959 HLKZ TV국 편성과 과장, 음악과 과장 1963 ~ 1965 예연예협 이사장 1963 ~ 예총 부회장 1970 ~ 예술윤리위원회 심의위원 1971 ~ 1973 영화인협 부이사장 겸 고문 1972 ~ 1976 방송윤리위원 1974 ~ 1976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1975 ~ 1982 공연윤리음악심의전문위원 1981 ~ 1999.6평통 자문위원(1기~5기) 현재 5기 위원 1981 ~ 1984 문화방송 프로그램편성 자문위원 1981 ~ 전두환대통령 방미때 민간인사절단원으로 미국,캐나다 순방 1984 ~ 문화사전 편찬위원 1985 ~ 1988 일본민주음악협회 주최 한일음악교류, 콘서트 한국측 코디네터 1988 ~ 1994 공연윤리위원 1996 ~ 한국가요평론가협회 명예회장 1997 ~ 참전예술인협회 명예회장 1998 ~ 한국연예협회 명예이사장 1998 ~ 한국가요작가협회 고문 1998 ~ 한국영화인협회 이사 1998 ~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상 훈
대종상(7회)/1968 청룡상음악상/1970 연극영화예술상/1971/한국일보 부일영화음악상(부산일보주최)/1972 대종상(15회)/1976 아세아영화제음악상(24회)/1978/시드니시 구미6회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4 KBS가요대상(특별공로상) 문화훈장 화관장/1988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서울정도600년)/1994.11/서울시장 대종상 영화발전특별공로상(35회)/1997 제 7회 춘사영화예술상 예술인상/춘사기념사업회/1999.2 제48회 서울시문화상(공연부문)/1999.10 화관문화훈장 나운규영화상 국민훈장 동백장/2004
저 서
연예대감/1961 황문평 작곡집/1961 노래따라 세월따라(가요야화)/1976 가요60년사/1976 한일가요사(일문)/1977,1985 한국대중음악 약사/1985 한국연예인물사(예술세계)연재중 노래백년사/1987 어린꿈의 신화(시와 수필집)/1989 한국대중연예사/1989 황문평 이야기가요사-돈도 명예도 사랑도/무수박/1994 인물로 본 연예사-삶의 발자국(1,2권)/도서출판 선/1998.5
음 반
일본 동지 FM.1 한국가요 개인작품발표 음반 한국일러스트 뮤직작품 발표(독일 쏘노톤 레코드사)
작 품
푸른언덕 등 250여편(영화음악)/1947 뮤지컬 600여곡 이국정원(한국,홍콩 합작영화음악) 탈출명령(한국,홍콩 합작영화음악) 빨간 마후라 꽃 중의 꽃 호반의 벤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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