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경성방송국 개국 전야 그때 그 얘기

이장춘 2010. 3. 10. 05:47

 

 

 

경성방송국 개국 전야 그때 그 얘기

 

서울을 비롯해서 인천, 수원, 개성등
지방에까지 시험방송을 확대하면서 방송에 관한
관심은 고조되었고,  또 1925년 6월부터는 체신국에서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실시했습니다.    매주 일요일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 4회의  정규방송을  
실시했고 우리말 방송은 목요일과 일요일의
 절반정도를 활용 했습니다.
 
50W, 100W, 400W출력으로
방송을 했지만 전파장애를 밪지 않을때라
서울이나경기지역은 물론 그 인근의 지역에서도
들렸고 야간에는 일본에서도 들렸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방송시간은 저녁 7시부터 9시,
때로는 10시까지 실시했습니다.  방송내용은
뉴스를 비롯해서 일기예보, 강연, 동화, 동요, 가요 등 
시험방송이라고 해도 실재 방송과 다를 바 없어서
방송에 접한 사람들은 탄성을 올렸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접한 뜻있는 분들은
방송을 하면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도 누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11개 단체나 개인이 체신국에
방송국 설립 원서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이미 한 도시에
하나의 방송국만 세운다는 관례가 생기고
또 방송은 비영리사업으로 해야 된다는 총독부의
방침이 수립되면서    방송국을 설치하겠다고 나섰던
 개인, 단체들이 하나의 위원회를 마련, 1925년부터 
방송국설립에 나서면서 시험방송도
단일화 되었습니다.
 
 
1926년 2월 15일, 자본금 20만원의
 비영리 사단법인 창립을 목표로 한경성방송국
발기인 총회를 열었습니다. 식산은행에서 설립자금을
융자받게 되어 식산은행 안에 사무실을 마련 했습니다.
그때 그 내용이 실린 2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올렸습니다.
 
 
 
   4월 30일 경성방송국 창립총회를 갖고
 7월 1일에는 정동 1번지에 국사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이 무렵부터 시험방송도 더 강화했고 노창성님이나 시노하라님 등 
남자들이 하던 방송도 좀더 부드러운 여성 아나운서가 참여 했습니다.   
이해 7월부터 방송에  참여한 아나운서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입니다.
 
 
 경성방송국 기공을 전후해서
방송국 설립에 참여 하신분이  동양에서는 
 한 분밖에 없던 1급 무선기사 한덕봉님이었습니다.
이 무렵에 시험방송을 위해 채용된 분이 당대의 이름있던
문사 최승일님이고 개국직전 1월 5일에  공개모집으로 채용된
 아나운서가 마현경님으로 최승일님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업무요원으로 오랜기간 근무했던 신경석님도
개국전에 들어 오셨습니다.
 
 
 
6월에 착공된 방송국 건물이 준공된것은
그해 12월 5일이고,  12월 9일에는   미뤄졌던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방송 무선전화 시설허가도 내려져서 12월 11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법인등기를 마쳤습니다.  이때 총자산은
40만원이었고 11명의 이사 중에서  8명이 일본인, 3명이
조선인 이었습니다. 이사장은 식산은행 이사
森悟一가 선임되었습니다.
 
 
원래는 1926년을 넘기지 않고
경성방송국을 개국하려고 했지만 12월 25일
大正천황의 갑작스런 사망과 준비되지 않은 가지
 일로  다소 지연되었습니다.     어쨋던  2 월 2일부터는
실재 방송과 같이 날마다  방송을 실시해서 2월
16일을기해서 역사적인 경성방송국
개국을 보았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