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우리나라 최초 방송 1924년 12월 9일!

이장춘 2010. 3. 6. 07:46

 

 
 
 
 
우리나라 최초방송 1924년 12월 9일!
 
  
 
1924년 12월 9일 11시 30분 !
 
京城府 本町 一丁目 三越 吳服店 !
 
이곳 3층에 설치된 기이한 나팔형 전기
 
확성기에서 기계적인 소리로 전해진  인사말과 
 
더불어 양악, 국악, 피리소리 등이  흘러 나와
 
백화점 고객과 지나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선국 실험실에서 방송한
 
무선전화방송 !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이었습니다.  
 
 
 
최초의 시험방송을 청취하던 미스코시 (오복백화점으로
현재의 신세세 백화점 ) 건물과 거리 모습으로 그때는 이곳이
제일 번화가 였습니다. 1924년 거리 모습입니다.  이른바 하세가와
 (장곡천) 라고 해서 초대 통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습니다
 
  
노창성님과 시노하라님이
우리말과 일본말을 번갈아 가면서
실시한 이날의 시험방송을 할때는 정식으로
방송이라는 말은 없었고 방송 무선전화라고 했습니다.  
이때 실시한 시험방송 명칭이  “방송 무선전화 試送”
이었습니다.  그날 촬영한 기념사진에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12월 9일에 실시한 시험방송은 특정인들을
초청해서 실시했고 이어 12월 10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전, 오후 드차례의 시험방송이 있었습니다. 일본전보통신사
경성지국 주최로 "방송무선전화 시험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실시 되었습니다. 주최자인 일본 전보 통신사 경성지국장
吉川과 체신국장 原浦의 연설에 이어 연예 오락

방송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시험방송 광경 조선일보 1924년 12월 10일자  

 
시험방송은 일반청취자을 상대로  본격적인
공개 시험방송이라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 시험방송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그해 12월 17일 18일
19일 3일간에 걸친 조선일보사의 시험방송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1925년부터 시험방송은 계속 되었습니다.

시험방송이기는 했지만 방송을 하는것 처럼
했기 때문에 청취자들에게는 시험방송이  
방송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방송 준비를 하던 1924년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 방송 구상단계에서
최초로 참여한실무자는  구라마에 ( 藏前 ) 전문학교를
졸업한 체신국 관리 시노하라 쇼죠님으로  시노하라님은
같은 학교 구라마애 출신, 2년 후배인  노창성님이  한 팀이 되어
시험방송기계를 들여다가 시설을 하고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그때의 얘기를 시노하라님은 1981년에 발행된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서 다음과같이 
기록 해 놓으셨습니다.
 
 

매년 3월에 NHK방송 개시 기념일이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 바 방송 발상지인 시바우라

(芝浦) 방송소를 새파란 시노하라가 명을 받들어 견학하게

된 것이 조선의 방송 무선전화의 요람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었다.

광화문 전화국의 뒷뜰에 있었던 건물의 서고 같은 가옥을 체신국

방송 실험실로 개조하여 학교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 기술자인

시노하라는 구라마애( 藏前 )의 2년 후배인 노창성군과

한 팀이 되어 그야말로 암중모색하는 식으로

미지의 기술에 도전하게 되었다.

 

일본산의 50W 무선전화기의

설비공사와 기기조정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려 한반도 최초의 실험방송을 발사하게

된 것이 1924년 11월이었다고 기억되고 있다. 이리하여

일본국의 도오꾜오, 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방송국이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으로 조선에 설립

하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 시험방송은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체신국 ( 광화문국제 전화국, 한국통신공사를 거쳐 지금은
 방송 통신위원회가 들어 가 있습니다 ) 에서 발사했고 그때로서는
가장 번화했던 진고개의 미스코시 오복점 (동화 백화점을 거쳐서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에 수신 장치를 설치해서
800M 거리에서 방송전파가 어떻게 미치는가. 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방송을 송출하던 그날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의넓은 매장에서는 스피카가 딸린
외제 고급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불가사의한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날의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 공개 시험방송이 있었고 뒤이어

계속해서 50W송신기로 전파는 발사 되었습니다. 

 

 

 
11월 29일에  첫 시험방송이 있기는 했지만

담당 관리들이나 기자들을 상대로 한 시험방송으로  

이때의 비공개 시험은  일본으로부터 방송용 송수신기가

들어오면서  기계의 검정과 기타의 필요로, 광화문 구락부라고

하는 체신국 출입기자들을 초청해서 실시한 시험방송이었고 일반인의

참여는 없었습니다.  이날은 일본의 최초 방송국인 도쿄방송국이 문을

열던 날이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오후 4시, 原浦체신국장의 취지설명에

이어 유성기음악, 비파,성악, 하모니카 합창 등 일본음악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이 체신국내 방송실에서 송신을 하고 같은 건물 회의실에서

 수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날의 시험방송이 대외적

으로는 비공개였기 때문에 12월 9일의 시험방송을

최초의 시험방송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험용 무선전화는 일반인의 무선전화에
의한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계속해서 음반 방송
외에도 실연 방송을 했고 인천까지도 들려 방송을
들으려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정작 수신기를
갖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확성기가 달린 자석식 수신기는 당시로서는
사치품으로 상류사회에서 장식용으로 갖추어 두는
귀중품에 속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던 수신기는
귀에 대고 듣는 수화기식 광석 수신기뿐이었지만 이것도
극히 적어 정식으로 방송을 시작 할 때 까지도
천 여 대에 불과 했습니다 남은 얘기는
계속 쓰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일제강점기의 방송은 1924년의 시험방송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388

시험방송시절의 송신기는 체신국에서 제작한 5W로 부터 일본제 10W,

50W, 100W를 그리고 1Kw를 설치한다는 전제하에 미르코니 회사에서 무료로

제공한 400W 송신기가 시험방송에 활용되었습니다. 경성방송국이 방송을 정식으로

시작하던 1927년 2월 16일에는 1Kw 송신기를 방송국 지하실에 설치하고

방송국 경내에 45M 안테나 2기를 설치해서 방송을 송출했습니다.

 

 

 

반달 이정숙.mp3

 


 

 

 

반달 이정숙.mp3
1.5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