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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강완수님의 6.25전 북한 체험수기
강완수님은 1928년 5월 21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테어나 1 . 4후퇴로 월남한후 1961년 마산방송국 기자로 입사한 이래 춘천방송국, 강능방송국등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춘천방송부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하셨습니다. 저와는 1966년부터 2년여에 걸처 춘천에서 같이 근무한일이 있습니다.
KBS사우회, 방우회, 문공회에서 여러 활동을 하시다가 2007년 8월 22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유난히 키가 크셔서 KBS에서 제일 키 큰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자료를 발굴해서 당국자에게 전해주셨습니다.정선 아리랑에 관한 숨은 자료들을 모아 정선군청에 전해서 훌륭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음을 저에게 강조 해왔습니다. 방송사를 바로 쓰는데 늘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오늘 글은 해방된후 월남하기까지 방송인 강완수님이 실제로 북한에 살면서 체험한 체헙수기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2007년 9월호 KBS사우회 회보에서
해방 당시 나는 여수 수산학교 (4년제; 지금의 여수 수산대학) 3학년생이었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북청이지만 부친이 수산업을 경영하고 있어 멀리 여수까지 유학을 온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나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그만 그대로 주저 앉아 버렸다.
말하자면 중퇴를 한 것이다. 대신 청진에 있는 3년제인 청진수산전문학교 가공과에 2학년으로 편입, 1947년 졸업했다. 당시는 이미 북한 김일성 정권이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교 나와도 노동당원 아니라 취직 못해 주지하듯 북한 정권의 수립은 1948년 9월9일이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만 있을 뿐 시질적으로는 46년 2월 이미 정권이 세워진 거나 다름없다. 청진수산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는 요즘말로 고등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취직을 하려 해도 노동당원이 아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는 얘기도 남몰래 주고 받았지만 막상 결행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활동은 하지 않고 어울려 다니다 보니 자연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당원인 부친 친구분의 귀뜀으로 알 수 있었다. 지역노동당회의에서 우리를 지목,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구책으로 북청읍에 있는 조소문화협회 북청군지부 병설 러시아어 강습소에 수강신청을 냈으나 노동당이나 민청 등의 간부나 단체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행히 해방 전 친구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조소문화협회 북청군지부 선전부장이어서 그의 도움으로 수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3개월간의 과정을 1,2등으로 마치고 우리는 러시아어 교사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3개월간의 수강생활 중 잊혀지지 않는 것은 북청읍에서 가장 큰 교회를 댄스홀로 개조하는 데 동원되어 하루 두 시간 씩 양초로 마루바닥을 문지르고 닦은 것이다.
당시 교회는 모조리 공회당이나 댄스홀같은 곳으로 바뀌었는데 이에 항의 하다 끌려간 목사들은 이후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 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이 사상 평가 나는 함경남도 정평군에 있는 정평중학교에 배치되었다.
교직원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방과 후에 요일별로 있는 그놈의 각종 회의가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월요일은 직업동맹회의, 화요일은 독보회의, 수요일 교양발표회의, 목요일 자아비판회의, 금요일은 문맹퇴치사업 현지지도상황 평가회의, 그리고 토요일은 주간업무평가회의가 일주일 내내 계속 이어졌다.
회의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데 자정 무렵까지 갈 때도 많았다. 이 외에도 한 달에 한 번 교원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합동토론회라는 게 있었는데 주로 북한의 시책에 대한 찬양, 김일성 우상화, 그리고 신문에 보도되는 남한 소식에 대한 토론이었다.
남한 소식은 믿어지지 않는 미군의 만행, 경찰의 양민학살, 민중봉기 등이었다.학교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교양주임이었다. 서열은 교장과 교무주임 아래였으나 노동당원으로서 노동당 정평중학교 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 앞에서는 누구도, 심지어 교장도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그의 사상평가 여하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동료 교원들하고는 어느 누구도 마음놓고 심중을 내보일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이고 감시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동료교사가 있었으나 그는 오래 가지 않아 자아비판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9년부터 병력·탱크 등 남하 시작 교직생활에 들어선지 8개월 되던 1949년 10월 초였다. 초가을의 화창한 날씨에 나는 우연히 창밖을 내다 보았다. 우리 학교는 정펑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는데 무개열차가 정평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무개열차에는 포신을 길게 내민 육중한 탱크와 야포, 군용트럭 등이 시트에 덮여 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정평중학교로 배치되어 올 때 역시 무개열차가 탱크와 야포 등을 싣고 남쪽으로 달리던 게 생각났다. 반대로 북쪽을 향해 올라가는 무개화차는 빈 것이었다. 당시 여객열차에서는 창밖을 보지 못하도록 철도보안요원들이 일일이 차내를 돌아다니며 창문 커튼을 모두 내리도록 했으나 그런다고 볼 게 안보이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일은 1949년에 접어들면서 시작되었는데, 3, 4월께부터는 남으로 향하는 국도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대대 이상의 인민군 병력이 남으로 향해 이동하며 전투훈련을 하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 부대는 간혹 정평 시가지에서 요란한 포 소리를 신호로 시가전 훈련에 돌입하기도 해 주민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때로는 야간훈련도 있었다.
이들 부대 앞에는 언제나 소련군 장교가 탄 지프차와 장갑차가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오후 두 명의 낯선 사람이 학교에 찾아왔다. 이어 교장실에서 교장과 교무주임, 그리고 교양주임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회의가 두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다음날 오전 3학년 담임교사들이 교장실로 불려갔다가 한참만에 나왔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러더니 조금 있으니 담임교사들을 따라 18세 이상의 민청맹원 학생 20명이 불려들어갔다. 나와 교양주임의 인솔 하에 읍내로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학생들이 읍내 민청행사에 동원되어 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교양주임만 돌아오고 학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학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와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식을 부모 동의도 없이군대에 끌고 가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알게 되었지만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각 중고등학교는 할당된 인원을 차출해 인민군에 입대시켜야 했고, 할당된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교장은 물론 노동당 세포위원장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에 항의하는 학부모들에게는 사상성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김일성의 1950년 신년사는 선전포고였다. 1950년 새해를 맞아 행해진 김일성의 신년사는 각 신문에는 물론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를 적극 지지하는 내용의 글이나 해설도 물론 매일같이 방송과 지면을 탔다. 뿐만 아니라 벽보로 나붙고 소책자로 만들어져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각 직장과 단체들은 독보회와 교양발표회, 학습회, 토론회, 강습회 등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김일성의 신년사를 적극 지지하는 성명과 결의문 등으로 열성적 충성을 보이려 열을 올렸다.
당시 김일성의 신년사의 주요 골자는 이렇다. 『미제와 이승만 괴뢰도당의 반동으로 1949년에도 우리의 사명인 조국의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조국통일의 터전을 닦기 위해 북반부에 강력한 기지를 건설케 했다. 올해는 인민군대, 국경경비대와 보안대는 전투태세를 갖출 것이며 언제나 적을 무찌를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승리는 통일과 조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의 투쟁을 하는 전체 인민의 편에 있다. 1950년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전체 조선인민에게 영광이 있을 것이다. 통일조선 만세-.』
당시 메모해 두었던 것을 바탕으로 되살린 것이다. 이처럼 김일성은 1950년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의 필승의 해로 정하고 전체 인민의 결속을 강조했다. 이와함께 그해 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는 공동명의로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 결정서는 김일성의 신년사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역시 신문, 방송은 물론 벽보와 책자 등을 통해 북한 전역에서 대대적인 선전전을 펴며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김일성 수상의 1950년 신년사는 조국통일을 촉진하는 전체 인민의 소망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우리는 민족적인 조국통일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전인민의 결속을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49년 한해 동안 부대 대이동 1950년의 8·15 기념행사는 서울에서 실시하며 이에 앞서 8월5일 남반부 전체 인민들도 참여하는 민족회의를 구성하고 8월15일 8·15기념일을 기해 통일조국의 정부를 수립한다.
-민족반역자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10여명을 체포하여 처단한다.』1949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인민군 부대의 대이동과 탱크, 야포 등의 중무기 수송, 18세 이상의 학생 강제 입대에 이은 1950년의 김일성 신년사는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편 이무렵 북한 전역에서 소위 불순분자 색출을 위한 정풍사업이라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여기서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지주 출신 및 자본가 등 소위 부르조아 성분 가운데 북한 정권 시책에 동조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 갔다.
다행히 당시만 해도 북한의 행정망이 잘 정비된 게 아니어서 나는 내 출신 성분이나 한때 지목대상이었던 사실, 그리고 두 번이나 자아 비판대에 섰던 사실이 탄로되지 않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합동토론회는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다. 토론회는 주로 「조국통일을 위한 전체 인민의 결속과 남반부 괴뢰정권 타도를 위한 우리의 결의」에 관한 것이 주제가 되고 「남반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봉기」가 부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토론이 한창일 때 몇차례 기침을 하는데 붉은 핏덩이가 올라왔다. 다음날 교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함흥 인민병원으로 가 X레이 검사를 받아보니 한 쪽 폐에 달걀만한 흠이 있다는 진단이었다.
의사는 진단서를 떼주며 별 걱정 할 것 없다고 했지만 그때만 해도 폐병은 난치병이라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3개월의 병가를 내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 금방 건강이 호전되었다. 낮에는 주로 집에서 책을 보면서 간혹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인들을 만나 그간 궁금했던 일에 대헤 듣고 또 내가 겪은 일들을 털어 놓을 수 있어 한결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부모님의 외아들에 대한 극진한 정성이 있고 보니 건강이 크게 호전되는 것 같았다. 의기양양한 평양방송과 상반된 서울방송, 병가는 내게 남쪽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매일같이 아침 눈을 뜨자 마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와 같이 잠에서 깨어나 라디오를 켜자 전날 까지만 해도 북괴군이 38선 일대에서 국군 진지에 총격을 가해온다는 뉴스를 자주 들었던 것과는 달리 이날은 심각한 소식이었다.
『38선 전역에서 새벽 4시를 기해 「인민군」이 중화기를 동원, 일제히 공격을 감행, 남침해오고 있다』고 전하고 『국군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며 『휴가 중인 국군장병은 즉시 각 부대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보도내용은 상세하지 않았으나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평양방송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평양방송은 서울방송과는 반대로 『38선 전역에서 남조선 괴뢰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이미 38선을 넘어 4킬로까지 북침해 오므로 인민군은 불가피하게 이를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판단이 안돼 다시 서울방송으로 다이얼을 돌렸으나 그 후의 속보는 없었다. 7시 뉴스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양방송은 『용감한 인민군은 북침한 남조선 괴뢰군을 격퇴, 계속 진격중에 있다』고 요란하게 떠들었다.
평양방송은 아예 정규방송을 없애고 계속 인민군의 전투소식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날 저녁 나는 계속 서울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방송은 국군이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적과 교전하고 있으며, 인민군은 이미 38선에서 남으로 계속 밀고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비로소 모든 걸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1949년부터 있었던 인민군의 대이동과 기동훈련, 탱크와 야포 등의 중무기의 수송, 그리고 1950년 김일성의 신년사와 최고인민회의의 결정서는 결국 남침을 위한 치밀한 준비였다는 것을. 이날부터 나는 서울방송과 평양방송을 번갈아 들으며 전세가 어떻게 기우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세가 극히 불리하다는 것이었고, 평양은 시종일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서울방송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방송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도 서울은 사수할 것이며, 북괴군의 불법남침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지원을 긴급요청했으니 국민은 동요하는 일 없이 질서유지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울이 곧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을 평양방송을 듣고 알았다. 그후로는 서울방송을 들을 수 없었다. 미군이 참전했다는데도 계속 밀린다는 소식 평양방송은 남반부 인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서울을 해방시킨 인민군은 계속 남을 향해 용맹을 떨치면서 진격 중에 있다며 승리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이 불과 사흘만에 인민군에 함락된 사실에 많은 북한 주민들은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나는 도오쿄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도오쿄오 방송은 국군이 수원까지 밀렸을 때 유엔에서 긴급안보리회의를 소집, 유엔군의 한국 파병이 결정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전할 수도 없었다. 유엔군의 참전과 함께 도오쿄오에서 유엔군 사령부 방송이 전파를 탔다. 그런데 미군이 참전했음에도 계속 밀린다는 소식이었다. 한가닥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기대와는 먼 소식이 계속 날아들었다. 전라남북도 마저 북괴군에 넘어가고 유엔군은 낙동강을 주방어선으로 대구와 마산을 연결하는 전선에서 방어선을 구축, 북괴군을 저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양방송은 영웅적인 인민군이 8월15일까지 부산을 완전히 해방시켜 이 땅에서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도당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면서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유엔 공군의 공습이 수시로 행해졌다.
인민군의 진격도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음이 확실했다. 18세 이상 30세까지의 청년들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8월 초 따가운 햇볕 아래 해안선을 따라 전투진지를 구축하는 데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내무서원들과 인민위원회 관계자들이 이잡듯이 뒤져 젊은이들을 잡아 끌고 갔다.
다행히 기술자와 교원, 그리고 특수기관 근무자는 동원령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나는 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8월20일경 나는 며칠 동안 메모한 유엔군사령부 방송 내용을 가까운 형에게 알리기 위해 부친의 만류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다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곳은 읍 인민위원회였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붙잡혀 와 있었다. 우리는 이내 징병검사장이라는 읍내 어느 학교로 옮겨졌다. 가보니 잡혀온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말이 징병검사지 몇 마디 묻고는 무조건 끌어갔다. 나는 신분증을 제시하며 폐병으로 요양 중인 현직 교사라며 9월부터는 다시 복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게 먹힐 턱이 없었다.
아무리 항변을 해도 듣는 말이라는 게 『이 새끼 잔소리 그만해!』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면서 만일 도망가면 반역자로 처단할테니 그리 알고 밖에 나가 있으라는 거였다. “너 같은 반동은 필요없어”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학교는 온통 감시원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열차로 함흥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다시 고등학교 이상 학력 소지자들이 차출되는 데 끼어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군관학교 입교 대상자로 분류되어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의사에게 신분증을 제시 하며 폐병으로 요양중임을 호소하여 평양인민병원에서 X레이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으나 불합격자는 모두 내무성 간부학교로 입교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어느 학교인가로 이동했다. 내무성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를 일렬 횡대로 세운 다음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사람 손들라』고 했다.
나는 앞으로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손을 들었다. 나 혼자였다. 내무성 요원 한 사람이 눈을 부릅 뜨고 다가와 이름을 대라 한다. 이름을 대자 명단을 들고 있던 요원이 소리쳤다.
『너같은 반동은 필요없어. 이 자식아 저리 나가버려.』
나는 두 말 없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정문쪽으로 향했으나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교문 밖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거리 역시 내무서원들이 순찰하며 검문검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합격이라지만 귀향증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문 근처의 플라타너스 그늘 밑으로 가서 동태를 살피다가 몇 몇 대열이 교문을 빠져나갈 때 거기에 끼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몰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을 돌고 돌아 기껏 간 곳이 북한의 정부 청사 앞 광장이었다. 공장간부들은 문 닫아 걸고 폭격 전에 대피 나는 비장한 각오로 내무성 안내실로 들어섰다.
귀향증을 받아볼 요량이었다. 이번에도 천운이 따랐다. 그곳에서 중좌 계급의 북청 출신을 만난 것이다. 비록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되어 현직 교사인데 폐병환자로 군관학교와 내무성간부학교 입교에 모두 불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귀향증을 발급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구구한 설명 끝에 어렵사리 귀향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고, 밀려드는 허기를 때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아직 험난했다. 전시 중에, 그것도 수시로 공습이 이루어지는 상황 아래 평양에서 함흥으로 가 거기서 다시 삼백리나 되는 북청까지 간다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평양을 떠나 함흥에 도착한 건 사흘이나 지난 뒤였다. 거기서 청진행 열차를 타야 하는데 언제 올 지 알 수 없었다. 대합실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요란한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이어 흥남 쪽에서 고사포 소리가 들렸다. 고사포탄은 그러나 폭격기에 미치지 못하고 허공에서 터졌다. 폭격기에서 쏟아지는 폭탄 터지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흥남 공장지대는 가루가 될 것 같았다. 철길도 끊어졌다. 그 바람에 또 언제 철길이 복구되어 열차가 출발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열차가 출발한 것은 예정보다 열한 시간이 늦은 밤 열 시였다. 열차가 흥남 공장지대를 지날 때 보니 공장지대는 잿더미가 되어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공장 안에서 죽을 뻔 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어서 공습을 전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폭격이 있기 전날 흥남 일대는 유엔군에 의해 수많은 전단이 뿌려졌다고 한다. 전단에는 주요 공장과 철도, 군사시설 부근 주민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주민들은 전단을 줍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처벌한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공습이 있던 그날 공장에서는 평소와 같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공장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기계소음에 공습경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공습이 시작되고야 놀란 사람들은 아우성치며 대피하려 했으나 공장문이 밖에서 잠긴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때 공장 간부들은 이미 다 방공호로 피한 뒤였다. 살아남은 그 사람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극심한 통증이 와 동료들중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고 전했다.
유엔군 인천상륙에 한가닥 희망 그는 폐허가 된 공장을 빠져 나오면서 보니 무너진 건물과 파편 , 그리고 화염 속에서 숨진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했다. 공습 당시엔 살아남았어도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병원이 초만원인데다가 약품도 없어 계속 죽어갔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한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 노동자를 위한다는 노동당놈들이 어떻게 저희들만 살려고 대피하고 공장문은 왜 밖에서 잠궈놓은 거냐』며 분개해 했다. 그는 『이놈의 세상 망할테면 빨리 망해야지』 하며 혀를 찼지만 주위의 신음소리에 묻혀버렸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다시는 일체 외출은 삼간 채 그간 궁금했던 전황을 알아보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9월 중순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집결지에 폭격을 가해 인민군을 섬멸하다시피 했다는 유엔군사령부의 방송이 있었다.
처음으로 듣는 유엔군의 전과 소식이었다. 그리고 9월15일 오전 6시. 스위치를 켜자 라디오에서는 『15일 미명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속보는 없었다.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7시 뉴스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평양방송을 틀으니 인민군이 여전히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는 내용 뿐이었다.
9시 뉴스에서 비로소 『맥아더 사령관이 진두지휘한 유엔군이 오늘 아침 미명 인천 앞바다에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진격중』이라는 상세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부터 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차례로 주요 도시를 탈환한 뒤 계속 북진 중인 상황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반가운 소식을 주변에 알렸다. 암암리에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한가닥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 참에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 숨 좀 쉬며 살 수 있다면 하는 게 그들의 소박한 바램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평양 시찰 소식이 들어오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우리 고장도 국군의 입성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라디오를 들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인민군이 도주하면서 장진강 발전소를 폭파했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아무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전세가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 부쪽으로 향하는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 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국군도 들어오기 전에 흥분한 민중 되잡혀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가 보니 읍내에서 끌려온 남녀노소로 3개 교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신창여자중학교로 갔다가 인민군에 잡힐 때 까지의 사이에 읍내에서는 온 읍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부르며 노동당사와 읍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습격하고 일부 청년들은 사태를 알지 못하고 읍내로 들어온 인민군 패잔병을 검색해 무기를 빼앗기도 했다.
이에 신창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중대 중대장은 인민군 병사 5명을 데리고 군중을 해산시키러 갔으나 군중은 몽둥이와 소방용 쇠갈퀴 등을 휘두르며 대항했다. 이에 인민군 중대장은 병사들에게 사격자세를 취하라고 명령했는데 인민군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청년 한 명이 들고나온 수류탄을 인민군을 향해 던졌다고 한다.
슈류탄은 인민군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고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처음 혼비백산했던 군중은 인민군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더욱 기세를 올렸으나 한 시간 쯤 후 부대를 정비해 재출동한 인민군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 무장한 청년들이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역부족으로 도피하고 인민군들은 거리를 샅샅이 뒤지며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체포해 온 것이었다. 체포되어온 사람 중에는 부락 청년들과 함께 인민군 초소를 습격하려는 모의를 하다 잡힌 청년도 있었다.
또 공산주의를 비판해온 신창중학교 교사도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모두 불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우선 인민군 초소를 습격하려다 붙잡힌 청년이 끌려 나갔다. 잠시 후 운동장 쪽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렇게 끝나는가.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하고 억울했다. 유엔 공군의 폭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가까이서 들려 왔다.
진격이 늦는 국군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아, 그러나 천우신조란 그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갑자기 복도에서 다급한 듯한 군화소리가 나더니 『전원 연병장에 집합!』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우리는 모두 풀려났다.
10월 23일 드디어 도착한 국군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돌아온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만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락 청년들은 인민군을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노동당 간부들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아 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민학교 어린이를 시켜 노동당 간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엔군이 이곳에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노동당 간부들의 가족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붙잡아 간 사람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면 당신들의 가족도 무사히 돌려보내고, 만일 한 사람이라도 희생자가 생기면 당신들 가족이 그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니 갇혀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라.
또한 인민군 전 장병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귀순해 오면 책임지고 보호해서 무사히 부모형제, 처자와 만날 수 있게 고향으로 보내줄 것을 약속한다』는 요지였다.
첫 편지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최후의 통첩으로 두 번째 서신을 보내며 시한을 정하자 이에 응해왔다는 것이다. 인민군은 「포로교환」 후 이내 도주했다.
주민들은 읍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치안대와 자치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북청에서 20여리 떨어진 속후면에서 다급한 구조요청이 왔다. 내무서원들과 노동당원들이 반동분자로 지목해 오던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고 6명의 청년들을 체포해 갔는데 그날 저녁 도망가면서 이들을 죽일 것 같으니 구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자치회와 치안대는 이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구조대를 보내기로 했다. 이 작전의 지휘는 귀순해온 인민군 하사관이 맡도록 했다. 국군입성 직후 중공군 침입, 꿈 깨지다 해가 질 무렵 구조대가 내무서를 기습하자 적은 놀라 도주하기에 바빠 작전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속후면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나와 만세를 외치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후에도 완전히 도주한 것으로 믿었던 인민군 패잔병들과의 교전이 있었으나 이미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그리고 1950년 10월23일 드디어 국군이 우리 고장 북청군 신창읍에 입성했다.
인민군이 완전히 패퇴하고 국군이 입성하자 자치회는 피해실태를 조사했다. 희생자는 모두 20여명이었다. 수 명의 행방불명자도 있었다. 희생자들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혔던 사람들로 일부는 죽창과 총검에 무수히 찔려 우리 고장을 흐르는 소남대천가에 버려져 있었고, 일부는 산으로 끌려가 웅덩이를 판 뒤 따발총으로 난사당했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 고장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함흥에서 형무소에 갇혀 있던 수백명의 수감자들을 살해한 뒤 우물이나 방공호에 묻은 사건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국군의 입성으로 우리는 자치회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드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면서 그 모든 꿈을 접은 채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다.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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