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의 세계 최초 해상 이동방송국
한국전쟁은 방송사상 그 유례가 없는
해상 이동방송을 탄생시켰다. 피난을 위해
해군함정에 싫은 방송기기를 활용, 방송을 실시하자
이것이 바로 바다위를 떠 다니는 해상 이동방송이고
서. 남해안은 물론 인천상륙 작전에까지 참여해서
큰 공을 세웠다. 해상 이동방송은 1. 4후퇴로
육지의 방송이 어려워 지면서 장기간 실시하게 되었다.
북한군이 물밀듯이 밀려와
전선이 우리나라 서남해의 끝 목포까지
이르자 목포방송국은 막다른 상황이 되었다.
급하게 된 목포방송국 한영희는 평소에 방송국과
인연이 있던 해군의 협조를 얻어 어렵기는 했지만
해군 514호 소해정에 50W송신기를 포함한
주요 방송기기를 실을 수 있었다.
방송기기를 배에 실코보니
기기를 놀리는 것 보다는 배에서도 방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6.25기간중 해안과 섬지역에서 소식에 목말라 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함상의 군인들과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용기를
불러 넣어준 해상 이동방송이었다.
8월 7일 목포를 출발해서
제주도로 가려고 했지만 아군의 오인으로
배가 총격을 받아 부산으로 가서 수리하는동안
정극모해군 사령관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다짐받고,
1950년 8월 10일 부산을 떠나 진해, 제주, 대흑산도,
어청도, 덕적도 등지를 돌면서 <미국의소리방송>
<유엔군총사령부방송>의뉴스와 뉴스해설 등을
중계하면서 적진깊숙이까지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1차방송을 9월8일에 마치고 9월 12일부터는 인천상륙작전 현장에 가서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 등 3차까지
63일간의 이동방송을 실시했다.
이 해상 이동방송이 때로는
그 지역 로칼 방송이나 노래자랑 등을
실시해서 방송이 지역주민과 밀착하는 효과도
가져 왔고또 이때까지 방송이 무었인지도
모르던 분들에게방송의 진수를
보여 주기도 했다.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다가
대구방송 시절부터 중앙방송에 합류해서
아나운서로는 유일하게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한
전성병은 해상 이동방송선을 타고 인천에 상륙해서
방송 선발대로 서울에 들어 갔다고 했다.
1. 4후퇴로 방송사정이 어려워진
중앙방송국은 해운공사 소속의 목선 400톤급
경인호를 마련해서 Bc-610 300W송신기를 싫고
안테나와 아스장치를 했다. 1차로 2월 하순부터 충무,
여수, 임자도, 서해안의 군산, 덕적도, 인천 등지를 돌면서
부산에서 송출하는 단파방송을 중계하고 때때로
노래자랑이나 뉴스 등의 자체방송도
했고 가두방송도 했다.
또 돌아오는 길에는 대모도,
우리 나라 최남단의 어업전진기지
나로도등을 들려 주민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이때 참여한 방송대의 구성원으로는 김석모,김원용,
김선영, 김호석,강익수, 이영기,최요안, 홍일범, 김창학,
유해룡, 함무영,최병호, 이경재등이었다.
1차방송이 3월말에 끝나고 7월
초부터 2차 이동방송대가 다시 출항했다.
이때는 거제도, 장승포를 비롯해서 육지로 목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산을 들려 8월 초에 돌아왔다. 이때 참여한 방송인으로는 대장에 신경식을 비롯해서
김석모, 김원용, 윤헌영, 김성열(그때 김성열 함자
가진분이 두분이었음), 공승규, 양현문 등이었다.
해상이동방송에 직접 참여하셨던
원로방송인 유해룡님의 얘기를 옮깁니다.
유해룡님은 94세로 방우회 회원입니다.
Bc-610송신기 출력이면 전파방해가
없던 시절이라청취 가능 지역이 넓었습니다.
특히 라디오 보급이 안 되었던 시절에 확성기를 통해
실시한 방송효과는 컸습니다. 방송선이 육지 가까운곳으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손을 흔들며 환호했고 공개방송을
할 때면 그 부근 사람들이 모두 나와 참여하면서
흥겨워했습니다. 대부분 방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방송을 실시하는 동안 바람이
심해 배가 흔들리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배 멀미로 시달리기도 했으며 음식, 잠자리등이
맞지않아 고생도 많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방송전파를 보내며 방송 사명을
다 하던 때였습니다.
모두 함께하는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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