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 유공방송인 김성배님
6.25전쟁의 생사 갈림길에서 방송을 지킨 김 성배님( 金 成培)님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멀리 가까이서 들려오는 포성과 하늘을 나는 북한군의 수많은 예광탄을 바라보며 폭우 속에 칠흑같이 어둡던 한강을 건너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강교 폭파의 폭음소리를 직접 들으며 아슬 아슬한 순간을 넘겼습니다.
피난길 따라 밀리고 밀려 임시수도 대전방송국과 대구방송국 등을 거쳐 부산방송국에서 임시 중앙방송을 내 보내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 방송과 함께 하며 6.25전후 복구와 60년대 70년대의 방송시설 확장 등 이 나라 방송기술의 중심에 늘 김 성배님이 있어왔습니다.
중국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던 젊은 김 성배님이 방송국에 들어오던 때는 방송은 군정청에 속해 있었고 방송기술과 청취료를 받는 업무는 조선방송협회에 속해 있는등 이상한 방송국 운영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였지만 1948년 우리정부가 들어서면서 방송국은 방송과 기술 등의 업무가 통합되고 국영방송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새 나라의 군이나 경찰이 새로 창설되면서 그 전에 근무하던 방송기술인들은 군창설요원이 되거나 경찰관이 되어 자리를 옮겨갔기 때문에 김 성배님은 신입사원이었지만 늘 중요한 일을 담당,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6월 27일 저녁 야간 근무를 하게 된 님은 심야 그날의 방송이 끝난 후 더 가까워진 총, 포성을 들으며 트럭에 방송을 내 보내는데 필요한 비상기계를 싫고 방송국을 떠났습니다.
부산까지 밀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영등포등 서울인근의 적당한 피난처에서 아침 방송을 한다는 생각으로 떠났지만 그 순간부터 상황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방송기기를 싫은 트럭은 절대로 한강을 건널 수 없어 어쩔 수없이 방송인들은 차에서 내려 도보로 한강을 건너는데 한강다리위에 “ㄷ”자 모양으로 늘어놓은 문제의 상자는 잠시 후에 천지를 진동하는 퍽음과 함께 폭피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한강다리 폭파였습니다. 그 폭파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나 9명의 방송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관악산을 넘어 안양을 거쳐 수원에서 피난열차를 타고 대전에 다다른 것은 6월 30일이었습니다.
잠시 대전에 머무르던 김성배님은 다른 분에 앞서 7월초 대구방송국에 가서 대전방송국에서 밀릴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 했습니다. 그리고 금강 전선이 위태로워지면서 7월 15일부터는 대구방송국에서 방송을 했고 또 8월 중순부터는 부산에서 중앙방송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젊은 김성배님은 어려운 일들을 해 냈습니다. 9.28로 서울에 온 방송국이 1.4후퇴로 부산으로 내려가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에서 방송을 하기위한 선발대가 왔을 때 그 선발대 속에 김성배님이 있었습니다.
방송선발대는 가두방송을 실시하면서 조선방송협회 사무실에 300W간이 송신기를 설치하고 1951년 8월 22일부터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선발대중 젊고 혈기 왕성하던 기사 김성배님은 정상적인 방송실시를 위해서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후 방송시설이 복구되고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중앙방송국 기술과에서 선임엔지니어로 힘을 기울이던 중 1960년,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기술요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올림픽에 기술자가 파견된 것은 1956년 멜본 대회에 이어서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그때 같이 간 임택근, 이광재 아나운서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기술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의 성격상 늘 그래 왔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전파를 인공위성이나 마이크로 웨브 등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중계망 구성도 어려웠으려니와 16곳의 경기를 모두 중계 방송하는데 한사람이 감당하도록 되어 있어서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회선 구성은 한국에서 국제전신국을 통해 일본 KDD(일본국제전신전화국)에 접속 KDD가 독일의 전화국을 그리고 ITALY 로마를 연결 했습니다 특히 한일간에는 SSB(Single Side Band = 단측파대역)라는 System을 사용 음색이 아주 나뻤습니다.(당시 KBS남산 주조정실에서 현업으 담당하셨던 방우회 정항구 이사님 말씀)
그때 국제회선 상태가 좋질 않아서 음성이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거나 어떤 때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기도 하고 축구, 농구 등등 16군대나 관리하자면 지금처럼 여건이 좋은 것도 아니고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1962년 중앙방송국 기술과 계장이 되면서 중앙방송국의 녹음과 중계방송의 책임을 맡아 방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힘을 기울이다가 1967년 공보처 시살과 시설담당관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전국의 방송기술 정책이나 시설은 공보처 시설과에서 하던 때였고 또 60년대 중 후반부터 TV방송의 전국망확장과 라디오 난청해소, 국제방송망의 확충, 북한방송의 침투방지 등의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500Kw의 소래송신소 건설과 남산방송국의 이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때라 방송기술, 시설의 중대전환점에 있을 때였습니다. 1971년, 소래송신소가 성공적으로 이전되고 여의도 종합방송센터의 터를 마련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님은 1973년 한국방송공사가 발족되면서 시설부장을 거쳐 시설국장을 하면서 공보처시절에 못 다한 일들을 했습니다. 공보처시절에 마련한 여의도 터에 여의도 종합센터가 완공되어 KBS가 옮겨왔고 국내외를 대상으로 하는 대 출력의 김제송신소에서 전파를 내보냈으며 전국방방곡곡에 방송시설이 갖추어져 라디오, TV공히 난청, 난시청이 대부분 해소되었습니다.
당진에 국책사업으로 세워진 1,500Kw의 세계적인 대 출력 당진송신소가 준공되던 날 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장을 받은 마지막 인사가 되었고 공식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마지막 악수를 나눈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0년 소용돌이 속애서 소래송신소장을 거쳐 방송사에서 떠나셨습니다. 1987년 사단 법인 KBS 사우회 창립부회장을 거쳐 지금은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부회장으로 계십니다. 적극적인 추진력과 쉴 줄 모르는 성품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일생을 바쁘게 살아오신 님은 그러면서도 그런 일들은 알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성품이어서 그분의 지난날 일을 아시는 분들은 많지를 않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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