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경성방송국과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님

이장춘 2009. 11. 5. 00:29

 

 

 경성방송국과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님    
 
 
 홍난파님은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 무렵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신분이고 1927년 2월 16일 방송국 개국 날에는
님이 주동적으로  구성한 중앙악우회가  개국 기념공연을
 했으며 1936년 경성방송국 전속관현악단을 발족시켜 그 단장이
 되셨습니다. 1941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방송국과 인연을
갖고 관현악, 가곡, 동요 등  수많은  현대음악을  방송에
실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님은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10년 화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15세 되던 해에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해서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다시 기악과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1918년 일본에
유학을 떠났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했습니다. 도쿄[東京] 유학시절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를 발간했고 귀국 후
매일신문사기자생활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에 실었고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해서 지은 노래가 그 유명한 봉선화(봉숭아)

 입니다.

이무렵부터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했고 음악보급에 힘썼습니다.

 
1924년 11월 17일 조선일보사가
방송국을 새우려고시험방송을 할 때 여기서
바이어린 연주를 한 것이 방송과  첫 인연을 맺게

 것이고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경성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중앙 악우회를

창설, 경성방송국개국 기념 연주를 했습니다.

 

 
님이 일본에 가 있는 기간에도
 중앙 악우회는 뒤에 중앙방송국 편성

과장이 된 박경호님을 주축으로 방송국과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1929년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연악회를 부활시키고 째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 활동을 했습니다.

째즈밴드 연주 모습입니다. 

 

 

트럼본 박건원, 오른쪽 스저폰 백병곤이라고 했습니다.

 
이 무렵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냈고
또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하권을 냈습니다. 고향의 봄 등 수많은

곡들이 방송을 통해서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

까지도 불리는 노래들입니다.

 

 

  경성 관현악단의  연주 모습입니다.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책임자로
취임해서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했습니다. 님이 늑막염으로 1941년
8월 세상을 떠나신 뒤에도 이 관현악단은 김생려,
박경호님등에 의해서 운영되었습니다.
 
홍난파님과 안익태님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였습니다. 안익태님은

 애국가로 코리아 환상곡으로 모두가 다 아시는분이고

홍난파님은 봉선화(봉숭아)를 비롯해서 수많은 가곡과 동요를

만들어 내신 분입니다.  두 분 다 방송과 더불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신 분이고, 홍난파님은 경성 방송국의

양악책임을 맡아 방송국 관현악단을 최초로 

창설한 분이기도 합니다.

 

 

  1931년 홍난파님이 미국으로 건너 가실때 언론인

홍종인님이 쓰신 글입니다.(조선일보 1931년 6월 20일)

 

 

 

한국방송협회 발행 1997년판

한국방송  70년사에 있는 글을 인용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난파 홍영후는

JODK 오케스트라 지휘와 단원통솔에 분주한

중에도 사무실에 앉았을 때면 가늘게 웃음을 치고 자디잔

이를 내 보이고 손짓을 해가며 농을 주고 받으며 판을 벌여 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1897년? (1898) 수원근교의 남양에서 출생한 난파는

1941년 타계히기 까지 우리나라 음악사상 찬연히 빛나는 공적을

쌓았다. 본명은 영후 조선 정악 전습소 양악부를 나온후 여기서

교사로 있다가 동경 우에노 정음학교에서 2년간 수업하고

동경 고등 국립 음악학원을 졸업 동경 교향악단

제1바이얼린 주자로 활약했다.

 

귀국하여 독주회를 갖는 한편

"음악계"를 발간하고 연구회를 창설 하는 등

음악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 작가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하다가 1931년 도미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를 졸업,

귀국후에는 이화여전과 경성 보육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한편

홍성유, 이영세와 "난파 트리오" 를 조직하기도 했다. JODK

 양악 책임자로 있으면서 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재1회로 연주한 모찌르트의 주피터는 우리

나라 교향악 연주의 효시였다.

 

 

영문자를 클릭하셔서 관련 글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홍난파 현대음악의 선구자 불후의 명곡 노래 고향의 봄 봉선화 봉숭아

http://blog.daum.net/jc21th/17781834

 

경성방송국 양악을 이끌었던 사람들/ 홍난파, 박경호, 김생려

http://blog.daum.net/jc21th/17780883

 

천재 성악가 김천애님의 봉선화 / 홍난파작곡

http://blog.daum.net/jc21th/17780723

 

홍난파작곡 민족의 노래, 봉선화인가 봉숭아인가?

http://blog.daum.net/jc21th/17780939

 

이원수선생님과 고향의 봄 작곡 홍난파  

 http://blog.daum.net/jc21th/17781663

작곡가 김성태님과 방송, 최초의 방송 합창단 지휘자, 이별의 노래/김명희
 http://blog.daum.net/jc21th/17781801

 

 

 

  약력(1898년 ~ 1941년)

 

 

1898년 - 경기도 화성 남양 (남양홍씨) 태생.

1912년 - YMCA 졸업

1915년 -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 마치고 동 전습소 교사

1916년 -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야구 응원가 창가(唱歌 - 행진곡풍) 야구전 작곡

1918년 - 일본 도쿄 음악학교 2년간 수학 후 귀국

1920년 -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 작곡

1924년 - 12월 조선일보 시험방송 연주

1925년 -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 (최초의 바이얼린 독주회)

1925년 - 잡지 "음악계" 발간, 소설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발표

1926년 - 경성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중앙 악우회를 창설 (박경호, 붓스부인)

             홍영후(난파), 김영환, 김형준 등 15명으로 구성

1926년 -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 편입

1927년 - 2월  중앙악우회 경성방송국개국 기념 연주(박경호) 

1927년 - 도쿄 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연주자

1928년 - 홍난파, 박경호 등 18명의 최초의 오케스트라 구성 방송출연 (단원 최초 보수지급)

1929년 -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 발간  

1929년 - 1929년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연악회 부활

             째즈 밴드(Korean Jazz Band) 구성 방송활동

1931년 -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1931년 - 도미 셔우드음악학교 연구

1933년 - 귀국, 이화여전 강사, 경성보육(京城保育)학교 교수 전임

1933년 - 난파트라오 구성 (바이얼린)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발간

1935년 -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대중가요를 예명 나소운(羅素雲)으로 발표

1936년 -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조직 방송활동

1940년 - 모찌르트의 주피터 교향곡 연주 ( 최초의 교향악 연주)

1941년 - 8월 늑막염 타계

 

 

 

 

방우회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홍난파님 관련사진, 옛 신문기사 모음
 
 

홍난파님의 흉상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봉선화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100곡을 남기신 난파 홍영우
(1898년 4월 10일 -  1941년 8월 30일 ) 선생은 우리나라  맨 처음
바이얼 니스트로 1936년에는 경성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지휘하신
 방송음악의 선구자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새겨 여기 새우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흉상은 1968년 70회 생일을 맞아
난파 기념사업회가  남산에 있던 KBS정원에
세운 것을 KBS 여의도사옥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님의 생가에 마련된 난파기념관에서 볼 수있

습니다. 글은 윤석중님이 쓰셨습니다.

 

 

  1924년 11월 14일 홍난파, 윤심덕님등이

출연한 자선음악회 공연 광경입니다.
 
 

 

1929년 9월 28일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홍난파, 안기영님등이 출연한 추계 음악회 모습입니다
 
 

 

1930년 7월 29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홍난파님의
음악의 기초지식이라는 글  8편중 제 1회분입니다.
 
 

 

경성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모습이고
중앙의 서있는분은 가수입니다.
  
 

 

홍난파선생님이 1935년부터 세상을 뜨실 때가지
말년을 보낸 곳으로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민간인 소유이던 것을 종로구에서 2004년 사들였습니다.
세모 지붕을 얹은 붉은 양옥건물인 이 집은 304㎡(92평)의 
땅에 지상·지하 각 1층121㎡(36.7평)씩을  갖춘  아담한
규모입니다.1층은 50명  안팎의  관객을 들일 수 있는
아담한공연장으로 꾸며졌고 뜰에는 KBS가 남산에
있을때 세운 홍난파 흉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실과 안방이 있던 자리는
홍난파님 사진과 연보 등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만들어졌습니다.  지하는 홍난파의

삶과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는 책과 영상자료들을

 갖춘 시청각실로 단장됐습니다.

 

 

위쪽의 오른쪽이 홍난파님이고 오른쪽은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을 마친 바이얼린 트리오 홍난파님(오른쪽)과 홍성유 (왼쪽)
이영세(가운데) 님이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밑 왼쪽은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시험방송에서 홍난파님의 연주하는 모습이고
오른쪽사진은 1935년 사진으로 홍난파님(가운데)과 황성옛터를
 작곡한 전수린(오른쪽)님이 같이한 사진입니다. 

 

 

바이올린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