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님 ( 2 )

이장춘 2009. 10. 30. 03:53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님 ( 2 )  
 
 

1945년 나라를 되찾아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일본은 물러갔고 방송도 새로운 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화를 지키면서  방송을

이어 오셨지만 이제 방송국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떠나려 해도 떠날 수없어 되찾은 나라의

 첫 방송국장이 되었습니다. 

 

 

 

 

되 찾은 나라에 막상 주인이 없어?

아니 너무도 주인행세를 하는 주체가 많아?

방송국을   서로  자기것이라고 하면서  다투던

와중에서  방송국을  옳바른  새나라의  방송국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대로 지켜야했기에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1945년

 9월 15일 일본인이 운영하던 방송을 인수할 인수대표를

우리손으로 선임하면서 중앙방송국장으로 선임되고

미 군정청에 의해서 10월 중앙방송국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방송의 터전을 닦기위해

노력을 기울이시다가 1947년 8월 방송국을

떠나 곧바로 서울대학교에 가셔서 음악대학을

 창설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학장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혜구님이 없는 방송국은 어려움이 있어   다시 방송국장을 

 맡아주도록 요청해서  1949년 8월  방송국장이 되셨지만

이것도 잠시고 3개월후 방송국을 영원히

떠나  학문에 정진하셨습니다.  

 

이로부터 방송국시절부터 힘을

기울여 오신  전통음악 국악을 체계화 하는데  

일생을 보내신분이고 우리나라 국악이론의

창시자로 불리워집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방송사를 정립하는데

직, 간접으로 큰 힙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체험담은

뒷날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시 시대의 방송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또 주요 글은 1970년에 발행된  만당 문채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도 어렵게 구한 이 책이 있어

필요 할때는 자주  보게 됩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선생님곁에서

선생님을 지켜보신 세분의 글과 방송영상

산업진흥원사이버 명예의 전당 선생님 공적서를 요약,

인용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윤태림선생님의 이혜구 교수를 말한다 중에서

 
 
윤태림 선생님은 이혜구 선생님과 같이
방송국에 들어 오셨다가1년 후 학교로 가셔서 
심리학자로 녈리 알려지신 분입니다.
 
이혜구 조부되는 분은 이조말에 영의정인가
이조판서인가를 지낸 그야말로 양반중에서도 양반집이고
그것을 자랑하는 일도 없었지만 형제들이 다 일가를 이루고
백형은 의사로서 일직이 돌아가셨으나 그분의 처남은 우리나라
동요 작곡가로 이름있고 "푸른하늘 은하수"를 지은 윤극영이요.
중형은 경향신문 주필이요언론계의 원로인 이관구, 삼형은 현재
남전의중역이요 일본 동대 경제학부 출신인 민구요 각각
다른 분야에서 없지못할 존재가 되어있다.
 
그는 지금도 떳떳한 자기 집 한채없이
친척집에 기거 하면서 그렇게도 아끼던 바이얼린을
6 . 25동란에 없애고 다시 장만을 못하고 있으면서도
동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을 부러워
하는 일이 없었다.
 
 
  문제안선생님 말씀중에서
 
 
문제안선생님은 1943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해방된후 우리나라
방송기자 1호가 되신분입니다.
 
이혜구 과장님은 우리가 방송국에 들어오던 때 
 아나운서  전원을  스튜디오에  소집해  놓고  "우리는
 조선말을 지키는 마지막 버팀돌이다. 즉 최후의 바리케이트란
 말이다." 고 지시 했는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 주었다.
 
이러한 훈시를 들은 후 이덕근, 윤길구, 홍준,
장운표, 문제안등  아나운서 일동은 이혜구 과장님의
의미심장한 훈시의 뜻을 두고 두고 음미하면서 우리말 가꾸기에
 최후의  바리케이트 노릇을  충실히 하여  마지막  버팀돌 노릇을
 충실히 하였다.즉 "말이 망하면 겨래가 망한다" 라는 뜻을 지닌
훈시는 8.15해방이 될 때까지 아나운서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정팔 선생님의 한국방송과  50년에서

 

 

노정팔선생님은 1945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KBS이사회 이사장을 하시는등

일생을 방송과 함께 하신분입니다.

 

만당 이혜구를 국악발전의 공로보다

더 높이 우러러 보는 것은 해방직후 초대 방송국장으로

있으면서 좌익정당 단체들의 방송국 접수소동을 슬기롭게

막아내고 극한대립 속에서 방송국을 굳건히  지키면서

 방송의 기틀을 바로 새웠다는 것이다.

미군이 진주한 후에는 미군고문들과의

 관계정립이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치에 맞고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여 무난히 넘겼다. .....중략 ....

해방직후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었다. 월급이외에는

 한 푼도 생기는 것이 없었으나 결국 검소하고 검약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에 승용차가 있었는데도 방송출연자용 으로

돌리고  자신은 먼 신당동 사택에서 전차나 도보로
 출되근을 했다. 점심은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했다. ....생략...
 
 
사이버 명예의 전당 이혜구님 공적서에서

생존 방송인 중 가장 존경 받는
최고 원로로서 1933년 4월 이중방송시작과 함께
 음악, 연예분야의  편성을 담당,    한민족의 얼이 깃든
국악 프로그램의개발과 연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방송국 생활 10여 년 만인 1943년,한국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은  “양금신보 4조” 를
펴냈다.  또한 8·15 해방 직후무정부 상태의 혼란기에
 중앙방송국 국장직을 맡으며좌우익 세력의
방송국 장악 의도를 막아냈다.
 
이를 두고 윤길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당시는 접수(接收)란 말이
유행이어서 힘으로 빼앗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인민공화국군이란 단체가 방송국을 접수하겠다고
대들었는데, 방송국 책임자 이혜구씨는
단연코일축했으며 이것은 전직원의
 의사라고 외쳤다."

직접적인 방송계 활동은
15년여의 지나지 않지만,그가 보여준
방송인으로서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방송의
든든한 기초가 되고 있다.
 

  선생님 상 훈  사 항

▶ 3.1문화상 학술상/1960
▶ 예술원상/1973
▶ 노산문학상(국악연구부문)/1976
▶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1991
▶ 방일영국악상/1995
▶ '방송인 사이버 명예의 전당'에 수록
2001.5 / 한국방송진흥원
▶ 금관문화훈장(국악문화 보급 발전에 기여한 공로)
2004.10. 문화관광부

 
  저    서 
 
▶ 한국음악연구/국민음악연구회/1957
▶ 한국악기도록/문교부/1962
▶ 한국음악서설/서울대출판부/1967
▶ 만당문채록/한국음악학회/1970
▶ 세종 장헌대왕실록22(악보해설)/1973
▶ 한국음악논총/수문당/1976
▶ 국역악학궤범/민족문화추진회/1979
▶ ESSAYS on KOREAN TRADITIONAL
MUSIC.TRANSLATED BY ROBERT C.
▶ PROVINE/ROYAL ASIATIC SOCIETY/1981
▶ 만당속문채록/1985
▶ 한국음악논집/세광음악출판사/1985
▶ 정간보의 정간대간 및 장단
▶ 삼죽금보의 역보 및 주석(역)/1988
▶ 한국음악논고/서울대출판부/1995
▶ 신역악학궤범/국립국악보/2000

이혜구 선생님은 1909년 서울에서
테어나 일제 강점기 1932년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 어려운 속애서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방송국이 하나밖에 없던 해방된 나라에서 
초대  KBS중앙방송국장을 지내며 새나라   방송의 기틀을  다졌고   
1949년에도  그 자리에  돌아왔지만  끝내  학계로 가셔서  음악 
특히 국악을 체계화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긴 세월 니나라 방송과 국악계에
빛난 업적을 남기신 이혜구 선생님은 2010년
1월 30일 끝네 세상을 뜨시고  2월 3일 국악인장으로
장례가 치러 젔습니다.  국립국악원 불로그,
 장례직장의 동영상 한편을 옮깁니다.  

 

 

 
 

선생님의 발자취는

일제 강점기 제 2방송 우리말 방송을

하던때부터 1948년 정부수립 후까지의

이 나라 방송의 역사 바로 그것이고 우리나라

국악을 현대화 시킨 주인공입니다.

 

 

 

 

선생님님의 명복을 빕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1977년 8월 18일 이혜구선생님 모습입니다. (오른쪽 분)
 우리말방송 최초공개모집 아나운서김문경님 (왼쪽) ,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라디오상회를 하면서 라디오를 공급한 이계선님(가운데분)이
 힘께 히신 사진입니다.(유병은선생님 청원박물관 제1회 전시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