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경성방송국 최초의 남자 아나운서 김영팔

이장춘 2009. 10. 28. 03:35

 

  

 

 

 경성방송국 최초의 남자 아나운서 김영팔 

 
김영팔님은
1927년에 방송국에 들어온
경성방송국  최초의 남자아나운서로  뉴스와
연예방송 프로그램에 능통했고 1927년  개국 후 얼마
 안되어 서울운동장에서 있은 야구실황을 중계방송한 일이
 있어 이것이 우리 아나운서가 최초로 실시한
 중계방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이나 방송극에도 관심이 많아서
1929 조선아동극 방송연구회를  조직했으며
 1931경성방송극협회 고문을  맡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공산당 단체로 민족주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에서  제명을  받았습니다.  

 

 

 
1935년 신경방송국으로 간 김영팔님은
 해방후 평소 신봉하던  공산주의를  택해서
북에 남게되고 결국 6.25전쟁시기에 사망 했습니다.
신경은 지금 만주의 長春으로 만주로 간 우리 동포들이
이곳   언론계에서  근무하셨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1947년  이혜구님의 뒤를이어 중앙방송국장이 되신
 “홍양명”님도 신경에서 신문사  편집국장을 하셨고
해방정국에서 KBS기자활동을 하신조동훈님도
신경방송국에 있다가 오셨습니다.
 

 

 
  문학가로 많은 활동을 한
 김영팔님은로 남긴 작품이 많습니다.
 
희곡  :「미쳐가는 처녀」「싸움」,
 
소설 :「해고사령장」「불쌍한 사람들」「검은 손」
 
수필 :「직공생활 10년의 감상 일부분」
「통쾌할는지도 모르는 이야기」
「신출잡필」,
 
평론집 :「동지중서씨를 영하야」
 
「문단 대풍년」등이 님이 남긴작품입니다. ]
 
 
 최근 중앙대학교   박명진 교수가
김영팔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발간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소개하는 글 일부를
여기에 옮깁니다.

1920년대 한국 대중문학계의 마당발이며,
초기 근대극을 관통해 온 김영팔의 작품세계!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14편의 희곡과
13편의 소설, 그리고 각각 1편씩의 방송극과 시나리오 등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적잖은 수의 수필과 평론을 남겨
해당시기 가장 왕성한 작가 활동을 했었던
 이가 김영팔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가 세운 경성방송국
활동을 계기로 20년대에서 30년대 중반까지 한국 문학의
 주류였던 KAPF에서 축출된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하게 된 탓에
그에 대한 후대의 연구와 평가는 그의 왕성했던 활동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활동시기 중 가장 왕성한
 활동시기였던 1920년대에 만들어낸 희곡 작품들은 그 시기
근대극 계통에서 가장 큰 기둥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KAPF에서
 활동했던 작가답게 반봉건·반계급주의를  목표로 한 투쟁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그리고, 동시에 1920년대 당시 KAPF의 주류가
가지고 있었던 이데올로기 및 체제상의 경직성에 대한
 그의 고발도 엿볼 수 있다.

 



김영팔님은 경성방송국 최초의
남자 아나운서이고 방송극을 쓰면서 연출을
한 방송인이다. 이름있던 문학가이고 사회운동가였다.
사상적  갈등속에서 끝내 맑스주의자가 되고 월북해서 
6.25때 세상을 떴다. 그래서 그의 문학작품과 명예는
 뭍혀버렸다. 남북왕래가 이루워지먼서 그의 이름이
 다시 살아나 그의 행적과 문학에 심있는 분들이
많아졌다. 김영팔님은 최승일님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이지만 최승일님편에서 얘기

했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겠습니다.

 

 

빙우회 춘하추동방송
 
 
 

 

 

 

  

 

왕수복 고도의 정한-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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