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경성방송국 PD1호 최승일님과 막내동생 최승희님

이장춘 2009. 10. 25. 10:26
 

 

 

 

경성방송국 PD1호 최승일님과 막내동생 최승희님

 

 

최승일님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님의
5남매중 큰 오빠이며 우리나라에서 정식 방송을
시작하기전 시험방송때부터 방송에 참여하셔서 우리방송사상
 PD 1호 이셨습니다. 1920년대 부터 이름있던 김영팔님은
 저로서는 전설 속에 얘기로 들렸습니다.이 분들이
방송초기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발휘
하셨던 선배 방송인들이었습니다.

불행이도 이 분들은 좌익 인사 였습니다.
해방 전에야 좌, 우를 가리지 않고 이 나라 독립을
위해서 힘을 합했지만 해방 후에는 달랐습니다.  이 분들을
얘기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이 두 분 얘기를
쓸 수 있는 데 까지 보겠습니다.


 

 

 

 
 
최승일님은 서울에서 1901년에
테어나셨습니다.    아호는 추곡(秋谷).  배재고보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미학과를
나오셨습니다.  일본 유학 때 후에 최승희님의 남편이 된 
안막(安幕)과 함께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하고
 한편으로 연극활동에 열중했습니다.
 
1920년 봄에 동경에서 유학생 동경유학생
洪海星.金裕鎭.趙均石.柳春燮님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극 연극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립하셨고  이듬해에는 김우진(金宇鎭)·조명희(趙明熙)·
유춘섭(柳春燮) 등과 더불어 국내에 들어와 
 각 지방에 순회공연을 다니셨습니다.
 
귀국 후 1922년에는 이호(李浩)·김홍파(金紅波)·
심훈( 상록수 작가 沈熏)·송영(宋影) 등과 함께 최초의
프로문학 단체인염군사(焰群社)에 가담했고 곧 이어
1925년  8월에는 카프 결성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이런 단체들은  공산계열 단체였습니다.
 
이 무렵에 경성방송국에서 시험방송을 하면서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선발 된 분이 최승일님이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오신 최승일님은 아나운서도 하고 방송극이라는
이름이 없었어도 지금으로 말하면 방송극 연출도 하고 
프로그램도 제작도 하셨습니다.  
 
최승일님의 발령사항이 "경성방송국 문서계원"
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행정을 했던 사람으로 생각하는분도
계시는 것 같지만 발령사항이야 어떻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최승일님은 문학게, 연극계에서 이름이 알려지신 분이고
방송국에서 연출이나 아나운서를 하신 분으로 새로운
방송국이 문을 여는데 공헌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노정팔님이 우리나라 PD 1호로 불리워
 지십니다.이것은 해방된 후를 기준으로 해서 부르는
 말입니다.방송이 탄생 할 때부터로 보면
 최승일님이    PD 1호 이십니다. 

이 때는 방송기자라는 것이 없었으니
 해방 후부터 기자 1호가 되셔서 문제안님을
방송기자 1호라고  하고 신경방송국에 계시다 오신
 조동훈님도 문제안님과 함께 활약하신  방송기자였습니다.
자료를 이리 저리 들추다 보니 방송초기에는
 아나운서라는
말도 없었고 모두 방송인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최승일님은 방송국에 들어와 1926년
라디오 극 연구회를 발족시켰고 입센탄생
100년제때는 " 인형의 집" 제3막을 조선어로
 방송하기도해서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충실하게 그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최승일님은 방송극 연구회를 조직 하면서
스스로 쓰신 파멸이라는 소설을 이경손님이 각색해서
방송극으로 방송하셨고 방송국밖에서도 문학이나, 연극계,
 영화계, 또  여러 방면에 걸친  사회활동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나운규가 아리랑을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아  이 작품이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면서  세상을 뒤 흔들 정도의 큰 반향을
일으켰을때  최승일님은 "별건곤"(開闢社에서 발행하던  「開闢」지가
 허가취소되어  대신 「別乾坤」을 發行함 )  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에서 " 영화는 사실상 소설을 정복하였다"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 문학계나 영화계에서도
 영향력이 컸던것 같습니다.
 
시험방송때부터 방송에 출연하셨던
복혜숙님이 최승일님이 아나운서로서 연출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방송초기 여러가지 면에서 그 역할이 컸다는 점을
 짐작 할 수 있읍니다. 복혜숙님이  놓으신 글을 보시겠습니다.
1927년  이전의 시험방송 때의 얘기 이십니다. 
 
 
 
 

처음으로 시험방송을 할 당시 조선극우회의
변기종, 권일청 두분이 시험방송에 같이 출현했었다.
 그때는 방송극이라는 명칭도 없었고 총독부 송신국 뒤에
방을 하나 빌어서 방음장치로는 포장을 한겹 쳤을 뿐인
 스튜디오? 에서 별로 효과도구라는 것도 없이 방송극을
방송했다.   그땐  담당  아나운서가 연출도 겸했는데
최승일 씨로 기억한다. 각본은 무대극(단막) "새벽종"
이라는 것을 했다. 마이크를 넓은방  한 가운데
세워놓고 한쪽만을 사용했다.
 

일제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PD 1호는 최승일님이고 해방된 후로
 
국한 하자면 노정팔 님 이십니다

 

최승일님의 지난날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테어난 님은 배제고보를
나온후 일본에가서  니혼(日本)대학 미학과를  수료하고  
귀국한후  소설가로  또는 연극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북풍회, 경성청년회,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각종 사회·문화단체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떠날때만 해도 부유하던 집안이
 얼마 안가 어려워진 가정으로 변해 버려  생활을 꾸리기에 비쁜
최승일님에게는 방송국에 근무하는 것은
어느면에서는 생활 수단이었고
방송국 밖의 사회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둔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활동
과정에서 만난  김영팔님도 방송국에서 일을 하시게 되고  
부인 마현경님도  같이 일 하시게 되었습니다.
 
마현경님은 이옥경님보다는 좀 늦게(이옥경님은
2006년 7월부터 시험방송에 임했음 )    개국을 앞두고
아나운서시험에 응시해서 927년 1월 5일 일본인 여자아나운서
두사람과 함께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근무 하셨습니다.

 

 
 

 

 

 

좌익활동을 하던 최승일님은 동생 최승희
또 그의 남편 안막,  슬하의 내 자식들과 함께 1948년  
(안막과 최승희는 1946년 월북) 월북하게 되어 북한에서
활동을 했지만  그의 동생 최승희나 안막이 크게 이름을
날렸고  최로사라는 최승일님의 딸은  정상급 시인 대우를
받았지만 최승일님은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최승희님이 숙청될 무렵부터 최승일님의 이름도 사라졌고
그 이후의 소식은 모릅니다.    한편 최승일님의 부인,
마현경 아나운서는 끝까지 월북을 거부하고
홀로남아 신당동 집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최승일님의  소설작품으로는 안해(신여성, 1924.6.)를
비롯해서  떠나가는 날과 그 속편인 그 녀자 (신여성, 1924.8.10.)
김천지의 죽음  ( 매일신보, 1924.12.7 ),        바둑이 ( 개벽, 1926.2 )
봉희 ( 개벽, 1926.4 )  홍한녹수 (紅恨綠愁) ( 매일신보 1926.11.14 )
경매  (  별건곤,   1926.12.  )      콩나물과 소설   ( 별건곤,  1927.1  )
이 살림을 보아라  ( 매일신보, 1927.1.1.)    죄 ( 별건곤,  1927.2 )
종(鍾)이 (조선지광 1929.1.)〈거리의 여자〉( 대조, 1930.5 )
누가 익이었느냐?   ( 대조, 1930.8 ) 등이 있습니다.
 월북작가들의 글이 금서목록에서 제외된이래
최승일님, 김영팔님의 작품이 실린 서적의
시판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최승일님은 이나라 최초의 방송제작자이고

 방송극연출자였다. 당대의 이름있던 소설가이고

문학평론가이던 그는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5남매중

큰 오빠이고 경성방송국 개국 아나운서 마현경의

남편이다.불행히도 공산주의자로 1948년

월북해서  삶을 마쳤다.

 
 

 

가운데 책은 최승일님의 소설 이국의 사랑이고

 

양편에 있는책은 김영팔님의 작품이 실린 책입니다.
 
  

최승일님과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님
 
 
최승희님은 1911년 서울에서 5남매중
막내딸로 테어나 숙명여고를 졸업했습니다. (홍천
출생이라는 얘기도 있어서 계속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소설가이고 방송인이었던 최승일님은 큰 오빠였습니다. 
오빠 최승일님은 극진히 사랑하던 동생에게 무용가가
 되기를 권유했고 1926년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
에서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경성공연에
출연해서 유명해졌으며,  1929년 이시이와
해어져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습니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후 한성준(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춤에 두게 되었습니다. 1931년
문학운동가 안막(安漠)님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해서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 격찬을 받았습니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고  이어 1937년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습니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는 가운데 
좌익인사였던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고 말았습니다.
방송국에서 근무 하셨던 최승일님도 좌익인사여서 월북했습니다.
북한에 간 최승희님은  1946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습니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베이징[北京]
 중앙 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으나,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연구소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습니다.  
그후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 등의
저서를 냈으며, 1967년 결국 숙청당했습니다.
 
 한국에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님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우리나라 민속춤이었습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승희님은  일제시대 때 조선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세계무대 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무용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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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최초의 편성원 최승일님의 회고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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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개국 아나운서 마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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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http://blog.daum.net/jc21th/17780245

 

 

김영팔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3173

 

일제강점기 방송인 문필가 이하윤, 이석훈, 김억, 김진섭, 모윤숙, 최승일, 이서구

 

 

 

 

 

   

 

시험방송시절 최승일님이 연출한 새벽종 장면 입니다. 
 
 뒷줄 왼쪽 이백수님, 가운데분이 변기종님, 그 왼쪽분이 권일청님,
앞 줄 가운데 분이 회원님들이 잘 알고 계시는 복혜숙님이고  그 왼 쪽이  
이경환님입니다.  복혜숙님은 1959년 제2회 방송문화상을 받으셨고
70년대까지  활동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1981년 영화
"낮은데로 임하소서 " 에출연 하셨습니다.  
 

 

 

 최승희 최초의 귀국공연이 1927년 2월 5일 매일신보  주최로경성 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그때의 최승희님 모습과 ( 위 ) 무용공연을 알리는 포스타 입니다. (아래)

최승일님도

이 사진에 있을법 한데 설명이 없어 알수 없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최승희 노래1.mp3
1.9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