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국 개국 아나운서 마현경 경성방송국이 2월 16일의 개국을 앞두고
아나운서를 처음 모집할때 공개모집으로 1927년 1월 5일
들어온 마현경아나운서는 京城 女子 高等 普通 學校(지금의 경기여고)
출신으로 이때 21살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공개 모집한
아나운서이고 아름다운 음성과 미모 그리고 명석한 머리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27년 1월 9일자 조선일보 새로 방송을
시작한 아나운서들의 모습을 담은 기사를 옮깁니다.
마현경 아나운서가 방송을
시작한지 1년이 되던 1928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마현경 아나운서의 다음의
인터뷰기사를 실었습니다.
1Kw로 발사된 잔파가 미국까지
들렸는지 미국에서 한국가곡들 듣고 보낸 엽서를
받아본 것이 자랑거리의 하나이고 또 보지도 못한 남자가
라디오를 통한 목소리를 듣고 그리워한다는 편지와 전화를
하는 실없는 남자가 있어서 자랑이라면 자랑이라고 하셨군요.
그시절 아나운서는 신비 하기만 했습니다.
1935년 8월 1일자 삼천리지에 실린 마현경
馬양의 고향은 咸北 城津이니 南男北女라고
이르는 조선에서, 北岳摩天嶺의 정긔를 타고 낫슴인지
그의 미모는 남달니 빼낫스며 北鮮女의
기질이 그냥 있는 처녀이였다.
孃은 城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여 서울로 올나와서 京城 女子 高等 普通學校에
입학하엿섯으니 그의 우수한 학력을 가히 짐작할 수 가 있다.
그는 공부에만 재조가 있을 뿐 아니라 孃은 또한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젓섯다.
그가 같은 동무들과 놀때면 늘 꾀꼴새같은
명랑한 노래를 부를때가 중중하엿다고 한다. 그의
미모와 재조와 고흔 목소리는 학교 시절의 여러 동무들
에게서 많은 羡慕를 남달니 한 몸에 모으고 잇섯다.
그러하든 孃이 女高를 졸업하자
바로 李玉景씨의 뒤를 이여 경성 방송국에
들어감도 그리 우연한 일은 않이엿다. 그러나 學窓에서
「女王」의 소리를 들든 그이기로니 한 번 마이크로폰-앞에
나서서는 과연 많은 사람들 앞에 얼마나한 성공을
할넌지 방송국원들의 초조하든 일이엿다.
그러나 첫 번 나슨 그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약간 미소를 띄우며 세련된 목소리를 내엿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첫 번 마이크로폰-앞에 나스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꾸준한 연습을 애끼지 않었다고 하니
馬양이 얼마나 가슴을 조리며 땀발이 솟앗슬까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1935년 8월 1일자 삼천리지에서 옮겼습니다.
마현경아나운서는 방송국에서
편성, 연출등을 담당한 당대의 문사 최승일님과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최로라를 비롯해서
네 아이를 낳았습니다.
해방이 되자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공산주의지였던 안막을 따라 1946년 월북하고
뒤이어 최승일도 1948년 네 자녀를 데리고 북한으로
갔지만 마현경 아나운서는 북한에 가는것을 거부하고
서울 신당동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개국때부터 방송국
업무쪽에서 일했던 신경석님의증언이라고
유병은님의 방송야사에 기록되어 있음)
마현경님의 1928년 1월의 모습 ( 좌 ) 과 1942년의 ( 우 ) 모습입니다.
1928년 11월 24일 조선일보에
올라있는 마현경 아나운서 글 한편을 올려 드립니다.
조선일보에서 원문을 보실 수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문을 열었습다.
이때 우리나아나운서는 이옥경, 마현경
두사람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들의 목소리는 신비하기만 했고
사람들은 매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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