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이장춘 2009. 10. 27. 02:21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이땅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세계를
놀라게 했던 무용가 최승희님 !   이 최승희님을
그토록 세계적인 무용가로 키운이는 큰 오빠 최승일님
이었습니다.   최승일님이 이 나라 방송을 시작하던때의
방송인이었기에 필자는 두분의 관계를 중시하고
최승일님 얘기를 할 때는 최승희님
얘기도 함께 합니다.
 

 

 

 
한국 고유의 전통춤을 현대무용에
접목시켜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었던 최승희님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46년 월북할때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무용가였습니다.  공산주의 신봉자

안막을 남편으로 삼았기에 1946년 월북의 길을 택했지만 

얼마 안되어 남편 안막이 숙청되고  최승희님도 주체

사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숙청된후 1969년

젊은나이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최   승   희     님
 
 

 

 
 최승희님은 1911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출생지는 더 확인) 숙명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6년 경성방송국에 다니면서 문학, 연극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오빠 최승일(崔承一)님의 권유로 경성공회당
(京城公會堂)에서 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관람하게 되었고 어린 최승희는 자기의
재능을 무용으로 발휘하련는 생각을 갖게되어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이
 경성공연을 할때  일본에서 1년간의 무용공부를 한
최승희님이 처음으로  귀국공연을 하면서  대 무용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연이 있은지 얼마 안있어
 1929년에는   이시이와  해어지고   단독으로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습니다.  그시절 방송과
신문은 최승희님의 활동상을 앞 다퉈 보도 했고
지금도 신문사 자료들은 남아 있습니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그 후 한성준님(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춤에 두게 되었습니다. 1931년
문학운동가 안막(安漠)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해서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고 승무 · 칼춤·
부채춤 · 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 격찬을 받았습니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고  이어
 1937년구미 각국  순회공연에 나서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가는곳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1940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전세계를 돌며  동양무용의 진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의 많은 보도 자료 중에서 조선일보에 나타난
활동상 몇가지를 골라 올렸습니다. 

 

 위 신문 기사 내용은 조선일보 그때의 신문에서 옮겼습니다. 

 

 

  아래 사진 왼쪽은 조선일보 1929년 11월 29일자에서, 오른쪽은 1939년 11월 9일자에서 옮겼습니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일제강점기의 공연활동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는 얘기와 함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안막과 함께 1946년 월북길에 올랐고 그의 오빠
최승일님도 그 자녀들과 함께 뒤딸아
월북길에 올랐습니다.
 
승승장구 하던 최승일님이나
최승희님의 불행의 씨았은 공산주의,
그 뜻에따라 월북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1946), 춘향전, 장고춤,
검무,  해방된조국,  봄의노래,    반양월성곡 창작(1950),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1955),  그의 남편  안막이  이름을
날리며 잘 지냈지만  그것도  한때였고  1955년  남편안막이
숙청당하고 최승희님은 1967년 주체예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되었으며  얼마 안있어
1969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국에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님의 작품세계의근원은 
우리나라 민속춤이었습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냉전 체제하에서 오랜기간 최승희님의 일은  
가려져 있었지만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최승희님
얘기가 활발히 전개되고 , 공연도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님을  기념하는 기념사업회가 구성되어   문화공보부 차관을
지내신 김동호님이 회장으로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하는 모습도
 보이고 강원도 홍천군에서는 최승희님의 고향이라고 해서
 여러 행사도 합니다. (최승희님 출생지가 서울이라는
 얘기도 있어서 더 확인 해 보겠습니다)
 
 최승희님이 세계적인 무용가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최승희를 훌륭한
무용가로 키우고 널리 알린 이가 큰오빠 최승일님입니다. 
이 나라 방송을 시작하던때 방송극을 연출하고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인이고 소설가였으며 평론가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두사람의 얘기를 늘 같이 씁니다.
  


관련글 보기


 

경성방송국 PD1호 최승일님과 막내동생 최승희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243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관련사진 모음
 
 

 

 

 
최승희님이 일본에 건너가 이시이로부터 무용공부를 하고  
 최초의 귀국공연이 1927년 2월 5일 매일신보 주최로 경성 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그때의 국내에 들어온 최승희님 모습과 ( 위 ) 조선일보사에
들렸을때 ( 아래 왼쪽 )  최승희님의 16세때의 일입니다.
 

 

 

 

최승희님 가족과 함께 (남편 안막)

 

 

 광주공연때 숙명여고 동창들과

 


 
손기정과 최승희(1936년 손기정선수 마라톤 우승 환영연에서)

 

 

 

 
최승희님의 부체춤(위)과 장고춤(아래) ( 한겨래 신문에서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소속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이

2007년 12월  22일 저녁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서
<고려 삼신불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북한 4대 명작 중 하나인
<사과풍년>,승희 작품을 재구성한 <부채춤> 등의
공연은   24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