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장기범 아나운서 - 고 문시형 방우회장 글 -

이장춘 2009. 8. 7. 01:57

 

 

 

 방송인의 영원한 모범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나운서 장 기 범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문시형님
  

 

방송인의 영원한 모범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나운서 장 기 범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은둔의 지사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방송의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모든 방송인의 사표가 되신 준엄한 선비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

 


 


현역 아나운서들의 정성이 모아져 세워진

 고 인천 장기범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이계진아나운서가

초를 잡고 김승한 아나운서를 비롯한 현역 중견아나운서들의 중지가 모여

 마련된 글이다. 평생을 방송에 몸 바친 방송인 인천 선생의 사람됨을,

후배방송인들이 본받아야할 심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1927년 5월 5일에 태어나 1988년 3월 18일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겨우 회갑을 지낸지 한해만의 일이어서

추모의정이 새롭다. 겨우 환갑을 채우고 한해도 더 못살고 가다니…….

그가 작고한 후 고인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했던

 방송인들의 애틋한 탄성이었다.

 

인천에서 뱃길로 대여섯 시간 걸리는

덕적도가 고향인 인천선생은 본적지가 인천시

송현동에  자리한 송현국민학교에서 약관 18세에 국민학교

 교사로 봉직한 적이 있다.  만일 8.15광복이 없었으면, 조국이

해방되지 않았으면 아나운서가 아닌 국민학교 훈도를

평생의 직업, 아니 전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전에 회고하던 일이 새롭다.

 

남을 위하고 정성을 다해야만 되는

국민학교 훈도나 아나운서는 바탕에 깔린 철학

(거창한 표현일지 모르나)이 같기에 나온 회고담이라 하겠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였던 은둔의 지사라며 후배

아나운서들이  선배인 인천을 흠모하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1948년 12월에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과 인연을 맺은 인천 선생을 일컬어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이라고 표현했는데 말 그대로

 학처럼 깨끗한 방송인으로서 생을 다한 것이다.

 

이 땅에 생을 이은 사람치고

난세를 겪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겠으나

일제에 아부하는 무리들 속에서, 권력에 머리 숙여 잇속만

 챙기는 졸부들의 무리 속에서 지성인으로, 아니 선비로서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나운서이기에 아나운서로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기울이는데 만족했던 인천의 삶은 그래서 더욱

의미롭다.  1954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이 하나있다. 당시 서울방송국의

인기프로그램은 단연코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이 으뜸이었다.

 

기존의 신세계백화점 4층에 있었던 극장

(개관되지 않은)에서 매주 한번씩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이

공개 방송되었다. 물론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의 사회는

장기범 아나운서와 임택근 아나운서가 맡고 있었다.

 

공개방송 할 때마다 극장 안이 찜통이

되다시피 했음은 물론이고 방청객의 쇄도는 장안의

소매치기를 전원 집합시키는 상황으로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사회자인 장기범 아나운서와 임택근 아나운서의 인기는

그야말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는 단일방송시대였으니 아나운서의

 희소가치가 높았다. 일반청취자들은 방송은 오로지

 아나운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잇을 시대였으니

그 인기는 쉽게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아나운서의 인기, 다시

말해서 인기직업인 아나운서- 그러기에 아나운서에겐  인기관리가

 매우 중요했다.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사회자가 갑자기 청취자들의

 우상이자 아나운서의 상징처럼 되자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실에

 파란이 일었다.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의 진행은 여러 아나운서가

교대제로 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방송은 시험방송도 아니고 아나운서를

테스트하는 방송도 아니기에 사회자의 교대제는

 있을 수 없다는 PD의 주장이 강력했으나 묵살되었다.

마침내 교대제가 시행되었다.

 

PD의 주장도 주장이겠지만 인기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담당 아나운서의 반발이 있었어야

 마땅한데 장기범 아나운서는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고 승복하였다.

또한 임택근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로 활동한지 얼마 안 되는 후배이므로

 선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나운서실의 파란이 몰고 온 두개의

인기프로그램 진행의 교대제는 일주일도 못가서 원상회복이 되었는데

이때 벌어진 일련의 사태결과는 당시 장기범 아나운서의

반발 아닌 승복에서 온 것이었다고 본다.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의 진행자가

어느 누구의 독점물이 될 수 없을뿐더러 모든

 아나운서에게  기회가 균등히 부여되는 게 마땅하다는

 참으로 건전하고 사심이 없던 장기범 아나운서의 그 태도가

아나운서실의  파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인기직업이기에 인기관리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관념을 그가 사심 없이 양보하여 아나운서실의

 평온을 되찾게 한 것이었다. 인천은 후배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방송인임에 틀림없으나 은둔의 지사이자 위대한 상식인 이어서인지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볼 때 관운은 없었던 방송인이었다 하겠다.

 

 6.25이후 서울중앙방송국엔 아나운서의

기근시대가 온다. 6.25사변으로 당시로서는 제일 출세한

민재호 방송과장은 동경의 유엔군 총사령부에 전황보도 아나운서로

전출(일종의 증발)되었다. 그리고 유능한 아나운서로 손꼽히던

윤용로,전인국 두아나 운서는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그밖에 위진록,홍양보,유덕훈 아나운서 등은

역시 전쟁 중이기에 전시 방송요원으로 증발되고 만다.

 이성수 아나운서를 비롯한 몇몇 아나운서도 떠났다. 고작

십 수 명에 불과했던 아나운서 가운데 10여명이나

자리를  뜨고 보니 아나운서 기근이란 표현이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운서실을 보강하기 위하여

 윤길구 아나운서가 보강 복직되어 틀을 잡는 듯 하였다.

러나 사무관이었던 서명석 아나운서가 지방으로

전출되고 또한 한희동 아나운서도 사무관

이었기에 그 또한 지방으로 전출된다.

 

기근상태의 서울중앙방송국을 지키는

아나운서는  자연히 윤길구,장기범 아나운서일 수밖에 없었다.

아나운서이기에 앞서 공무원이란 굴레가 씌워져 초래된 아나운서실의

변혁기라 하겠다.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리고 아나운서로서의

 인기도로 보나 장기범 아나운서가 마땅히 공무원으로서 사무관이란

 서열에 올라야 될 텐데 엽관운동에 능숙한 최 모 아나운서가

아나운서의 서열을 깨고 말았다.

 

한시대의 아픔이고 상식선이 무너진

인사비리라 하겠으나 공무원 사회라는 틀은

아나운서들의 진정서가 통할 리 없었다. 장기범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로서 승진문제에 개의치 않던 '스무고개'를 개편한

 '재치문답' 사회자로서 방송에만 일념으로 정진한다.

 

1956년에 이르러 아나운서가 된지 햇수로

8년 만에  방송관으로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계장이 된다.

지금의 방송공사 직제로 따지면 아나운서 실장을 겸한 보도본부장이다.

계급에 급급하지 않고 오로지 아나운서로서 최선을 다했기에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라는 후배 아나운서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고 있다.

 

 1953년 3월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과를 졸업한

인천선생이 방송이란 외길을 보람 있게 걸어온 것은 본인의

성실함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그의 경력이 증명하고 있다

. 춘천방송국장,     부산방송국장, 대구방송국장, KBS연수원장,

심의위원등등.. 1956년 11월엔 멀리 호주 맬보른에 날아가

제16회 세계올림픽을 중개했는가 하면 1970년

 11월에는 아시아 경기대회를 중계방송 했다.

 

그는 슬하에 1959년 8월부터 워싱턴에서

 2년간 미국의 소리, VOA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시절에

 얻은 장남 원용씨를 비롯해 삼형재를 두었다. 미국도착 하루 만에

상점에 나갔던 그는 어딜 가도 버터냄새를 맡아야만 했기에 백악관 뒤

 행길에서 지도를 펴놓고 한국음식점을 찾은 일을 자주 얘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신부차림이었던, 자수를 놓은 분홍색 치마저고리로

  단장한  인천 장기범선생의 부인 박종설 여사를 보고 원더풀!

뷰티플! 하면서 찬사를 보내던 미국의 중년여성들--

틀림없는 한국인들이기에 길바닥에서 촌티를

 흠벅 냈다는 것도 그의 추억이었다.

 

필자는 선생으로부터 1959년 연말경에

미국에서 저녁 초대를 받은 일이 있다. "한국 음식점의

두부찌개를 몇 달 전엔 맛있게 먹었는데 역시 버터냄새가 나서

 맛이 없어요. 미국냄새가 싫어서 하는 수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식사는 집에서 하고 있지요"하면서 집으로 끈 바람에 갈비찜과

김치, 깍두기로 포식한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더욱 재미난 일은 된장, 김치냄새가 난다고해서

 아파트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자정이 지난 밤중에 된장을 볶아

고춧가루를 흠뻑 치니 훌륭한 고추장이 되었다고 자랑하면서

애써 만든 고추장을 나누어준 일들이 엊그제인 것 같다.

 

 "2년간만 있기로 해서 미국에 오긴 왔지만

미국에선 못살겠어. 한국이 정말 좋아."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의 말이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다. 아나운서의 대부인

이게원 선생을 비롯해 민재호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있어

미국 VOA생활 2년은 아나운서로서 또 다른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고 그는 자랑하곤 했다.

 

더욱이 한국인임을 자처하면서

'나목의 자세로'라는 수필에 장기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나는

꽃씨를 심으리라."던 선철의 말을 반추해 본다고 말 머리를 끌어낸

그는 맨 마지막 부분에서 "설익은 과실을 위한 성급한 꽃나무가

되기보다는 겨울을 참는 의연한 나목의 자세로 나는 봄을

향하여 갈 것이다."라고 했다. (1962년 주간방송)

 

이 같은 인천의 마음가짐이 선비로서

아나운서로서 이 땅의 방송인물로 군림하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1958년 8월에 공보부가 제정한 방송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8월에 홍조소성훈장,1965년 3월에 서울시문화상, 1977년 2월

 16일에 문화훈장을 받은 인천의 외길, 아나운서의 큰 발자취에

걸맞은 것인지 모르겠다.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인천의 술타령을 끝으로 밝힌다.

 

1966년으로 기억하는데 장기범 아나운서가

술로 인해 위에 구멍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일이 있다.

술이라면 절대 사양치 않는 주당으로 소문이 났지만 실은 술을 사랑하는

 애주가였다. 다만 술자리의 분위기에 따라 술의 양이 다른 것뿐이었다.

 재미시절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미국식 바에 들어가 맥주를 마친 일이 있다.

'맥주 한 병이 좀 오르는데'하면서 맥주를 더할 생각이 없어

 술집을  나가자는 제의를 받은 일이 있다.

 

소문난 술꾼이 맥주 한 병으로?

 아마 술 못하는 필자와 대작하기 거북해서였을지도 모르나

 보다 확실한 원인은 술자리의 분위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술집 안

스탠드 쪽에 일렬횡대로 줄지어 떠드는 흑인도 있고 반백인도 있고

백인도 있는 키 큰 미국인 틈에 끼어 맥주를 든다는 것은…….

분위기치고  우리에겐  최악의  술자리 바로

그것이었으니  맥주 맛이 날 리가 없었다.

 

말하자면 술을 마시는 분위기치고는

엉망진창이었다. 고할까. 1957년 아리랑에 기고한

'나의 식도락'이란 글에서 인천은 다음과 같이 술타령을

늘어놓고 있다. "술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안주는 누가 어떤

 안주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명천의 태 서방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작정이라고. 그러나 마음

흐뭇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있다면 술만이라도 좋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 소박하고 담백한

 '술도락'이라하겠다. 

 

이글은 1957년에 쓴 글이니 약관 30세에 쓴 것이다.

"마시고 난 빈맥주병은 가져가지 말고 벽에 늘어놓기로 하자"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다. 만년에 맥주 당이 된 장기범 선생 아닌

장기범 아나운서, 달과 술을 사랑했던 낭만인, 당신은 영원한 한국의

아나운서!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명복을 빈다.

 

 

 남산시절 아나운서들의 모습입니다.

왼쪽에서 네번째 분이 장기범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