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18년

이장춘 2009. 8. 6. 05:50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18년
 
 
 
 2006년 5월 5일은 장기범님
살아 계시다면 산수의 날이고 이날을 기해서
님 가신지 18주년의 기념으로 묘소를 찾았
습니다.그때의 글입니다.
 
 
장기범님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이
처음 시작되던 해 1927년 5월 5일 태어나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서던 1948년10월에 방송에
입문 하셔서  1982년 6월  정년퇴임  하실 때까지
34년간 KBS에서 방송 한길만 걸어 오신분이고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하던 1988년 3월 18일!
아직 젊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신
영원한 방송인 이십니다.
 
 
위 글은 제가 작년 8월 장기범님에 대해
처음 글을 썼을 때 첫 머리에 나온 글입니다.
 또 세월이 흘러 5월 4일 추모 행사가 있었
습니다.  님을 따르고 님을 존경하는 많은
후배들이묘소를 찾아 가신님의 지난날을
 더듬고  명복을 빌었습니다.
 
 
 

 
 
국회의원 이계진회원님의 주선으로
열린이 날의 추모제에는 사우회 김수웅 부회장님,  
1954년부터 방송을 하셨던  전영우 회원님,  최만린 님, 
 이규항님, 김찬식회원님, 이윤재님, 이팔웅회원님,  정경래님,
이세진회원님,   홍승택님,  김규홍님,  현재 사내에  재직중이신 
강동순 감사님,  김윤한국장님, 표영준 아나운서실장님, 서기철님,
박현우님, 조우종님 등,1954년부터 방송하신 선배님으로
부터  2004년 새내기 후배  사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이  참여 해 주셨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은둔의 지사.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방송의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모든 방송인의
 사표가 되신
준엄한 선비.

……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

 
 이계진님이 쓰신   묘소의 비문으로  
 님의 삶을 압축해서 묘사해 놓은 글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이 계진님이 쓰신 글 일부를 옮겼습니다.
 
 
장기범 아나운서, 그는 누구인가?

이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역사의 조명을 받고 산 사람들과는 달리 시대에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한그루 전나무’처럼 살다 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바로 알고 또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대부분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다.

아나운서 장기범,
 
언론인 장기범,
 
인간 장기범,
 
선비 장기범,

상식인 장기범…….
 
참으로 여러 면모로 수식되지만 일관되이

‘곧게’ 평생을 살아온 모습만은 한 맥으로 흘렀다.

이제 여기, 강화도가 바라다보이는 김포시 월곶면 양지바른
언덕의 고 장기범 아나운서 묘소의 묘비명을 실어
그분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한글로 옮겨 적는다.

아나운서로서 언론인으로서 선비로서 은둔의 지사로서
인간으로서 전인의 모습을 보여준 장기범 아나운서, 그는 평생을
곁눈 한번 안 팔았지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앵두집 순딕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를 지독히 좋아했다.
「돌지 않는 풍차」의 사연이 그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그 노래를 들으며 껄껄걸........
한세상을 바람처럼 날려 보냈던 것이다
 
 
긴 글을 일부만 옮기다 보니 앞 뒤가 잘 통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제 블로그에 전문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계진님은 아나운서 협회에  기금으로
1억원을 출연해서 이 기금을 바탕으로 매년 우수한
아나운서를 선발  ”장기범상 “을 주고 있습니다'
 
 


 
 
 김찬식님의  추모시 낭송이 있었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장기범 원장님 18주기에 붙여-
 
             김    찬   식
 
 
원장님
그곳 술맛은 어떠신지요?
좋아하시는 문주란 노래
가끔 들으시고요
 
그리고 무었보다
그곳 술자리에도 행여
심기 불편 해 하는 사람 있는디
그게 굼금합니다.
그게 염려 됩니다.
 
천 잔술도 아쉬운 사람있고
한잔술도 역겨운 사람 있다. 시던 말씀 !
 
허위와 위선과 가식
이기와 교만과 사술 넘치는
이승
한잔 술 역겨워 얼마나 피곤 하셨습니까?
한잔 술 아쉬워 얼마나 외로 우셨습니까?
 
정의와 진실과 정리 위해
불의, 거짓, 배덕의 세파,
물리치시기
얼마나 힘 드셨을까 ?
 
그러나
잘도 이겨 내셨기에
그 기품, 산마루의 청청 소나무
우러러 오늘도 바라봅니다.
 
서나 서나 들고 계세요.
머잖아 맨발 바람 달려가
문안 드릴 때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셔야지요.
 
그 날까지 안녕히 계세요.
원장님
 
2006년 5월 5일
 
김찬식 회원님은 회원님은 시인이시고,
 수필가 이시고  시사평론가 이십니다.
 
아래 사진은 시 낭송 모습입니다.
 


 
 
 
세분의 추모 말씀이 계셨습니다.
 
 
전영우회원님 추모 말씀 모습입니다.
 
전영우님은 1954년 아나운서로 들어 오셔서
동아방송 개국시에 가셔서 아나운서실장님으로
계셨습니다.  1980년 12월에 오셨다가
강단으로 가셨습니다
 
수원 과학대학에서 후진을 지도하고 계십니다.
 
 


 
 
최만린님의 추모말씀 모습입니다.
 
 
최만린 님은 1950년대 말 남산시절에 아나 운서로
들어 오셨습니다.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로 계시고
건축 디자인계에서 알아 주는 분이어서
KBS에 있는 물망비나, 정동 방송터 상징탑을
설계 하셨습니다.
 
이름있는 성우 김소원님의 부군이시기도 합니다.
 
 


 
 
박현우 사원의 추모 말씀 모습입니다.
 
박현우님은 현직 아나운서로 군대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어 짧은 머리 모습이라고 합니다.
 
장기범상을 받은 사원이기도 합니다.
 


 
 
 
 지난 해 보내 드린 제 글 일부를
 
여기에 옮기면서 오늘 메일 마치겠습니다. 
 
전문은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생각 해 보면 직위와 직책을 놓고 종종 윗사람
또는 권력자의 비위를 의도적으로 맞추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지만 님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으셨기에
고비마다 어려움을 겪거나 기회를 날리는
경우들이 있으셨습니다.
 
 직위와 직책을 떠나 KBS의 방송인이라는
한길만을 지키셨고 대한민국 모든 아나운서의 사표로,
나아가서 모든 방송인들이 귀감으로 삼을 수 있는
 삶을 이어 오셨습니다.
 
명성 가지신분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KBS를
떠나시는 경우가 많던 시절에도 거기에는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리 저리 비위를 맞추면 더 좋은 자리도,
더 잘 살 수도 있으셨겠지만 옳지 않은 일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님의 직위는 비록 KBS의 국장이나 연수원장에
머무르셨지만 행적이나 정신, 인품은 모든 방송인들의
사표가 되고 모든 국민의 심금을 울려주며 그 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성을 지니셨지만
정작 님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사시던 님은 돌아가실 때도 사람들 모르게 가셨습니다.
벚꽃 필 때 대전에 다시오시겠다던 님은 주위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1988년 3월 18일
그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님은 가셨지만 그 공적은 길이 빛나고
님을 따르던 많은 후배들은 살아계시던 그날을 얘기합니다.
지금도 님이 태어 나셨던 5월 5일이 되면 그날을 전후해서
님을 따르던 분들이 같이 모여 님의 묘소를 찾아
그 정신을 기리고 유덕을 되새겨 보곤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방송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인 것 같습니다. 한국 아나운서 협회에서는 기금을
마련해서 님의 공적을 기리는 장기범상을 마련하고 매년
연말에 열리는 한국아나운서대회 식장에서
 
시상을 하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MBC 이재용 아나운서와
극동방송 민산웅 부사장이 상을 받으셨습니다.
 
가신지 17년이 더 지났지만 그 목소리! 그 재치! 그 모습!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고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명성은 아직도 살아 있고 또 그날을 그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몸은 KBS 한곳에서 한길을 걸으셨지만 모든 방송사의 벽을 넘은
 대한민국 전 아나운서의 길잡이 이셨고 대한민국의 방송인 이셨습니다.
 
 님은 가셨어도 그 정신과 뜻은 모든 방송인들의 사표가 되면서
영원한 방송인으로 길이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은둔의 지사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방송의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모든 방송인의 사표가 되신 준엄한 선비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
 
몸은 KBS 한곳에서 한길을 걸으셨지만
모든 방송사의 벽을 넘은 대한민국 전 아나운서의
 길잡이 이셨고 대한민국의 방송인 이셨습니다.
 
님은 가셨어도 그 정신과 뜻은 모든 방송인들의
 사표가 되면서 영원한 방송인으로 길이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작년에 쓴 글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시차는 그렇게 이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장기범님의 추도회를 보고  
 
 
우제탁 회원님의 글 입니다.
 
 
소생이  1964년   남산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전임 발령을 받고, 부임 하고 보니, 당시 방송과장이었던
 장기범님이   기술과장 유병은님과함께  촌놈 서울 왔다고 명동에

본인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던것이 처음 만남이었습니다. 그후

부산 방송국장으로 계실 때 과중한 업무 피로 탓이라면서 입이

부릅텃다고 하시며 상면 했던 일이나 님이 퇴직후 시골

보잘것 없는 집에서 사시던 일이

머리속에 떠 오릅니다.
 
어려운 생활속에서 할일없이 무료하게

소일 한다면서고무신을 신고 집 주변을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하여 주변의 여러사람이 매정한

사회를 원망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장기범님이

 유명을 달리하신후 유병은님 그리고 김덕수님과 함께

 장기범 유족들이살고 있다는 집을 방문

했던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시골 변두리 골목길

연립주택 2층에세들어 살던 집을 찾아가보니  

부인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집 살림살이를

이방 저방 돌아보고 놀랬던 적이 있습니다. 전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이  한세대를   풍미하시던  님의 유족이

살고 있다는 살림을보고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즉 아무것없는

 어려운 살림,,,겨우 가지고 있다는것이있다면 벽에 걸려잇는 이름

있는 작가 그림  두폭,,당시 나는 감격에 못 견디어   서투른 글 솜씨로

 " 방문기를" 써 보았던바  이 글이  그때 사우회보에 실렸었지요, 그후

 여러사람들과 같이 산소를 찾아 본 추도식에  참여 해보았던것이

이제 몇년이 흘렀는데  후배 들이 본 추도행사를 계속하고

 있는것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되새겨 봅니다

 

 

  

우제탁님은 1953년 남원방송국 개국때 들어오셔서
( 유병은님이 개국 책임자로 계셨을 때) 6년 라디오 조정과에
잠시 계시다가 남양 송신소로 가셨습니다.
 
남원, 목포, 진주, 제주 등지에서 
기술과장을 하셨습니다.

 

 




 












......Roman De Mareu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