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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계진님이 쓴 장기범 아나운서

이장춘 2009. 8. 9. 01:38

 

 
 
 
국회의원 이계진님이 쓴 장기범 아나운서


아! 장기범 아나운서

1927년은 이땅에 방송의 첫전파가 발사된 해다.

 

아울러 그해는 이땅에서 가장 위대했던 아나운서이자
‘참 언론인’으로고난의 생을 마친 고 장기범 아나운서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방송의 씨가 떨어진 해에 그는 태어났고, 방송의
꽃이 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방송의 장한 모습이  세계를
놀라게 하던 해 3월에 한 많은 세상을 홀연히 떠났다.

장기범 아나운서, 그는 누구인가?
 

 

 

 

이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화려한역사의 조명을 받고 산 사람들과는 달리 시대에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한그루 전나무’처럼 살다 갔기 때문이다.물론
그를 바로 알고 또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대부분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다.
 

아나운서 장기범,
언론인 장기범,
 
인간 장기범,

 

선비 장기범,
상식인 장기범…….

 

 
참으로 여러 면모로 수식되지만 일관되이
‘곧게’ 평생을 살아온 모습만은 한 맥으로 흘렀다.
이제 여기, 강화도가 바라다보이는 김포시 월곶면 양지바른
언덕의 고 장기범 아나운서 묘소의 묘비명을 실어 그분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한글로 옮겨 적는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은둔의 지사.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방송의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모든 방송인의
사표가 되신
 준엄한 선비.

……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




인천에서 많은 인물이 났지만 혹자는
‘인천삼절’로 고유섭 선생, 김은호 선생과 함께
 방송인 장기범 선생을 서슴없이 꼽는다. 젊은 날의 명성과
생을 통해변치 않았던 곧은 지조를 아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는 확실히 시대의 선비였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장기범
아나운서는 모교의 위대한 시인이요, 사상가인
조지훈 선생을 흠모하였다.

 

 

 

 

항상「지조론」을 가까이 두고 읽었고

시절이 어수선할 때마다 지훈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이야기’는 ‘과분’이라며

아무 말 없어도 좋으니 약주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늘 말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조지훈 선생의 마음

속이었다. 어느 해인가 지훈 선생의 제자인 이규항

아나운서가 해소에 좋다는 인절미를 사들고 모교로

스승을 찾아뵈었을 때, 지훈은 ‘공보부에서

인물 한 사람 꼽으라면 장기범 아나운서

하나!’ 라고 했다고 한다.

 

 

6·25동란으로 서울의 중앙방송국이
부산으로 밀려갔을 때, 피난지에서 두어 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을 뿐인 두 선비의 사연이다. 장기범 아나운서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어도 항상 돈에초연했고, 돈에 대해 엄격했다.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분명히 그러했다. 자신의 수입에는
초연했고 남의 돈에는 엄격했기 때문이다.


 

앞줄 오른쪽에 앉은 아이가 지금
 40중반이 되어 회사를 경영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959년 장기범 아나운서는 「미국의 소리」
우리말 아나운서로 파견됐다.     그의 도미 소식이 당시
「리버티 뉴스」(「대한뉴스」의 전신)에 소개될 정도로
 주목받는 아나운서였다. 그때 공무원 신분으로서
의 계급은 사무관으로 봉급은 평 아나운서에
 비해서 많았다.

퍽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재미 기간에그 ‘사무관의 봉급’을
고스란히 어려운 두 후배에게 나누어 지급하도록

조치해 놓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유는

미국에 가면 나는 당당히 미 국무성의 봉급을

받으니 이중으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두 후배들이 마음 편히 받도록

하기 위해 본인들에게만 이야기하고 그 밖에는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
가난했던 C모 아나운서의 해묵은 발설로

근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961년 5·16혁명의 수상한 소식을

「미국의 소리」에서 직접방송한 후에 그는
귀국했고 우려했던 상황들은 하나하나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개입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그의 그러한 반골적 사상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게 만들었으며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도록 압박했다. 혁명 후에 생겨난
 민간방송국에서 당시 KBS 중앙방송의 실질적,
정신적 지주인 장기범 아나운서에 대해
유혹의
손길을 많이 보냈지만 조금의 동요도
없었던 것도 차라리 가난이 낫지
뜻을 바꿀 수는 없다는 선비적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후배들이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잡지 못했다.
 ‘가난의 고통은나 혼자로 족하다’는 의미였다. 공직자로서의
자세는 현대판 목민관의 표본 같았다. 여기에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정부의 ‘노여움’을 사서 (자초한 것이었음)
 대구방송국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사사로운 일로
 서울을 다녀갈라치면 항상기차를 탔고, 대구 역에서
 국장관사까지는 필연코 시발택시를 이용했다.

국장 차의 운전기사를 일요일에 사사로운 일로
 대기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아주 평범한 이유 때문이었다.
운전기사가 안절부절 못했겠지만 그가 마음 편하도록
빈틈없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부산방송국장으로 근무할 때는 또 남다른
고생을 했어야 했다. 전임자가 물려준 방송국 빚을
해결하기 위해서 재임기간에 항상 허름한 음식점에서
 손님접대를 했고, 관사에 기거하며 연탄을
손수 갈아 넣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번도 자랑하거나 생색을 낸 일이 없었다.
그저 부하직원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을 뿐이다.
그 결과 빚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는데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지
아는지 그후 어떤 후임자가, 인계받은 남은 빚은 장기범 국장의
빚이라며 고발하려 했을 때 좋은 후배들의 증언으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러한 면모가 혹시 여유 없고 매몰차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그의 마음은 푸근하고 넉넉하고
 서민적으로 소탈했다. 대구방송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방송국 정문 앞의 라이터 장수와의 사귐은 유명한 이야기다.
천성적으로 술과 사람 사귐을 좋아하는 장기범 국장은 근무가
끝나면 국장의 신분을 떠나 똑같은 처지의 보통사람으로
돌아가방송국 앞 라이터 장수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라이터 장수쪽에서 겁을 먹고
이상하게 생각 했겠지만술을 즐기는 소탈한 성품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더없는 술친구가됐다. 출근길에 멀리서
 바라본 검은 승용차의 대구방송국장이 퇴근길에는
나의 술벗이라고 생각한 라이터 장수의 기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만 그 라이터
 장수도 신분을 뛰어넘는 좋은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가림 없이 사귀고 벗했지만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인간위주’로 사귀었을 뿐
‘계급위주’로사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산방송국장 재직시 그를 모시던
운전기사 이모씨와의 교우는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외형으로 느껴지는 인간의 벽을 넘어서
 마음으로 통하는 인간의 정을 교우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의미다.

 



 


1988년 3월18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흠모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전에 엎드려 오열했다.
그때 남이 보지 않는 한구석에서 머리숙여 흐느끼는 센 머리의
 조객이 있었다. 장기범 아나운서를 정년 퇴임하기
 직전까지 모셨던 기사 김모씨였다.

마음속의 어른을 떠나 보낸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으니그 또한 허물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으리라. 장기범 아나운서는
예절 바르고 의로운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언젠가 주말 오후 후배들과 함께
인천 연안부두에서 술자리를같이 했을 때의
일이다. 저쪽에는 결혼을 앞둔 듯한 두 쌍의 남녀들이
조용조용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장기범아나운서가
망가진 의자에 잘못 앉다가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웬만한
젊은이들이면 대개 웃어 버리거나 무관심하게 바라볼 터인데
재빨리 쫓아와 ‘괜찮으십니까?’를 연발했다.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사실은 흔치않은 일이었다.

장기범 아나운서는 등을 툭툭 치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이런 젊은이들이 있으면
됩니다.”술값은 젊은이들 것까지 함께 계산됐다.
 유쾌 무비의 술자리였다.

또 한 번은 Y대학교 앞 술집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한쪽 옆에서 젊은이들이 시국에 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술을 계속 마시며 들어봐도
하나 허튼소리가 없었다.만취의 상태가 되어 술집을 나서며
그 젊은이들의 술값을 대불했다.‘저런 젊은이들이 있으면 나라 걱정이

없는데…….’수주(樹州) 변영로 선생에 필적할 만큼의 명정세월 이었지만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술좌석에서는 남을 말하는일이 없었다.

다만 나라에 대한 가없는 걱정이 있었고, 나라를 그르치는 무리들에 대한

굽힘과 변함 없는 분노가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사사로운 뜻으로 남을욕할라치면 ‘자, 술드세요,

네?’로 가로막았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하지 않는 것이 또 있다.
영어다.「미국의 소리」방송 때문에 미국에서도 오래
근무를 했다. 영어 뉴스를 혼자 번역해서 방송을 했으며
「타임」지의 새로운 영어 단어 모집에 ‘노·케이’ (오·케이의 반대)
라는 새 영어를 만들어 당선되기도 했던 상당한 영어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술좌석에서
아무리 술에 취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하는 법이 없었다.

 


아나운서는 우리말을 해야 한다는 평범한 소신과
겸손 때문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가 영어를 못하는 줄로
여긴다. 마치 허약해 보이는 체격만 보았지 유도가 초단에 수준급의
수영 실력과 스케이팅을 즐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한번도 완력을 시사하거나
자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술을 즐겼기 때문에 술과 관계되는 
 

일화들이 많은데그러다 보니 가끔 술에 만취되어
 살아왔다는 인상을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없는
오해다. 1948년에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출발하여 1982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34년의 긴 공직생활중에 ‘무결근
무지각’의 대기록을 세웠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로 오해하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따끔한 일침을 가한 일화가 한토막 있다.

그의 분위기를 고루하게 보는 사람은 ‘일’과
‘생활’의 엄격한 일면을 잘못 표현한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그의고루한 분위기는 일과 생활에서 자주,
진보적인 현실로 나타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선배 아나운서들이

노력을 하지 않고 현상에 만족하고 안주하려 할 때,

뉴스 배당에 혁신을 일으켰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즉, 가장 중요한 뉴스인 라디오 정오뉴스를
배당할 때 선후배를 바꾸어 놓았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정오뉴스는 실력 있는후배에게 배당했고, 평소 정오뉴스를
맡았던 L모 아나운서(당시에 천하를 호령한다고 자부하던)는
 국내에선 들리지도 않는 국제뉴스를 배당했다.

결과는 평지풍파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L아나운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부르르 공보부에 계신
H모 장관에게 찾아가서 경종을 울렸을 뿐인 대선배 장기범
아나운서를 ‘암적인 존재’라고 고해 바쳤다.

결국 H장관의 여린 귀로 하여 장기범
 아나운서는 산 좋고물 맑은 춘천방송국의 국장으로
 발령이 됐다. 귀양살이 격이다. 장기범 국장은 웃으며 떠났다.
그의 진실을 아는 후배들이 들어 주는 성동역의 배웅을
 뒤로 하며 경춘선 기차를 탔다.

씁쓸한 세상이지만 일단 승복했고,
숙직이 끝나면 경춘선을 타고 찾아오는 후배들과
마시는 값진 술 한잔에 취해 어려움을 달랠 수 있었다.
마치 우리는 제주로 귀양간 추사 김정희를 찾던
이상적의 옛이야기를 연상할 수 있었다.

H장관의 알 수 없는 노여움에 춘천으로 간
장기범 국장은 못난 무리들에 의해 감시되었고
모함이 계속됐다. 어느날 그런 소문을 들은 부하직원이
 장국장에게 전언했다. “국장님 큰일나겠습니다.”
“왜요?” “국장님께서 이곳에 오신 후로
 ‘술만’ 잡숫는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파다하다는데요?”

“아, 알았어요.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세요.
술만 먹는 것이 아니라, 술도 먹고, 낚시도 하고 방송도
한다구요!”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성냄도 없었다.
장기범 아나운서의 그릇이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용서하는
넓은 마음이 있지만그의 고집은 유명해서 한번
 마음먹은 것은 꺾지 않으며, 옳다고 생각하면 생명을 걸고
해냈다. 유명한 아나운서, 중후한 인품의 아나운서였던  장기범 원장
(정년퇴임전에 가졌던 마지막 직함이 그러하였다. 방송연수원장의
뜻이다)은 재직중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결 혼식 주례
부탁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이유는 단 한가지. ‘
제가 인생에 대해서 뭘 압니까’ 였다
.
다만 60이 넘어서 인생이 뭔가를 알 때가 되면
그때는 주례를 서겠다고 했고 그말은 분명히 지켜졌다.
청접장에 이름을 인쇄해서 주례를 부탁하는 사랑하는
후배에게까지도 진정 사양했다.
“미안합니다.
제가요, 그 인쇄 비용을 대신 드리지요.”
결국은 주례를 서지 않았다.

장기범 아나운서의 고집은 업무에서
더욱 빛났다. 맡은 일에 목숨도 거는 숭고한
자세가 후진들에게 항상 용기를 주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다. 그날 아침 7시에 북괴남침 ‘
제1보’가 국방부 발표로 방송된 후 숨막히는 상황 속에
전황이 연일 보도됐고 남침 북괴군이 서울로 서울로
 밀고 들어와 급기야는 정동방송국에서도  6월
27일 자정에 공식적인 방송을 모두
종료했다 (한국방송공사 발행.
「한국 방송 60년사」).

6월 27일 밤 9시쯤, 벌써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서울을유선으로 연결하여 서울시민에게
 안정할 것을 호소했던막판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3시간 후인
 27일 밤 자정에 방송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그러나
방송이 종료되고 방송국 직원도 함께
철수해야 하는 마지막 긴박한 상황에서 젊은 아나운서
장기범은 겨우 1년 반의짧은 경력이었지만 혈기 있는  청년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정동방송국 연주소를  마지막 떠나는
28일 새벽에 행진곡 레코드판을 걸어 놓고 포성에 쫓겨
 방송국을 빠져 나왔다
 

 

(장기범 아나운서의 후일담 중에서).

그것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하에 있었던
젊음의 객기가 아니었다. 적의 포성에 하루하루
무너져 가는 나라를 향한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때를 증언해줄 사람은 없었다. 또 그것을
 원치도 않았다. 다만 어느날 술자리에서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지나가는 일상의 말처럼 했던 이야기였다. 하마터면
영영 묻혀 버릴 뻔했던 이야기였다.

후배들은 장기범 선배를 그래서 좋아한다.
 꾸밈없고 인정있고 강직하고 투철하고 너그럽고
소탈하고 명쾌하고그릇 큰 전인의 모습을 존경한다.
KBS에 한평생 몸담고 있었지만 후배 사랑에 어떠한 차별과
벽도 두지 않아서 민방의 아나운서 후배들도 두루 사랑했고
관심을 두었다. 방송을 듣고 말이 잘못됐으면 주저없이
전화를 걸어 칭찬 격려한 뒤에 고쳐주었다.

 



TV보다 라디오를 더 사랑했다.

빛나는 방송보다는 그늘진 방송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만나면 꼭 따사로운 말 한마디라도
잊지 않았다. 그런 장기범 아나운서에게 1980년의
방송통폐합은가장 큰 충격이었고 분노였다.

당시 부산방송국장이었던 장기범 아나운서는
통합 후 첫 크리스마스에 후배들이 그리워 서울로 올라왔다.
비통한 마음이었다. KBS 뿐만 아니라 통합된 전방송국의 간부급
아나운서들이 두루 모인 술자리를 스스로 마련했다. 암담한 마음,
답답한 심정으로 ‘민방의 유랑민들’을 위로하면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대의 상황이 가슴 아팠을 뿐이었다.

만취된 모습으로 밴드의 마이크를 잡고
목메어 울며「아리랑」을 합창하는 것으로 울분을
대신했다. 그러나 최후의 한마디는 매서웠다.
“이렇게 한지붕 아래, 어디 가나 아나운서! 그래

한지붕 아래,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 몹쓸 놈들아!”


그렇다! 항상 그러한 생각 그러한 행동으로 일관한
 34년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흔한 ‘이사’자리 ‘본부장’자리 하나
못했고 군부를 미워하고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광의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다. 아니다. ‘마련해주겠다’는
자리조차도 ‘박차버렸다’는 표현이 맞다.

1971년 아나운서면서 KBS 보도부장
(지금의 보도본부장역할)을담당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시키는 박대통령 지지 집회 인파수를그대로만 보도했어도
비단방석은  준비가 됐을 테지만  끝내소신을 지키다가
대구방송국장으로 좌천돼 버렸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방송국 앞 라이터  장수와 만나게 됐다.
그는 한점의 부끄러움이 없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참 언론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풍모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그것이 바로 명절 때가 되면 장기범아나운서댁은 댓돌과
현관에 신을 벗어 놓을 자리가 없이붐빈 이유며, 최초의 아나운서
협회장(協會葬)으로 지낸영결식에서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과
그를 두려워하던 사람들이함께 머리 숙여 오열하게
했던 힘이었으며, 무관(無冠)이었던 그를
하늘 높이 생각하게 한 까닭이었다.

 


 

1987년 깜짝 회갑연 그때 그 장면 한컷 왼쪽부터 장기범, 김영길, 원종관 아나운서.

 



우리 아나운서들은 아직도 1987년 4월 28일
(실제 생일은 5월 5일)에 후배들이 몰래 마련했던
장기범 아나운서 회갑연의 흥분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소리 없이 성금을 모았고 가족들에게도 친지들에게도 전혀
낌새를 못 채게 하고 가족들이 마련해 드릴 수 없는
흥분된 회갑연을 준비했다.

아나운서 후배들의 온 정성은 하나로 뭉쳤다.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한날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이 없었다. 4월 28일 저녁 7시의 그 가슴 벅찬
광경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숨죽이고 기립해 있던
수많은 후배들, 장기범 아나운서는 평소에 자주 약주를
대접하던 가까운 후배들의 손에 이끌려그저 술 한잔의
자리인 줄 알고 문에 들어섰다가 쏟아지는
박수에 넋을 잃어 버렸다.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1961년 송년특집 재치문답을 들으며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았고, 39년이나 아래인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원래 주호 소릴 들을 정도의
주량이었지만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받은 술잔으로 장기범 아나운서는
만취가 돼 버렸다. 후배들로서는 어려웠던 과거지사에 위로의 말씀을 드렸고,

선배로서는 바른길을 걷는 아나운서가 되라는 격려의 한마디를 내렸다. 그리고

슬픈 마당이 아니었기에 연회장이 떠나가도록 목청 돋구어 놀았다.

 

그날 주인 아주머니와 종업원들은 그 광경을

 구경하느라 술과 고기가 얼마쯤 들어갔는지 계산을 놓쳐

음식 값은 대충 치를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음가, 방송억양의

클래식이라고 일컬어지는 표준 억양, 대화의 목소리와 방송의

목소리가 합일되는 다사로운 음성은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가히 오랜 세월 방송의 교본이 돼 왔다.

 

 

 


한국의 유명한 아나운서 대부분이
장기범 아나운서를 ‘모델퍼슨’으로 삼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충청남도 서산이 고향은
변웅전 아나운서의 일화가 특히 재미 있어서 여기에
예로 소개해본다. 재치문답을 진행하던 장기범 아나운서가
청취자 엽서 당첨자를소개하는데, 그때 마침
 학생이었던 변웅전군의 엽서가 뽑혔다.

한방에서 퇴침을 베고 라디오를 듣던
 변웅전군의 부친께서 라디오에서 주소가 소개되는
순서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충청남도’ 소리에
 귀를 세우고, ‘서산군’소리에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서산읍’소리에
반쯤 일어나고,“변아무개씨(변웅전)가 당첨되었습니다”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는 이야기인데 그 순간의 멋진 아나운서
(물론 장기범)의목소리에 반해서 ‘나도 아나운서가
돼야 하겠다’ 고 한 것이 오늘날의 변웅전
 아나운서가 됐다는 것이다.

아나운서로서
언론인으로서 선비로서
은둔의 지사로서
인간으로서
 
전인의 모습을 보여준
장기범 아나운서,
 
그는 평생을 곁눈 한번 안 팔았지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앵두집 순딕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를
지독히 좋아했다. 「돌지 않는 풍차」의 사연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그 노래를
들으며  껄껄걸................한세상을
바람처럼 날려 보냈던 것이다.

타계한 날짜는 3월 18일이지만
아나운서 후배들은 5월 5일 탄생일에
 맞추어 추모제를 연다. 매년 5월 5일이면
김포군 월곶 장기범 아나운서 묘소에는
 추모의 향불이 피워질 것이다.

 

사우회의 KBS출신 국회의원 초청모임에서 이계진님
 

어너운서 출신 국회의원 이계진님은 

 아나운서 협회에 ”장기범상“ 기금으로 1억원을
출연해서 이 기금을 바탕으로 매년 우수한 해마다
아나운서를 선발 ”장기범상 “을 주고 있으며 2006부터
스스로 장기범님의 추모제행사를 주도 하고 있습니다.
이계진님이 직접 쓴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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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방송인 1

http://blog.daum.net/jc21th/17780156

 

영원한 방송인 2

http://blog.daum.net/jc21th/17780157

 

영원한 방송인 3

http://blog.daum.net/jc21th/17780158

 

장기범 선생님 추모 모임 회고 / 이계진 아나운서 (전 국회의원) 

http://blog.daum.net/jc21th/17781786

 

 

1965년 장기범 아나운서가 서울시 문화상을 받고 남산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직원들과 민영방송국 후배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이홍수 중앙방송국장을 비롯해서 송한규, 인주희, 배덕환, 박상진, 김정자,

이광재, 박종세, 최규락, 유병은, 이규항, 변정호, 정인식, 최계환,

전영우, 김동건 아나운서 등이 함께 했습니다. 남산 연주소 현관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