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영원한 방송인 장기범 ( 2 )

이장춘 2009. 8. 4. 03:28
 

 

  

  

 

 영원한 방송인 장기범 ( 2 )
 
장기범님의 선친은 인천 앞바다
지금의 옹진군 덕적도에서 사셨고  장기범님은
 1927년 5월 5일 지금의 인천 공항 부근 무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1948년 한희동, 황순덕 님과 함께  아나운서
공개 채용시험으로 들어오셨는데  처음부터 방송에는
 남다른 재질이 있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최고 인기프로그램이었던 스무고개
공개방송의 사회를 맡았습니다.
 

스무고개는 1947년 8월에
편성원 문제안님이  처음 제작하면서
윤용노님이 사회를 보시다가  인기 아나운서였던
 홍양보, 서명석님으로 이어졌고 장기범님이 입문한지
얼마 안 되어 사회를 맡아 6.25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장기범님이
입문한지 얼마 안 되어 6.25가 일어났는데 6.25는 님에게 시련이자
 기회 이었습니다.   6.25로 선배 아나운서인 홍양보, 민재호님등이
 VOA, VUNC로 자리를 옮기시고 윤용노, 전인국님 등이
납북 당하는 등 제반 여건은 님이 방송 전면에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6.25로 중단 되었던 스무고개를
1953년 다시 시작 하면서 장기범, 임택근님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얘기 나온길에
스무고개에 대해
 
노정팔님의 글로 좀더 알아보겠습니다.   

 


“문제도 아기자기 하고 재미있었다.
담당PD문시형은 출제에매우신경을 썼다.
단벌신사에 흙탕물, 주머니 속에 들어간 쌈짓돈,
입에붙은 표주박, 역사, 고전, 속담 같은 데서 인용하기도 하고
평소 잘 쓰이는 말 같은데서 따오는데 진행은 그냥 넘기지 않고
세태반영이나 사회고발을 하면서 유익하게 문제를 이끌어 갔다.
출연자와 PD문시형, 사회자 장기범,이 세기둥의
손발이 척척 맞아서 비로소 스무고개라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노정팔님의 글에서 인용 했습니다.

 


장기범님은  1955년에
새로 편성된 노래자랑과 61년부터
방송된  재치문답에서도 기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재치문답은  1961년 2월에 퀴즈올림픽에 이어
생긴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는데 그 때에는 잠시 다른 이름으로
 하다가 장기범님이 미국에서 돌아오신 후 10월부터
정식으로 “재치문답”이라고 해서 방송했습니다.

장기범님은 1956년 11월 호주 멜본에서
열린 올림픽 중계를 위해  임택근,   김성열님과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1948년, 1952년에 이어 세 번째로
가는 것이지만 전번 두 번은아나운서 한사람씩만
파견 하였으나  이번에는 아나운서 두 분과
엔지니어 한분이 가게 되어 방송의 질도
 좋아졌고 성과도 좋았습니다.
 
송순천이 권투에서 은메달을
따던 때이군요. 그때 학교 다닐 때인데
학교에서 스피카로 교내에 중계방송
해 주어서 들은적이 있습니다.

 



“장기범에게는 1957년에 들어서

한차례의 수난과 역경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뚜렸한 사유없는 해직 조치가 떨어졌습다.
어느 날  그는 출근길에  최승주님을   만났습니다. 
최승주님은
 장기범님보다 아나운서 1년 후배지만 윤길구님에 이어
 먼저 아나운서실장이 되었습니다.
 
그 최승주 실장이 어느날 장기범 아나운서를
만나 "자네 나갈 것 없네"하고 장기범을 대포집으로
 끌고가 감원대상이 된 것을 통보한것입니다. 백두진 (白斗鎭) 
총리시절 공무원 수를 줄여 그 재원으로 보수를
개선하겠다는  정책을 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나운서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장기범님과 임택근님이었습니다.
장기범은 월간 연예지 "희망사" 편집실에서 상흔을  달랬고,
임택근님은 중단했던 면학에 정진하다가
한달 만에 컴백 되었습니다.
 
 장기범님은 1년 후배인 최승주실장이
1957년 6월 24일 심장마비로 숨지자,
얼마 후에
방송계장(아나운서실장)이 되어 다시 방송국에
돌아왔고 그 이래 정년퇴직 할 때까지
한길을 걸었습니다.
 
장기범님 해직관련 내용은
KBS 아나운서 출신 김성호교수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1957년 아나운서 실장으로 부임하는 등
한참그 명성이 자자할 때 1958년 방송문화상 제도가
생겼고  첫 번째 보도부문상은 장기범님이 받으셨습니다.
당시 방송문화상은 방송계에서즌 가장 권위있는 
상이었고  이 상을 받는것은  것은 
 큰 영광 이었습니다.
 
방송현업뿐만 아니라 방송학자나
평론가등 방송관련 모든 인사를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해서 수상자를 결정했습니다.
1965년에는 서울시 문화상도 받으셨습니다.
 
다음회에서 더 쓰겠습니다.
 

 

 

 

 

장기범 선생님 관련 글 더 보기

 

 

영원한 방송인 1

http://blog.daum.net/jc21th/17780156

 

영원한 방송인 2

http://blog.daum.net/jc21th/17780157

 

영원한 방송인 3

http://blog.daum.net/jc21th/17780158

 

장기범 아나운서를 아십니까? / 그때의 국회의원 이계진님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3

 

한시대를 풍미한 장기범 / 당시 방우회장, 문시형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0

 

 

장기범 선생님 VOA생활 / 이세진 아나운서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2

 

 

장기범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재치문답

http://blog.daum.net/jc21th/17780187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18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159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22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452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24주년의 날에

http://blog.daum.net/jc21th/17781238

 

장기범선생님 삶과 가신지 25주년 추모모임

http://blog.daum.net/jc21th/17781725

 

 

 

 

1957년 장기범님과 아나운서 들의 모습
앞줄 오른쪽분이 장기범님.뒷줄 왼쪽부터 박종세,
이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님이시고
앞줄 왼쪽부터 송영필, 장금자, 이현숙, 윤영중, 송석두, 최세훈,
김인숙, 황우겸, 강영숙, 민병연, 장기범님입니다.
 

 피난시절(1952년)장기범님과 아나운서들의 모습
뒷줄 오른쪽분이 장기범님입니다. 뒷줄 오른쪽부터
 장기범, 양재현, 윤길구, 송영호, 이수열, 한희동, 임택근
앞줄 왼쪽부터 황우겸, 김경자, 박인자.서명석,
최창숙, 김순철, 정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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