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6.25 한국전쟁의 세계 최초 해상 이동방송국

이장춘 2009. 6. 17. 05:00

 

 

 

 
 
  6.25 한국전쟁의 세계 최초 해상 이동방송국

 

 
 
한국전쟁은 방송사상 그 유례가 없는
해상 이동방송을 탄생시켰다.  피난을 위해
해군함정에  싫은  방송기기를  활용, 방송을 실시하자
 이것이 바로 바다위를  떠 다니는 해상 이동방송이고
서.  남해안은 물론 인천상륙 작전에까지  참여해서
 큰 공을 세웠다.  해상 이동방송은 1. 4후퇴로
육지의 방송이 어려워 지면서 장기간
실시하게 되었다.
 

 

 

 

 

 

6.25남침으로 북한군이 물밀듯이 밀려와
선이  우리나라 서남해의 끝 목포까지 이르자

목포방송국은  막다른 상황이 되었다. 급하게 된 목포방송국  

한영희는 평소에 방송국과 인연이 있던 해군의 협조를 얻어 어렵기는

 했지만  해군 514호 소해정에 50W송신기를 포함한 주요 방송기기를 실을 수

 있었다. 방송기기를 배에 실코보니 기기를 놀리는 것 보다는 배에서도 방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6.25기간중

해안과 섬지역에서 소식에 목말라 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함상의 군인들과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용기를 불러 넣어준 해상 이동방송이었다.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목포방송국이 해군함정에 방송기기를 싫고

피난길에 오른것은  7월 23일 이다. 처음에는 목포를

출발해서 제주도로 가려고 했지만 아군의 오인으로 배가

총격을 받아 부득이 부산으로 가서 수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목포방송국장 직무를 수행하던 기술과장 이태구님이 부산에

가있던 터라 그곳에서 배를 수리하는동안 해군함정에 실은 방송기기를

활용해서 해상방송을 하는데 대해 해군사령부와 절충한 결과 정극모 해군

사령관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다짐받고 해상방송에 나셨다. 이때가 

1950년  8월 10일의 일로 이로부터 부산을 떠진해, 제주, 대흑산도,

어청도, 덕적도 등지를 돌면서 미국의 소리방송, 유엔군

총사령부방송 등을 중계방송하면서 적진깊숙이

까지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1차방송을 9월8일에 마치고
9월 12일부터는 인천상륙작전 현장에

가서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 등 3차까지

 63일간의 이동방송을 실시했다. 이 해상 이동방송이

때로는 그 지역 로칼 방송이나 노래자랑 등을 실시해서 

방송이 지역주민과 밀착하는 효과도 가져 왔고

이때까지 방송이 무었인지도 모르던 분들에게

방송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다가
대구방송 시절부터 중앙방송에 합류해서
아나운서로는 유일하게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한 
전성병은 해상 이동방송선을 타고 인천에 상륙해서
 방송 선발대로  서울에  들어 갔다고 했다.
 
 
 
 
1. 4후퇴로 방송사정이 어려워진
중앙방송국은 목포방송국의 해상방송 경험을 토대로

해운공사 소속의 목선 400톤급 경인호를 마련해서  Bc-610 300W

송신기를 싫고 안테나와 아스장치를 했다. 1차로 2월 하순부터 충무, 여수,

임자도, 서해안의 군산, 덕적도, 인천 등지를 돌면서  부산에서 송출하는

단파방송을 중계하고 때때로 노래자랑이나 뉴스 등의 자체방송도 했고

가두방송도 했다. 또 돌아오는 길에는 대모도, 우리 나라 최남단의

어업전진기지 나로도등을 들려 주민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이때

참여한 방송대의 구성원으로는 대장에 김석모를 비롯해서

김원용, 김선영, 김호석, 강익수, 이영기, 최요안,

홍일범, 김창학, 유해룡, 함무영,

 최병호, 이경재등이었다.

 
 
1차방송이 3월말에 끝나고 7월
초부터 2차 이동방송대가 다시 출항했다.
이때는 거제도, 장승포를 비롯해서 육지로 목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산을 들려 8월 초에 돌아왔다. 이때

참여한 방송인으로는 대장에 신경석을 비롯해서 김석모,

김원용, 윤헌영, 김성열(그때 김성열 함자 가진분이

두분이었음), 공승규, 양현문 등이었다.


 
 
해상이동방송에 직접 참여하셨던
원로방송인 유해룡님의  얘기를 옮깁니다.
유해룡님은  2010년 95세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Bc-610송신기 300W 출력이면 전파방해가
없던 시절이라청취 가능 지역이 넓었습니다.  특히

라디오 보급이 안 되었던 시절에  확성기를 통해 실시한

방송효과는 컸습니다. 방송선이 육지 가까운곳으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손을 흔들며 환호했고 공개방송을
 할 때면 그 부근 사람들이 모두 나와 참여하면서
 흥겨워했습니다.  대부분 방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방송을 실시하는 동안 바람이
심해 배가 흔들리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배 멀미로 시달리기도 했으며 음식, 잠자리등이
맞지않아 고생도 많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방송전파를 보내며 방송 사명을 
다 하던 때였습니다.
 

 

 

 

 

2015년 9월 15일 이장춘의 방송역사해설 젼장에서 본 해상이동방송 (서울역 역사문화관)

 

 

해상이동방송관 

 

 

1950년 7월 23일. 목포 방송국원 이었던

기술차석 한영희씨는 북한군이 목포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알고 지낸 해군의 도움을 받아 작은 해정인

해군 514호에 급히 중요한 방송장비들을 옮겼. 그  러고 보니

 바로 그 배가 방송국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해상을 돌며 방송을

 시작했고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1951년 1.4후퇴를 맞아 이때는

지난날의 행상이동방송의 경험을 살려 해상이동방송선을 마련해서

 본격적으로 이동방송을 실시했다 자세한 얘기는 춘하추동방송

글을 연결했다. 해상이동방송 관련 보도내용이 실린

 1950. 9. 26 민주신보 기사를 올렸다.

 

 

  

   

 

 

 

해상이동방송 관련 보도내용 1950. 9. 26 민주신보

 

 

괴뢰군 궤멸 전야에 직면한

 공보처 방송국에서는 해상 이동방송을

인천 덕적도까지 진출시켜 적전방송을 감행하고

 있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또다시 9월15일 우리

 연합해병대의 역사적인 상륙작전에 참가한 이동방송선은 인천만에

 자리를 잡고 진격을 계속하고 있는 연합해병대의 용진의 모습을 계속

보도하여 지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즉 동 이동방송선은 9월16일

이른 아침 그의 위용을 인천부두에 나타내자 즉시 맥아-더 총사령부 방송

 미국의 소리방송, UN 방송 등을 중계하는 한편 중앙방송국의 중요한

 방송도 중계했는데이로써 인천 시내는 물론 서울 시내에서도

넉넉히 동 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고 한다.

 

이 밖에도 서해안의 어청도, 대흑산도

그리고 영흥도 등 해안 일대에서 점령 지구을

향하여 우리방송을 중계해서 이 방면의 양민들에게

다대한 감명을 주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부단히 이 방면을

항행하며 이동방송을 계속하리라고 하는데 괴뢰군 점령지대의

양민들은 동 이동방송선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연합군 인천 상륙작전의 모습을 직접 목도한 동 이동방송

책임자 이태구 씨는 그의 감격담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는 영웅적인 연합군 장병들의

 인천 상륙작전을 해상에서 바라보며 저윽히

 마음 든든한바 있었다. 연합군 환영탑을 세우고

피란민들도 속속 귀환하는 것을 보고 무한히 감격하였다.

더욱이 정확한 소식에 굶주렸던 경인지방의 동포들이 우리

 이동해상방송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니 우리들도 백배의

용기를 얻었다. 앞으로도 이 해상이동방송을

통하여 괴뢰군 섬멸에 이바지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