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중 부산 피난지에서의 방송인들 생활상
노정팔님 글
부산 피난시절 대청동 방송국 구내에는
사택이 두세 채 있었으나 여기는 노창성국장과
이규일, 한기선, 과장이 차지하고 나머지 좁은 공간에
윤길구 아나운서, 문시형 PD가 끼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구내 가까운 공지에 판잣집이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만 이혜경씨 부부도 이 근처 판잣집에서
신혼의 달콤한 생활을 보냈다,
위 사진은 1952년 4월 방송국 앞뜰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방송국 주변은 모두 판자집으로 둘러 싸여 있지만 이것은 호텔이었고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천막이나 움막에서 살았습니다. 위 사진에 나온 방송인들은
앞줄 가운데 송영호 방송과장을 비롯해서 오른쪽의 노천명, 강찬선, 그리고
강익수, 이상송, 뒷편의 강익수 아나운서와 이상만, 안병원,
공승규, 조규택, 조백봉님등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방송국 주변도 모두 판잣집이어서
방송국마당에서 점잖게 사진을 찍어도 그 배경에는
판잣집들이 즐비하게 보입니다. 그래도 이런판자집은 호텔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오고 갈대 없는 피난민들이 많았고 천막이나
움막같은 집에서 살던 사람들도 많았니다.
그밖에 대연동 수신소 자리에
사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김서봉 편성계장과
기술자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밖의 PD, 기자, 아나운서,
기술자, 업무 요원들은 지하 숙직실 좁은 방 한쪽에 남자들
30여명이 웅크리고 새우잠을 잤고다른 한쪽 방에는
여자들 10여명이같은 형태로 지냈다.
아침에 출근해 보면 스튜디오는 물론
사무실 책상에 마구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래서 슬리핑이라도 하나 얻으면 그것은 고급호텔의 침대라고
자랑했다. 옷은 사시사철 군복을 착용했다. 군인 외에는 군복 착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한쪽 어깨 밑 팔에 HLKA RADIO 라는
마크를달고 다니면 단속반도 눈감아 주었다.
군복을 입고 방송에 임하는 방송인들입니다.
위는 부산 피난시절에 들어온 임택근 아나운서와
강찬선 아나운서이고 아래는 UN군 사령관 뱉프리트 장군과
인터뷰아는 서명석 아나운서와 진백림 앤지니어입니다,
그런데 군복조차 제대로 없어
여름에 겨울복장을 하는 수가 있었다.
윤길구 아나운서 같은 사람은 유엔 점퍼라고 불리는
점퍼 한 벌로 여름까지 견뎌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식대로 살면서 호걸풍으로 허허 하면서 지냈다. 돈이
생기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고 돈이 떨어지면
소금을반찬으로 샀으며 세상 사는 게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술은 매우 좋아해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밤새 40계단 아래로 내려가 주거니 밧거니 하면서
소주를 들이켰다. 새로 들어온 이호원씨와 죽이 맞아 문학얘기,
시골얘기, 전쟁얘기를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얘기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 중에서도 스튜디오에서 자는 것은문제가 많았다. 언젠가 일요일 아침
미국선교사 마스배커씨가 종교시간 방송을 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스튜디오에 나와 보니 방송연주실이 아니고 침실이었다.
아직도 담요 속에서 고이 잠든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지만 몰래 들아가
방송을 하고 나왔다.
어떤 아나운서는 스튜디오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방송 개시시간이 되는 줄도 몰랐다.
기술자가 와 야단을 쳐 잠을 깨기는 했으나 이미 시간은
다 되어 옷을 챙겨 입을 시간이 없었다. 팬티바람으로 마이크 앞에
앉았다. 얼떨결에 말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겨우 방송을
마치고 나니 옷도 안 입었는데 땀이 홍건 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텔레비전 시대라면어떤 광경이 벌어 졌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학교도 어려운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초등교육은 부산 피난 초등학교를 설치하여 피난 온
학생들을 그럭저럭 가르쳤지만 중고교나 대학은 교사를
구하기가 어려워 임시변통으로 창고나 임시막사 같은 허름한 곳을
임시로구하여 썼고 그것도 어려우면 천막을 치고 교육을 시켰다.
그러니 강의같은것은 그런대로 진행됐지만 실습실험이나
실기훈련같은것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였다.
문인화가중 예술가들은 광복동이나
남포동 다방을 연락처로 삼고 여기 모여서 각자의
세계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면서 서울 수복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비단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가 교수, 공무원,
일반인들이 나갈만한 사무실이 마땅치 않을때는 의례히
다방으로 모였다. 이렇게 다방출입이 너무잦자
정부는 공무원의 다방출입을 금했다.
그리고 암행감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방송국 PD들이 여기 적발되어 진계를
받게 되었다.방송국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방송국일이 다방을 빼고는 아루어질 수 없었다. 연락은 물론 취재,
원고청탁디나 원고를 받아오는 일이 모두 다방으로 가지 않으면
이루워지지 않았다. 이런 실정도 모르고 일율적으로
단속하는 당국이 불만스러웠다.
이리하여 생각 해잰것이 다방출입 단속령을 내린
장택상 국무총리를 인터뷰하는 일이었다. 마침 섭외가 잘
진행되어 인터뷰를 마치고 방송국의 실정을 그대로 얘기했다.
그제서야 총리는 수긍이 가는지 방송국에는 다방 출입증을
내주도록 하는 한편 징계도 취소하도록 했다.
먹는 것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봉급생활자들이 월급이 그야말로 쥐꼬리만 하니
그때그때 끼니를 어떻게 채우느냐가 당면한 과제였다. 방송국
사람들은 싸고 배부른 음식을 어디가면 구할 수있을까 하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비고 다녀 보았지만 싸면서 맛있는 음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영양보다는 우선 배에 만족을 주어야하니 비지나 국수 같은 것을
찾는 일이 많았다. 가끔 부대에서 나오는 고기 맛이 풍기는
국물에 밥을 마라먹을 수 있으면 성찬이었다.
---중 략 ---
그러다가 1952년부터 공무원에게 식량배급이
나왔다.방송국에도 식량 비급이 있었다. 이것은 오랜
가뭄에단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보다도 반가운 일이었다.
가족 가진 사람들은 이것으로 식량걱정을덜었어도 독신자들을
이것을 팔아서그 동안의 궁상을 덜었다. 심지어 애지중지 하던 귀한
소장품까지들고 나가 팔아 빈대떡집을 찾아가 고달픔을 잊으려 했던
시기였으니까 이때의 식량 배급은실로 천사의 선물 같은 것이
었다. 식량배급은환도 후 까지 오래 계속되어 봉급
생활자들의 주름살을 펴 준 좋은 제도였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에 여러세대의 피난민이 살았습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 피난시절 방송국과 생활을 같이한
노천명님이 엔지니어 이중집님과 같이 한 사진입니다.
영도다리 입니다
대청동 방송국에서는 부산항이 보였고 벌거벗은 영도가 보였습니다.
부산피난시절 아나운서 뒷줄 왼쪽부터 강찬선, 강익수, 양제현, 양대석, 윤길구,
이수열, 임택근, 한희동, 앞 세분 왼쪽부터 최창숙, 김순철, 정순형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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