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피난 중앙방송국과 인천상륙작전
7월 초부터 UN군이 한국전에 참여했지만
8월까지도 전세는 계속 불리하기만 했고 최후의 보루라던
낙동강 전투에서도 안심 할것은 못되었다. 만약에 대비해서 제주에 긴급히 방송국을 설치하기로 해서 8월 7일부터 승선, 모든것이 여의치 않던 전쟁기간이라 제주에 도착한것은 8월 14일이었다. 8월 중순 방송국은 부산으로
옮겼다. 이때의 부산방송시절은 1. 4후퇴로 오랜기간을 머무를 때와는 달리 그리 길지는 안했다. 이 무렵부터 전세가 호전되고 9월 15일부터 시작된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이 눈앞에 보이면서 이종훈, 권오진, 송광조님 등으로 구성된 중앙방송국의 방송 선발대가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해서 UN군을 따라 9,28수복과 더불어 서울에 입성했다.
이때의 얘기를 아나운서로서는
유일하게 방송선발대에 참여한 전성병
아나운서의 글을 옮긴다. 이 글은
춘천방송 60년사에 있다.
9월 중순에 이르면서 전세는 호전되어
북한군은 밀려나고 국군은 북으로 진격하여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9월 22일 중앙방송국장이 나를 불러
서울이 탈환되면 서울에서도 방송을 내 보내야 시민들과
국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사들과 함께 선발대로 가라고 지시했다.
아직도 살벌하고 어수선한 서울의
싸움터에 간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였지만
선발대장이 이종훈씨여서 힘이 되었다. 이종훈과장
은 춘천 동향인이고친분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선발대는 부산항에서 군의 수송선인
LST에 기자재를 싫고 출발 했는데 공보처장
김활란 박사와 방송국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부두까지 나와 환송 해 주었다.
9월 25일 인천앞바다 멀리에
정박하였는데 방송요원이 탄 선박 가까이에
있는 군함들이 북한군에게 수시로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한밤중의 포격은 번적이는 섬광이 바다를 작열하게
비추어 함포사격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함포사격과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목격한 방송요원은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의 뒤를 쫒아 서울에 입성,
9.28서울수복의 선발대로 서울 땅을
밟은 영광을 얻었다.
선발요원은 인원도 적을 뿐 아니라
아나운서도 나 하나뿐이어서 방송기능은
한계가 있었다. 간단한 보도와 음악이 방송활동의
전부였다. 중앙방송국이 서울에 복귀 했다는
상징성을 담고 있어 선발대의 방송활동은
서울시민에게 큰 위안을 준 것으로
일컬어 졌다.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14. Landing craft loaded with Marines head for the smoking beach in invasion of Inchon,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해병대를 태운 상륙정이 인천 해변으로 향하고 있다
15. Invasion of Ichon, Korea. Four LST's unload men and equipment on beach.
Three of the LST's shown are LST-611, LST-745, and LST-715.
September 15, 1950. C.K. Rose. (Navy)
4척의 상륙정으로부터 병력과 장비가 내려지고 있다
16. Carrying scaling ladders, U.S. Marines in landing crafts head for the seawall at Inchon.
September 15, 1950. S.Sgt. W. W. Frank. (Marine Corps)
사다리를 싣고 인천 상륙을 위해 상륙정에 승선한 해병들
18. As against "The Shores of Tripoli" in the Marine Hymn,
Leathernecks use scaling ladders to storm ashore at Inchon in amphibious invasion
September 15, 1950. The attack was so swift that casualties were surprisingly low.
S.Sgt. W.W. Frank. (Marine Corps)
해병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인천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이 공격은 신속했으며 부상자는 놀랄 정도로 적었다
19. Brig. Gen. Courtney Whitney; Gen. Douglas MacArthur,
Commander in Chief of U.N. Forces; and Maj. Gen. Edward M.
Almond observe the shelling of Inchon from the U.S.S. Mt. McKinley,
September 15, 1950. Nutter (Army)
상륙 작전중 인천 해안을 살피는 맥아더 사령관
23. Troops of the 31st Inf. Regt. land at Inchon Harbor, Korea, aboard LST's.
September 18, 1950. Hunkins. (Army)
31연대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17. Leathernecks lead patrol between destroyed buildings
in "mop-up" of Wolmi Island, gateway to Inchon.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인천의 관문인 을미도에서 북한군을 소탕 중인 해병대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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