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노라노가 쓴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

이장춘 2009. 5. 11. 18:18

 

 

 

노라노가 쓴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

 

 

 여기에 수록된 사진은 우리나라 최초

방송인 노창성, 이옥경선생님과 노라노 여사가 대를 이어

오랜기간 소중하게 간직해오신 것으로 방송사적으로 훌륭한 의미를

지닌 사료들입니다.       아울러 노창성, 이옥경의  둘째딸 노라노

(본명 노명자) 여사가  직접 집필하신 이 글과 함께 우리나라

 방송초기를 이해하는데  기초사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올해   82세인   노라노 여사는  우리나라  최 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노라노 여사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들 어 가 는  말

 

나의 어머니 이 옥경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이다. 어머니가 첫 방송을 시작한지는

 벌써 80년이 넘었고 세상을 떠나신지 만 27년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방송 역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어머니 이 옥경 여사의

 이름이 오르고 KBS 아나운서실에는 최초의 아나운서로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다. 어머니는 82세로 1982년 별세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돌아가신 해까지 매년 방송의 날이

 되면 반드시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특별

TV 방송에 출연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의 첫 방송은

1926년 7월 아직 정식으로 방송이 시작되기 전

시험방송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거의 없을 적이다. 모친의 활동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특히 길에서 방송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면 길 가던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모친은 1928년 둘째 딸인 내 (노라노)가

태어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 린  시 절  

 

 어머니는 1901년 9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머니의 부친(李學仁), 나의 외조부님은 구한말 과거에

 급제했고 영어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늘 외조모 말씀이 “너의 외조부는 천주학을 하느라

부모님의 감시를 받아 담을 넘어 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혹시 천주교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학인 외조부님은 일찍이 정삼품(正三品) 벼슬을 하시고

 황태자 영어 교사를 지냈다.

 

어머니가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인천세관장으로 임명돼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방이 되자 외조부는 미국

망명길에 올라 상해(上海)로 가려고 만주 안동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서 영국인 친구를 만나 영국 세관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만주에 머물게 됐다.

 

 

  학 창  시 절  

 

 어머니는 만주에서 그곳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학교로 갈 나이가 되자 외조부께서는

 어머니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시기로 결정했다.  만주에서는 아직

여자 중학교가 없어 고민 끝에 결정 한 것이다. 아들이 없는 외조부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남복을 입혀 키웠다.   “여자라고 학업을 계속

못할 이유가 없지.” 하시며 “일본까지 가서 일본 공부를 하는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쩌겠냐.” 하시며 한숨을 내 쉬신 것을

어머니는 감명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큐슈 뱃부에 있는 미션 스쿨에

입학 해 학업을 계속하게 됐다. 일본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조회에서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사먹은 적이 없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까 

전교생 중 어머니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어머니의 자랑거리가 있다.

아침 조회에서 미국인 교장이 이 옥경 학생 부친의

편지라며 영문 편지를 낭독하시고 이런 명문은 일찍이

 접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16살 되시던 해 여름방학을

지내러 만주 부모님을 방문 중이던 때 저의 외조부께서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37세에 미망인이 된

외조모께서는 만주에서 눈물로 외조부의 유골을 안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외조부님의 별세 후 양복 70여벌이 남겨 졌고

우표수집 하신 것이 꽤 많았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외조모께서는 그 우표를 관에 넣어 시신과

 같이 태웠다고 한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신 것이니

 같이 가져가세요.” 라고 시간이 지나가며 외조모는 슬픔과 외로움에

견디지 못해 일어를 하는 사람을 사서 데리고 뱃부에 어머니를 찾아 갔다.

학교에 사정을 말하고 어머니를 대동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에는 아직 여자 중학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 끝에

일본인 여학교 인천고녀를 찾았으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시절이니 아무도 조선인 여학생의

사정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학교 교문 앞에서

교장선생님을 기다려 사정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교장 선생님은 어머니를 데리고 학교에 들어가 시험을 치자고 했다.

이렇게 입학을 하게 된 인천여고가 금년 100주년을 맞아 행사를 했다.

 어머니는 인천여고 재학 중 늘 일등을 했고 외조모 말씀을 빌리자면

학기말이 되면 졸업식에 지게꾼을 데리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상품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공부뿐만 아니라 명문에 명필,

리고 마라톤 대표, 전교 테니스 선수, 압록강에서

연마한 아이스 스케이팅 선수 등 노래만 빼고는 모든 분야에서

특출 했었다. 졸업 하던 해 일본신문에서 어머니를

‘꽃 중의 꽃’ 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결혼을 하던 때 얘기 

 

어머니는 여고졸업을 앞두고

도쿄 의과대학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무렵 경성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던 옆집 일본인

청년의 혼담이 들어 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결혼이란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었다. 청년 부모님의 절대 반대로

청년은 속병을 앓고 일 년 휴학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청년 부모님은 결혼을 허락했고 약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때 인천의 한 조선인 일본 유학생이

사각 모자에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이 청년은 어머니와

만주에서 같은 소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이었다. 어머니는 소학교 시절

조선 이름을 가진 남학생이 행사 때면 늘 앞에서 교기를 들고 걷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이 학생을 존경했고 남학생은

미모의 조선 여학생을 마음속에 새겨서 반드시 성공해서

저 여학생과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도쿄 의과대학으로

이 청년은 구라마에 공업대학으로 진학 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그 청년이 인천으로 어머니를 찾아 온 것이다.

청년이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 만주 소학교 교지에 실린

어머니의 글을 읽고 주소를 알게 된 것이다.

 

청년의 멋진 모습에 어머니의 마음이 움직였고

더구나 홀어머니를 모셔야 할 처지라 역시 조선 청년하고

결혼을 해야 옳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 청년의 이름은 노창성(盧昌成)

 나의 아버지다. 일찍이 마음에 품고 일방적인 사랑을 해 오던 일본 청년은

후에 아버지를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은 조선인 나는 일본인

 우리의 싸움은 시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당신이 ‘리상’을

불행하게 한다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라고 했다. 그 후 해방 직전 나의 아버지가 곤경에

처했을 적에 이 청년(마쓰오가 박사)은 

큰 도움을 주었다.

 

 

 

 방 송 국  시 절

 

 1924년 초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을 세운다는

계획이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총독부 관비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총독부 체신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학교 선배이자

직장 선배가 되는 시노하라(蓧原昌三)씨의 추천으로

조선에 방송국을 설립하는 일을 같이 하게 됐다.

 

1924년 초 우리나라 보다 한발 앞서

일본에서는 방송국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견학을 하고 시험방송에

필요한 기계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그 해 11월에는

시험방송이 준비돼 체신국 안에서 보도진들과

관리들이 모여 시험방송을 했다.

 

 12월 9일 드디어 일반인들이 보는 가운데

처음으로 시험방송을 하게 됐다. 당시에는 아나운서라는

 직업도 없었고 하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남자 직원들이

 돌아가며 아나운서 역할을 했었다.

 

아버지 노창성은 여성 목소리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사람을 구했으나 일어도 겸할

여성이란 찾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 이옥경에게

화살이 꽂혔다.  1927년 2월 16일 

1시부터 개국식이 열렸다.

 

  

개국 사회는 경성일보에서 온 방송주임

‘마쓰나가’ 라는 분과 어머니 이옥경이 번갈아서 진행 했다.

이렇게 이옥경 여사는 이 땅에서 처음 정규 방송을 하는 날 첫 전파를

 내보내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방송시간은 매일 밤 2시간 30분이었다.

 사람들은 사람 목소리가 공중에서 날아 온다며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고

 특히 부드러운 여성의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정동

방송국으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새로이  아나운서라는  여성 직업이  탄생했고

당시로는 가장 인기 직업으로 꼽혔었다.

 

 

 한국말과 일본말  

 

방송은 두 시간 반 아나운서의 교체가 없이

 계속 되었고 언어는 일어, 조선어 두 가지로 방송을 하게 됐다.

당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재청제도였다고 한다.

 

프로가 재미있으면 청취자가 전화나

그 밖의 수단으로 재청을 요구해 온다. 방송국에서는

그럴 때마다 큰 성공으로 여기며 미리 준비된 프로가

 없을 때에는 즉석에서 다시 방송을 하곤 했다. 물론

그 동안 10분쯤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

영업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방송국으로서는

희망적으로 생각됐던 것이다. 라디오를 팔고 청취료를

걷던 일은 당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 정  생 활

  

가정 살림은 어머니의 모친이신

 나의 외할머니가 돌봐왔으나 둘째(노라노)가 생기면서

 직장을 접기로 결정했다. 방송국도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계동에

멋진 양옥집을 짓고 임시 살던 내수동에서 이사를 했다.

 

계동에는 주로 한옥이었고 우리 집이

양옥으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안다.

우리들 9남매는 여기서 자랐고 이 집은 부모님의

보금자리이며 우리 형제에게는 많은 추억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린 색 2층 옥상에는 베란다가 있었고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우리는 여름 주말 식사를

늘 이 베란다에서 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손수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우리들이 가장 즐기든 메뉴는 아버지의 스끼야끼였으며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입을 열어봐라 하고 고기를 직접 입에

넣어 주었다. “참으로 귀여운 새 새끼들 갔구나.”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집 문 앞에는 계단이 있고 입구에는

 아코디언 철문이 동네 화제꺼리였다. 앞마당에는

자그만 연못이 있고 잘 가꿔진 나무들 그리고 내방 바로 밖에

 있었던 포도나무가 생각난다. 그 후 바로 뒷집에는 이조 19대

효종의 형이기도 한 소현세자 후손들이 집을 짓고 이사를 와

살게 되고 아랫집은 당시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여운형씨,

뒤 언덕 밑 지금 현대사옥 자리인 뒷집에는 민대감이

살았고 아침마다 언덕을 산책하던 민대감의

고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골목 위로는 후에 조선은행 총재,

일제시대 자작, 그리고 또 다른 민대감, 당시 일본에서

 돌아와 이름을 날리던 성악가 마금희 여사 등등 이름 있는 분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해방 후 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4남 5녀로

식구가 불어서 일제말기에는 식량난으로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했다. 어머니 비로드 치마가

물물 교환의 주 품목이었다.

 

  

 아버지 노창성에 관한 얘기 

 

아버지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다행이 만주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일본인 여사장의

 구원을 받아 만주에서 학업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됐다.

 

우수한 성적으로 구라마의 공업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총독부에 취직이 되어  체신부 소속으로

 방송 기술과 시설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12월 처음 시험방송을

 할 때만 해도 여기에 참여한 한구인은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

뿐이었다. 시험방송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한덕봉씨가 

기술자로 참여했고,     후에  방송 제작 연출가로

최승일씨(무용가 최승희씨 오빠)가 합류했다.

 

어머니(이옥경)가 아나운서로 취직 했고

 뒤를 이어 마현정씨가 개국을 한달여 앞두고 합류했다.

방송 구상 단계부터 시험방송, 개국까지 일본인 시노하라씨와

나의 아버지 두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기계를 사다가 설치하고

 그리고 방송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세워가며 방송국 살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26년 문을 열려던 방송국은 그해 말

일본천황이 세상을 뜨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소

미루어져 1927년 2월 16일에서야 개국을 할 수 있었다.

방송은 우여곡절 끝에 시작 됐으나 방송국을

 운영하는 재정적 뒷받침이 문제였다.

 

라디오 청취료로 방송국을 운영해야 하는데

 당시 라디오 대수가 통틀어 2,000대에도 못 미쳤었다.

 아버지는 기술부에서 총무부로 발령이 나서 라디오 보급 업무를

맡게 됐다. 미국제 좋은 라디오는 한 대에 쌀 50가마니 값을

더 주어야 하는 때라 일반 사람에게는 라디오를

소지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때였다.

 

아버지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서

우선 라디오 강습회를 주기적으로 열어서 라디오를

 싸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한쪽으로는 라디오 상을

열게 해서 라디오를 싼값으로 보급이 되도록 힘을 썼다.

아버지는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 제도를 착안했고

오늘날의 AS 애프터서비스 제도를 마련했다.

 

 필요한 곳을 돌아다니며 고장 수리나

안테나 설치 등 라디오 상담소를 설치해 많은 효과를

보게 됐다. 그러나 라디오 보급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는 방송을 일본인 위주로 해서 보급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이 조선어 방송 채널을 마련 해 조선방송협회가

 발족했다. 회장 직속으로 사업부가 생기면서 아버지

노창성은 사업부장으로 임명됐다.

 

그 후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방송국 재정이 많이 좋아져 방송 제작비 걱정은

끝이 났다. 정동에 있는 경성방송국 옆에 따로 방송협회

건물이 섰고 연구소와 사무실을 분리해서 쓰게 되고 또 명동

증권 거래소에 있던 사업부도 새 협회 건물에 합치는 등

 모든 것이 정리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938년 5월 아버지는 함흥 방송국장으로

 발령이 나 함흥에 방송국을 새로이 설치하러 함흥으로

 떠났다. 사업부장이 방송국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으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방송국장으로

 임명된 조선인은 그 후 김학만씨 한 분 뿐이었다.

 일 년 남짓 후 조선어 전담부서로 제2 방송부가 생기면서

다시 아버지를 본부로 불러들여 제2 방송부장으로 임명했다.

 아버지는 2차 대전 중에도 조선말이 위축되지 않도록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여 고문으로 앉히고 반일운동으로

직장을 잃은 그들을 보호하며 민족문화

계승에 힘을 기울였다.

 

정비석, 백철, 한운사 모윤숙 여사 등이다.

러나 2차 대전이 말기로 치닫고 있던 무렵 방송국의

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단파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단파 방송으로 내외 연락운동을 하던 독립지사들이 검거됐다.

1943년 일 년 동안 관련자들이 끌려가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방송국 직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라디오 상회 기술자들 허헌, 송남헌, 홍익범 등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고 56명이

형을 받았으며 6명이 옥중에서 사망했다.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抗日短波放送 海內外 連絡運動) 이란 미국의

 VOA, 중국 중경의 단파 방송을 듣고 해외 소식에 어둡던

국내 애국지사들을 비롯해서 뜻있는 사람들에게 해외 소식을

전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 독립 운동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 된다. 당시 직원으로 근무하던 모윤숙 여사(시인이자

제2방송부 편성원)도 투옥 됐는데 아버지의 

노력으로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모여사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나를 보시고

 “그래 노국장이 감옥으로 나를 풀어주러 밤늦게 오셨었지.”

하며 옛날을 회상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이 사건으로 제2 방송부가

 폐지되고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퇴직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돼

일 년이 넘었으나 방송국을 이끌어 나갈 인물이 없어서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직접 아버지를 불러 방송국을

 재건 할 것을 부탁했다. 1949년 11월 KBS 중앙방송국장으로

 임명된 후 채 자리를 잡을 시간도 없이 6.25가 발발해

피난방송국을 이끌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1953년 정부가 서울로 돌아와 전국의

방송국을 총괄하는 관리국이 발족해 방송관리국장을

 지내게 됐다. 6.25전쟁 중 이동방송국을 이끌고 전국을 누비며

과로하신 탓으로 환도 후 발병 해 1955년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희망과 꿈은 다른 나라처럼 우리나라 방송이

 민영화 되는 것, TV방송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찍이 종로 3가 지금의 보신각 자리에 있던 

TV방송국 HLKZ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설치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얼마 안 돼 문을 닫게 됐다. 아버지가

 좀 더 생존하셨다면 우리나라 방송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됐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