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KBS 보도방송의 주역 박상진
박상진님은 1960년대 KBS보도실장,
방송과장, 보도과장을 거치면서 KBS보도방송을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1955년 4월1일 KBS에 해외뉴스 수신용
텔레타이프가 설치되면서 최초로 외신기자를 모집했을 때
방송국 외신기자로 들어오신 분이 박상진, 윤태로, 한기욱님이었
습니다. 박상진님은 이때부터 보도방송에 온 정력을 다 바쳐 50년대,
60년대의 KBS 보도방송에 임했습니다. 1958년 방송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동남아 순방길에 올랐고, 1962년 글렌 중령이 탄 미국
최초 인간탑승 인공위성이 지구궤도에 진입 했을 때,
방송기자로는 처음으로 해외 생중계방송에
1967년 기자로는 최초로 방송문화상을 받았다.
1965년 한, 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 체결실황을 현지에서 취재 보도하면서
생방송으로 중계방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
KBS 보도실장 시절, 기자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방송인의 가장 영예스러운 방송문화상을 받았고, 기자출신
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방송과장을 지냈습니다.
1968년 KBS에보도과가 신설되면서 보도과장을
지내는 등님에게는 유난히도 최초, 마지막
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습니다.
님이 방송국에 들어 오기전만 해도
해외 소식은 프린트되어 배달된 통신에 의존하던
때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텔레타이프의
신설과 외신기자의 모집은방송을 통한 해외소식의 획기적인
개선이었고 외신기자는 텔레타이프에 메어 달렸습니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외신기자들의 일은 밤 세워 그때로서는
하루뉴스 중 가장 중요시하던 낮 12시 뉴스가
나갈 때까지는 주말도 공휴일도 밤낮도
없이, 늘 바쁘던 때였습니다.
오른쪽 세번재분이 박상진님입니다. LST 해군함정 선상에서
함정간부들과 KBS교향악단 지휘자 임원식님, 김백봉 무용단장,
엔지니어 김익모님등 일행이 함께한 사진입니다.
달러가 없어 해외여행이 극히 제한적이던 시절,
외신기자를 하면서도 해외구경 한번 못하던 님이 1958년
정부가 1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친선예술단을 동남아에 파견 하면서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취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전까지는
특수한 해외 중계방송이나 미국초청 연수를 위해서 아나운서, 기술자, 또 방송
중견간부가 해외에 나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기자가 해외에 나가 취재한 적은 없어서
이때의 해외취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때의 해외공연은 처음으로 정부차원의
대규모 친선예술단을 구성해서 태국, 월남, 필리핀, 홍콩, 일본 등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동남아와 유대를 강화한다는 큰 의미를 갖는 국가적인 행사였습니다. 임원식을 단장
으로 하는 KBS교향악단과김백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용단 등 100여명의
예술단원들은 비행기 타기가 어렵던 시절에 LST 해군함정을
타고 멀고 먼 길을 돌아 다녔습니다.
월남의 사이공 국회 의사당 앞에서 예술단원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 박상진: 오른쪽에서 세번째분 )
동남아 친선 예술단이 일본 오끼나와
나하시에서 김백봉 무용단장, 김익모씨와 함께한
사진으로 오른쪽 두번째분이 박상진님입니다. 이때는
휴대용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해외취재는 물론 국내취재도
엔지니어와 동반취재를 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 일제 SONY,
영국제 EMI등 일명 아이스케키통이라고 불리던 휴대용
녹음기가 들어와 기자나, 프로듀서가 단독으로
녹음취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끝 부문에 그때 쓰던 휴대용 녹음기사진을 올렸습니다.
홍콩에서 공연을 마치고 홍콩 주최측 대표와
공연관람소감을 묻는 회견장면, 오른쪽 두번째분이
박상진님이고 오른쪽분은 강익수 아나운서,
왼쪽분은 김백봉님입니다.
왼쪽부터 김백봉 무용단장, 작가 김영수,
KBS교향악단 지휘자 임원식, 김복자 배우(성우-VUNC재직),
왼쪽 뒤편에 엔지니어 김익모님이 보입니다. 아래는 동남아
예술단이 인천에 도착시 환영나온 KBS와당시 공보실 관계자
조백봉, 임택근, 박상진, 노정팔, 윤길구, 한사람건너
민유동님이 함께한 사진입니다.
1962년 기자로는 처음으로 4개월간의
해외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KBS보도실장이
되었습니다. 해외연수가 선진방송에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때 처음으로 이루워진 기자의 해외연수는 우리나라
보도를 한 단계 더 올려놓을 수 있는좋은 기회로 삼아 여러 분야에
걸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4개월의 연구기간을 통해서
LANCIN UNIVERCITY에서의 특별연수와 VOA등 선진방송국
견학을 통한연수, 또 미국 최초의 유인 인공위성 지구궤도
진입이었던 역사적은 글랜중령이 탄 인공위성 발사
실황을 현지에서 생중계 방송한 일 등 배우고
체험한일들이 많았습니다.
1962년 미국방문시 당시 글렌중령이 탄 미국 최초 인간탑승 인공위성 발사시
생중계방송 할 당시 모형 인공위성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분이 박상진님입니다.
아래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 근무중인 고 강익수 아나운서와 편성계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00와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박상진님-중).
님이 그해 8월 귀국하면서 보도실장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보도실은 20여명의 기자가 활동했지만 제1라디오는 물론
제2라디오, 대공방송, 해외방송, 새로 발족한 TV방송 등 KBS의 매체를
통해서방송되는 뉴스를 모두 맡았습니다.미국에서 보고 쌓은 식견은 보도
방송으로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새로운 보도방송을 하기위해서는 새로운
인재발굴이 급선무라고 여겨 처음으로 기자 공개모집을 실시해서10여명의 기자를
선발했습니다. 황규환, 나형수, 배학철, 임연택등 이때 방송국에 들어온기자들은
오랜기간 KBS는 물론 민영 방송에까지진출해서 이 나라 방송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님의 보도실장 시절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워져
협정이 체결될 때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방송한 일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박상진님은 방송기자로는
유일한 방송문화상 수상자이기도 했습니다.
보도방송은 보도실취재를 주축으로 하는것이지만
그때는 아나운서가 방손전면에 있었던 시절이라 청취자들이
기자나 PD는 잘 몰랐습니다. 방송인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방송문화상의 보도부문은 대부분 아나운서가 받았을 때 1964년
제 7회 방송문화상 보도부문은 보도실장이던 님에게 주어졌습
니다. 이것이 기자에게 주어진 방송문화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방송문화상을
받고 중앙방송국 간부들과 함게한 사진입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분이 박상진님이고 앞줄 오른쪽부터
정인식편성과장,이홍수 중앙방송국장. 박상진, 이희목, 유병은기술과장,
김성배, 오용한,뒷줄 오른쪽부터 문시형 TV편성과장, 박은상대공과장,
이종훈 연희송신소장, 정경순, 신정휴, 최두헌님입니다.
방송과장 시절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한 사진입니다.
1966년, 8개월간의 광주방송국 방송과장을
거쳐 1967년 4월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이 되었습니다.
방송과장은 보도실과 아나운서실을 총괄하는 자리였지만
대부분 그 자리는 아나운서 몫이어서 이때 처음으로
기자출신 방송과장이 되었습니다.
1968년 7월 중앙방송국과 텔레비전방국,
국제방속국이 통합되면서 보도과가 신설되었을때는
보도과장 자리를 맡았고, 1969년 KBS에서 보도과장이라는
직제가 영원히 살아졌을 때 님은 해외로 자리를 옮겨 월남, 인도,
일본을 돌아다니며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장으로 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님은 1982년, 언제나
잊지 못하던 고향 KBS에 돌아 와 공직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지금은 KBS사우회 회원이시고,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어쩌면 85세인 박상진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제일 많이 들어간
방송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상진님 시절 보도에 종사하시던 분들을 봅니다.
이경수, 신정호, 곽노환, 주창순, 송형근, 김명진,
송정기, 김운찬, 최석진, 박성열, 김귀영, 황태수, 서종화,
노영대, 강윤영, 김경호, 김창식, 전재만, 최이자님등 초창기부터
근무하던 분들은 공사가 될 무렵까지 한. 두분을 제외 하고는
보도에서 대부분 떠나셨고 박상진님이 미국연수에서 돌아와
공채로 모집한 황규환, 배학철, 나형수, 임연택님등은
방송계에서 오랫동안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관련사진 모음
옛 정동 KBS방송국 앞에서 한영섭, 김재연, 박상진, 윤길구, 한기욱, 정순일님이
함게 한 자리입니다. 윤길구, 한기욱님은 타계하셨고 한영섭님은 방우회 회장이십니다.
박상진님은 유명인사 방한시에도 믾은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사진은 미국의 대 재벌 록펠러씨의 딸이 한국 방문시
인터뷰 하는 모습으로안경쓰고 마이크잡고 있는분은 기사 문장이
부드럽기로 유명한 대기자 김영철입니다.
장기범 아나운서가 1965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고
서울 중앙방송국 현관에서 기념촬영입니다. 박상진님을 비롯해서,
이홍수중앙방송국장등 중앙방송국 간부들과 아나운서,
취재용 자동차가 없던시절 오토바이는 좋은 기동력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 일제 SONY, 영국제 EMI등일명 아이스케키통이라고 불리던 휴대용
녹음기가 들어와 기자나, 프로듀서가 단독으로 현장 녹음취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비창.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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