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아나운서 이옥경의 어린 시절
이옥경은 1926년 7월 시험방송시절부터 1928년까지 약 2년간 방송을 했습니다. 이 옥경에 관한 얘기는 많이 했지만 어린 시절 얘기는 처음입니다. 올해 82살이 된 둘째딸 노라노 ( 본명 노 명자님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임 ) 님과 셋째 딸 노 현자님의 자료를 바탕으로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이옥경이 서울에서 태어난 것은 1901년 9월 7일이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선비이자 벼슬을 하던 이학인(李學仁)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다.
구한말 과거에 급제한 이학인은 다른 사람들에 앞서 어렵게 영어를 배워 영어로 글을 쓰고 얘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벼슬을 하면서 마지막 황태자의 어렸을 때 영어 교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서울에 전화가 처음 가설될 때 이학인의 집에는 제일먼저 전화를 놓았고 또 제일먼저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같이 생활했던 이옥경의 둘째딸 노라노는 2007년 8월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뒤 영어를 공부해 황태자의 영어교사를 지내셨던 분이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외할머니의 첫 번째 자랑거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 전하께서 외가에 전화가 설치되자마자 직접 전화를 하셨다는 것이다. “이학인 인가?” 하고 외할아버지를 찾으시던 황태자의 음성을 어린 아이 목소리로 흉내 내며 얘기 해 주시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옥경이 태어 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인천 세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인천에서 살게되었다. 기회 되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때로는 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쳐 준적도 있었다.
이 땅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기 직전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살 된 이옥경을 데리고 만주 안동으로 갔다. 상해 망명을 생각하고 간 것이었지만 만주에서 머무르면서 세관일을 해 보자는 주위분의 권유로 만주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옥경은 이곳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여기서 만난 노창성은 학교 2년 선배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양부모 밑에서 자란 노창성은 성실하고 늠름한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행사가 있던 날이면 교기를 들고 앞장서서 걷는 모습이 그리도 보무당당하고 멋있게 보이던 학생 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오빠 동생 하면서 친해졌고 노창성은 일찍부터 이옥경을 점찍어 놓았다,
어린 이옥경은 그런 저런 생각 없이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세월이 흘러 둘이는 해어졌지만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가 공부를 하고 있던 노창성은 뒷날 다시 이옥경을 찾아 부부가 되어 일생을 함께한다. 이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룬다.
이옥경이 만주에서 소학교까지는 그런대로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이상은 만주나 우리나라 어디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옥경이 일본에라도 가서 공부를 더 해야 된다고 생각 했다. “여자라고 학문을 그만둘 이유는 없다. 조선에서 여학생인 너를 받아 주는 곳이 없다면 일본에라도 건너가 공부를 계속 해야 한다. 일본공부를 시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쩌겠느냐?”
아버지는 한숨을 내 쉬시며 고심 끝에 일본 규슈 뱃부에 있는 미션 스쿨에 들어가라고 했다. 이옥경이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버지는 이옥경에게도 자주 편지를 했지만 담임 선생님, 교장선생님에게도 종종 편지를 보냈다. 한번은 조회 날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낭독한 일이 있었다.
물론 영문으로 된 문장과 내용을 읽어 주면서 한국인이 이토록 훌륭한 영문 편지를 쓸 수 있음을 자랑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옥경은 학생들 앞에서 민망하기도 했다.
이옥경이 뱃부에서 학교에 다니던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37살에 홀로 된 어머니는 만주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인천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혼자는 살 수 없다고 딸에게 사람을 보내 기어이 딸 옥경을 인천으로 데리고 왔다.
그때는 한국인이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허용되지 않던 때였다. 인천여고가 있었어도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 였다. 어머니는 옥경이 일본말도 할 수 있고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터라 인천 여자 고등학교를 찾아 사정 하면 입학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날마다 학교 앞에서 교장 선생님을 기다리고 만나면 사정 말씀드리고, 그러기를 한 달 만에 학교입학 승인을 받아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인천여고를 졸업하고 도오꾜오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돌아와 노창성과 결혼을 했고 노창성은 학교졸업후 방송국 설림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혼 후 시험방송을 하던 시절에 남편의 요구에 따라 남편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방송국 아나운서 생활을 했다.
이옥경이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다녔다거나 일본 유학중에 노창성과 사랑의 싹이 텄다고 하는 얘기는 잘 못 전해진 것이다. 이옥경이 목소리도 아름답고, 글도 쓰고, 그림이나 습작이라고 하는 붓글씨 등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옥경의 결혼에 얽힌 얘기를 잠시 해 보려고 한다.
일본 의과대학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이옥경에게 뜻 밖에도 경성 의과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일본인 학생으로부터 청혼이 들어 왔다. 그때는 일본인이 한국인과 결혼 하는 것을 금기시 하던 때라 남자편의 집안에서 절대 반대하고 나셨지만 그 학생은 속병이 나, 휴학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양가에서는 부득이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약혼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구라마에 공업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노창성이다. 이옥경은 벌써 잊어 버렸지만 노창성은 생각을 저 버리지 않았다.
1897년 3월 25일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고아로 자란 그 학생은 어떻게 던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옥경과 삶을 같이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둘이서 해어진 뒤 이옥경의 행방을 알 수 없어 고민 하던 노창성이 만주에서 같이 다니던 소학교 교지에 이옥경이 글을 쓰고 주소가 실리자 사는 곳을 알게 된 노창성이 이옥경을 찾아 인천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사연을 얘기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을 해야 된다는 각오였으니 그 대단한 각오 앞에서 이옥경의 집에서도 거절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약혼까지 이르렀던 일본인 학생이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그 한국학생이 노창성(盧昌成)으로 우리나라 방송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고 일제 강점기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 함흥방송국장, 제2방송부장이라고 하는 우리 방송인으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물러났다가 1949년 11월 KBS중앙방송국장이 되어 6.25 전시중앙방송국장을 거쳐 방송관리국장을 하다가 1955년 1월 9일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노창성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은 3남 6녀를 둔 어머니로 살다가 1982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노라노(노명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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