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킨 沈友燮 방송과장

이장춘 2009. 4. 28. 02:08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킨 沈友燮 방송과장 

 

 

심우섭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경성방송국의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2방송과장을

지내면서 우리말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고 제2방송과가

제 2방송부로 승격되면서 제2방송 뉴스에 일본말을

섞으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거절하면서

방송국을 떠난 사람이다.

 

상록수로 널리 알려진 심훈의 큰형님이다.

최초의 동요 반달로 널리 알려진 윤극영의 고종사촌

형님이기도 한 심우섭은 교육자이고, 매일신보의 지방부장을

지낸 언론이기도 하며 ‘형제’ ‘산중화(山中花)’ ‘정호기(正虎記)’등

이름 있던 소설을 신문에 연재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1890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서

테어나 활동 할 시기에는 경성부 계동 100번지에 살았다.

그때 계동에는 여운헝, 최남선, 노창성 등 알만한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고 실제로 심우섭은 이런분들과 깊은 교류가 있었다.

심우섭은 사회활동이나 문화활동  계몽운동, 나라의

독립을 위한활동에 깊숙이 관여 했으며 사이토오

총독과도 자주 만난 기록이 있다.이광수의

 무정에 나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의

모델이 심우섭으로 전해진다.

 

1910년 제1회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을 전개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그 기록을 본다.

 

1912년 보통 문관 시험 급제1913년

 鷺果津 恩露學校 (윤치호 선생이 세움) 교사가 되었다가

 5개월만에 퇴직하고 每日申報 기자가 됨 (지방부장역임) 1924년

 京城府 安國洞보통학교 강습원을 설립하고, 또한 자택에 樂天舍라는

학생기숙사를 경영 중이나 뜻대로 되지 않아 樂天舍의

가옥을 朝鮮女子敎育會에 3만엔에 

매도하고 동회 고문이 됨

 

키 5척 3촌얼굴이 긴 편이고

하얀 피부에 코가 높음배일사상을 품고 때때로

 정치에 관계된 일을 언급함. 과격한 언동을

자행하는 일이 있음

 

심우섭에 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1918년 12월 28일 매일신보의

지방부장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30살의 나이로

신문사를 나왔다. 1920년에는 친목단체인 계명구락부 활동을

했고, 1921년 4월 불교협회 설립을 위한 발기인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고. 1927년 4월 제3회 경성부

 학교 평의원에 당선되어 19명의 평의원 중

 한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심우섭이 방송국에 들어오던 때는

그의 나이 47세로 그 이름이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때였다. 제1대 제2방송과장 윤백남이

그랬고 제2대 제2방송과장 김정진이 그랬듯이

심우섭 역시 비중 있는 인사였고 우리말을

지키려는 확실한 신념을 지니고 임했다.

 

 

1970년에 발행된 이혜구선생님의

만당 문채록에 실린 천풍 심우섭에 관한 글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이 글은 KBS가 1977년에 발행한

한국방송 50년사에도 실려있음)

 

 천풍선생과 방송용어

 

선생님은  키가 크고 배가 나오고

웃음은 호걸풍의 껄껄 웃음이고  첫인상은

호기가 있어 보였지만 한참 지내보니

그 밑에는 절벽이 뿌리박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분이었다.

 

심과장이 제2방송과장으로 가장

힘을 썼고 또 성공한 점은 아나운서에게

우리말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당시 아나운서는 전문학교나 대학교 출신이었지만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지 못하여 그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였다.

 

한 예를 들면 高氣壓을 일본말 같이

고오기압 라고 길게 읽고 짧게 읽을 줄 몰랐다.

 輸出도 일본어 같이 유출이라고 읽고 수출로

정정 하라고 하면 우리는 도리어 유출이라야

세상에 통용된다고 우겼다.

 

심선생님의 한자 읽기에

 대하여 하도 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그 후 아나운서들은

 자전을 방패로 방어했다.

 

 하루는 서순원 아나운서가

 “팽대를 하사 하셨다” 는   뉴스를

 방송하고 나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 까. 과장이 얼굴은 안보이지만

 전화틀 속에서 “너 지금 그 팽대란 것이

 무었이냐?” 질문반 꾸지람반

조로 물었다.

 

아나운서는 태연하게

대답하여 왈 “상처를 감는

헝겊 말입니다.” “아! 붕대

말이로 구나! 그게 붕대지

팽대라면 알 수 있나?”

 

서 아나운서도 지지 않고

 항거 하였다. .“아닙니다, 확실히

 팽대입니다” “그건 붕대라고 해야 해”

아나운서는 얼핏 자전을 방패로

 내세우고 그 밑에 머리를

감추었다.

 

 “자전에는 분명히 팽대라고

쓰여 있는데요!” 이튿날 그것이

화제가 되어  繃 자를 자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과연 팽이라고 쓰여 있어

누가 옳고 그른지 몰라 모두 서로

눈만 바라보았다.

 

과장은 집에 한가히 있을 때는 물론

 금천옥에서 우리하고 안주 잔을 들 때에도

7시나 9시 반 뉴스시간이 되면 라디오를 틀어

 놓고 야 우리 좀 들어보자.     하고 조용히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주흥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다 듣고 나면 대청 기둥 전화통

앞으로 가서  담당 아나운서를 전화통

 앞으로 불러내고 “ 야 너 오늘 잘 했다. 끝마치고

술 먹으러 오너라.” 하고 칭찬하던지 또는 “ 오늘

 여기 여기는 틀렸다” 고 틀린 점을 지적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식은 술을 빨리

 데워 오라고 재촉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 중에서는

 심 과장 시절이 가장 재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은 이혜구선생님 만당 문채록애서  옮긴 글이다.

 

 

심우섭 과장이 재직하던 시절은

제2방송 청취자가 늘어나면서 청취료 수입이

많아져 재정적으로는 다소 나아졌지만, 1937년

7월 7일에 터진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이

더 해가던 때였다.

 

전쟁터에 우리 청년들이 끌려가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지식인들은 일본말을 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어를 잘 몰랐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우리 청년들이 징용에 끌려가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지휘계통이 안서고 엇박자가

이루어져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것을 해결하자면 조선인들이

일본말을 모두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제2방송에서도 일본말 방송을 해야 되는데

 우리말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안했다.

 

일본인들은  1939년부터

제2방송과가 제2방송부로 승격 되는 것을

기화로 제2방송부에서 실시하는 우리말 방송에

일본말을 섞으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는 총독부

체신국 감리과장의 정식 문서기 접수 되었다.

 이때로서는 아무도 거절 할 수 없는 지시였다.

심우섭은 단호히 거절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말 방송만을 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지만

심우섭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로 인해서 심우섭은 제2방송부장을 해 보지

못한 체 방송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과장 대리로 있던

이혜구님이 잠시 직무대리를 하다가 함흥방송국장으로

있던 노창성님이 이어 받았지만 1943년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으로 제2방송부는 폐지되었다.

 

경성방송국에 우리말 전담 방송이

생긴 이래 해방 될 때까지 다섯 분의 책임자와

방송원들은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