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3일 기술인들의 모임입니다. 이 사진을 여기에 올리는 것은 이 사진에는 방송 초창기부터 들어오신 분들이 대부분 이 사진에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사진과 관련되는 얘기를 하고 본문을 쓰겠습니다.
이 시절에 기술 쪽에서 일 하시던 분 들 가운데
그동안 6.25때 납북되신 분들이나 세상을 뜨신 분도
많으시지만 아직도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나)
KBS사우회 회원님은 많습니다.
경성방송국 초기방송인들 ( 2 )
유병은님이 1943년에 들어 오셨고
이승균님이 1945년 10월에 뒤이어 1947년
48년사이에 박경환, 정경순,김선영, 왕종현, 정관영,
김성열, 김성배, 김규한,장도형, 유해룡님등이 계시고
제가 미처 잘 모르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또 방송이나 경영쪽에도 이혜구선생님을
비롯해서 정환옥, 문제안, 이덕근, 한영섭님,
등 아직도 6.25전에 방송하셨던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한국방송인 동우회와 (방우회)와 KBS사우회는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방송역사를 이끌어 오신
자랑스러운 인사들의 총 집결체로 방송의 맥을 이어가면서
내일을 생각하고 방송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힘을 기울이는
사단 법인체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모임에 몸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런 뜻에서 그 날들의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선배님들이 남겨 놓으신 자료를 바탕으로 이 글도
쓰면서 지난날도 되돌아봅니다.
1927년 방송 초기에 사용된 나팔 형 철제 스피커입니다.
1931년부터 이중방송계획이 수립 되면서
인원도 미리 선발했지만 방송기구도 바뀌었습니다. 1932년 사단법인 경성 방송국이 사단법인 조선 방송협회로 되고 경성방송국은 경성 중앙 방송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유명한 박영효님 1933년 조선방송 협회
부총재로 취임 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효님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우정국
박영효님은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간단히 쓰겠습니다.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할 때 최초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셨습니다. 나라가 일본손에 넘어간 뒤 후작(侯爵) 작위를 받고 1911년 조선 귀족회장, 1918년 조선은행 이사를 지내셨습니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이 되셨으며, 중추원 의장· 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1933년 제2방송을 실시하면서 방송시간도
10시간에서 16시간으로 늘어났고 연희 송신소가
처음 세워 져 1KW이던 출력이
01 남대문 타령.mp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