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1 ) -TV개국-

이장춘 2009. 5. 3. 21:09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1 )
 
 
KBS TV방송은 1961년 5.16이 일어나던 그해
8월부터 계획되어 4개월 만에 그리고 공사 시작한지
 2개월 반 만에 그 해의 마지막날 12월 31일 방송을
내 보냄으로서 세계방송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시작한지 짧은 역사에도
세계적인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되살려 초기
얘기만 해 부기로 한다.   

 

 

 

 1956년 7월!  37세의 야심 찬
젊은 오재경이 공보실장에 취임하면서
방송에 관한 두 가지를 실현시
키려는 꿈이 있었다.
 
 하나는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가건물 같은 집에서의 방송을 청산하고
현대적인 새로운 방송국을 세워 보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워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청사를 짓는 것은 실현시켰지만 텔레비전 방송국은
설계만 한체  케비넽 속에   넣어두고   떠나야 했다.
그 뒤 두 사람의 장관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가장 큰 두 가지의 걸림돌이 있었다.
하나는 국민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나라의 재정이 어렵던 시절에 예산도
예산이려니와 외화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어외제
장비를 들여 온다는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던 때였다.  

 

   

오재경 장관이 1961년 5.16과 함께 다시
돌아 왔다. 공보실을 떠난지 2년 반이 지나
7월에 취임한 오재경은 전에 하지 못 했던 꿈을
 당장에 실현 시키려는 구상을 내 놓았다.
 
이름 붙여 “오재경 구상”이라는 것이었다.
군사정권 초기였던 만큼 군사정부로서도 무엇으로든
국민에게 선심을 써야할 절박한 입장에 처해 있었을 때다.
때마침 당시 제 2 인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뜻하지 않게
확보된 외화 20만 달러를 쓰려는 궁리를 할 무렵이었다.

  

이럴 때「오재경 구상」은 절묘하게  

밎이 떨어져  군사정부는 오재경 구상을 즉각
받아들였고 그 20만 달러를 여기에 쓰기로 한 것이다.
오 장관은 연말까지, 아니 성탄절이 오기 전에 이를
실현시킨다는  약속을 하고 그 돈을 TV방송 건립에
사용키로 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짧은 기간에 
TV방송국을 건설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한다고 하면 해야 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움이 따랐겠는까?
이 일을 맡으신 분들은 고생의 씨앗이 뿌려졌다.
전에 장관직에서 떠나기전 수립한 TV방송설립계획안을

찾았다. 오재경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TV설립계획을

브리핑해서 재가를 받은적이 있지만 송인상 재무부장관이

재원문제로 난색을 표명하면서 보류되고 실현치 못하고

떠났다. (노정팔 방송과 50년 P, 387),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과 얘기가 되어 그 안을 찾아 보았으나

그 계획안은 총무처로 이관되었다.

 

 

 

 

이때 방송관리과장은 김동철이었다.

김동철은 총무처 창고 안에서 그 계획안을

찾아 그 안을 바탕으로 밤을 세워가며 수정보완

작업을 벌여 김종필 부장에게 제출되었고 년내에

TV방송국 설치를 완료하기로 해서 일이 추진되었다. 

계획으로 발표 된 것이 8월 14일이었다. 그날 TV 창설

계획을 발표하는 한편  당시 MBC 라디오 창설준비

 중에 있던 최창봉을 창설책임자로 발탁 하면서

 구체적인 실천계획 까지 마련한 것은

 9월 15일 경이었다.

 

(고려대학교를 나온 김동철(金東喆)은

미국 유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방송관리과장

보도과장 등을 역임하다가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옮겨 재직 중 1989년부터 제 1기 KBS

민선이사를 지내셨습니다.)  

 
10월 6일에는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설치허가 나왔다.
(호출부호 HLCK, 영상출력 2Kw, 음향출력 1Kw, 주사선 525본)
10월 10일에는 서울 중구 남산동에 대지(垈地) 1,236평에
스튜디오 630평의 건설을 위한 기공식과 아울러

지진제 (地鎭祭)를 가졌다.

 

 
 
TV방송국 대지는 일제 때 일본불교의
동본원사 (東本願寺)가 들어서 있던 곳으로
광복 후에는 대한민청(大韓民靑)이 쓰던 건물이었다.
대한민청이 여기서 많은 좌익계 인물들을 고문하기도 하고
때론 목숨을 앗기도 했던 이를테면 불길한 절터로 알려졌지만
 6 · 25전쟁 때도 이 절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을 기독교의
한 교회가 인수해서 절을 헐고 현대식 교회를 지어
한양교회가 되었다. 이것을 공보부가 인수받아
TV 방송국을 짓기로 한 것이다.

 

 

최창봉님을 비롯해서 준비요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기공식과 아울러 성대한 지진제(地鎭祭)를
가졌던 것도 다 그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니다.
교회를 내 보내자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부에서 하겠다는데 일개 교회가 반대할 수도
없었을 때다.  교회가 이사하는데도 힘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을 흘러가고 방송 내 보내야 할 날자는 촉박한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춥던 겨울 일은 계속되었다.
 
이 일에 나서셨던 분들 가슴 새 까맣게 타 들어 가면서
방송예정일 두달 남짓 남겨놓은 10월 들어서야 착공을 하니
집 짓고 기계주문해서 들여오고 짜 맞추고 방송준비하고
지금 같으면 두 손 다 들고 다 그만 두어 버렸거나
못 하겠다고 뒤로 넘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 일을 해 냈다.
그때 방송선배들은 그 기적같은 일을 해낸것이다.
 
TV방송국을 이곳에 세운것은 먼저세운
라디오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라디오 청사와는 길 하나 사이지만 동은 달랐다.
라디오 방송국 위치는 예장동이고 텔레비전 방송국은
 남산동 이었다그래도 남산 방송국이라면

 

 

 중구 예장동 8번지로 통했다.

 

 

 KBS TV개국에 관한 신문기사

 

 

1961년 12월 15일 동아

 

 

1961년 12월 23일 동아

 

 

1961년 12월 26일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