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이난영의 생애와 노래, 글 모음

이장춘 2010. 12. 31. 17:48

 


 

 

 
 
 
 가수 이난영의 생애 글모음 
 
 
인난영 ! 1930년대초부터
1950년대까지 최고의 가수 반열에 올랐던
이난영은 1934년 목포의 눈물로 선풍을 일으킨
이래 일생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고 그의 딸 김씨스터즈는 해방후 가장
먼저 등장한 보칼 그룹이 되었습니다.
 
이난영의 혼은 1965년 4월 11일,
세상을 뜬 이래 오랫동안 타향땅 파주에
 머물던 혼을 2003년에 목포에 있는 그의 생가에
소공원을 조성하고 작년 (2006년) 3월 고향인들의
주선으로 고향 목포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이난영 공원을 조성하고 그해 4월
11일부터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기 사작한 이래
이난영과 관련한 많은 글을 썼습니다.
다소 중복된 글도 있지만 나름대로 제목마다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동안 쓴 글들을
연결해서 같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주소 클



이난영 탄생! 100년, 목포의 눈물 82년! 
http://blog.daum.net/jc21th/17782891

이난영,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목포 시립교향악단 동영상
http://blog.daum.net/jc21th/17781371

김 시스터즈 이난영 딸 김숙자 김씨스터즈 최초 한류 보컬그룹

http://blog.daum.net/jc21th/17782698

김해송과 손석우, 손석우님 육성으로 듣는 그때 그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072


이난영노래, 목포의 눈물에 담긴 민족혼
http://blog.daum.net/jc21th/17780294
 
목소리로 듣는 김해송의 생애와 그의 노래 모던기생 점고
http://blog.daum.net/jc21th/17780778
 
이난영의 해조곡 (1937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981
 
다방의 푸른 꿈 (1939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292
 
낙화의 눈물 / 이난영
http://blog.daum.net/jc21th/17780291
 
김해송, 박향림의 그때 그 노래와 김해송 이난영 부부
http://blog.daum.net/jc21th/17780565
  

이난영, 유성기 옛 노래 모음

http://blog.daum.net/jc21th/17780290

 

이난영/진달래 시첩과 힛트곡 모음

http://blog.daum.net/jc21th/17780293 


저고리 씨스터와 아리랑 보이스, 김 시스터즈와 김보이스, 김해송과 이수만

http://blog.daum.net/jc21th/17782221

이난영과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1151

  

동영상, 최초의 여성 보컬그룹 김 씨스터즈와 봄맞

http://blog.daum.net/jc21th/17780566

 

김시트터즈가 노래 청춘목장을 처음 부르던 때 1956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331

 

가요무대 30년특집 동영상 모음 1443회 KBS 2015년 11월 16일

http://blog.daum.net/jc21th/17782673  


가수 이난영의 생애와 목포의 눈물

http://blog.daum.net/jc21th/14694509







전라남도 목포(木浦) 출생.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6세 때 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의

제주도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인정받음으로써 순회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삼천가극단의 일본 순회공연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에게 발탁되어 오케이레코드사의

이철(李哲)을 만나 1932년 손목인(孫牧人)

 작곡《불사조》를 처음 취입했다.

 

 

 

 

1939년 무렵 오케연주단의 모습

 

오케 연주단 지방공연 사진. 1.남인수,

2.고복수, 3.이화자, 4.이난영, 5.김해송, 6.김정구,

7.이철 (오케 연주단 단장, 오케레코드사 사장),

8.손목인, 9.이은파, 10.장세정, 11.김용호

 

 


1934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 뒤 《목포는 항구다>
《대망의 푸른 꿈》 등의 대표곡을 불러
대중가요 가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 무대가수로 활동하였고,
남편 김해송(金海松)이 납북된 뒤
 KPK악단을 운영하였다.

1958년 “목포의 눈물” 같은 제목의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관중.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41년 만에 고향 목포로 돌아와 노랫말 속

삼학도’에묻혔습니다 이난영기념사업회는 2006년

3월 ‘귀향’을 기념해 22~25일 목포시내 일원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경기도 파주의 공원묘지에서 옮겨온 유해를

25일 삼학도에 안장했습니다. 안장식은이씨의 유해를 화장한 뒤

20년생 백일홍 나무 밑에 묻는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졌습니다.

안장지인 삼학도(대삼학) 삼학사 옆에는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세워졌고, 인근 780여평에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돼 그해 4월 11일

문을 열었습니다.

 

 
 
 
 
 
 
 
 
 
 
 
 
 
이난영의 환혼(還魂)
 
 

 2005년 9월 22일 이규태 코너
 
 
 
1930년대 중반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동화시키고자 문화말살정책을 강화했고 이에
 조선일보는 그 문화를 지키려 맞대응했다. 조선의  

학술문화를 발굴 선양 보급하는 조선학(朝鮮學) 운동을

비롯해 한글 보급운동, 향토물산 장려운동 등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조국애를 대중가요를 통해 심으려는 애향가(愛鄕歌)

가사 현상모집을 했다. 이때 입상한 가사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 목포가 고향인 18세의 무명가수

 이난영이 부른 이 노래는 억눌린 채 잠재된 민족의 공감대에

 불을 댕겨발매되자마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당황한

총독부는 발매 금지시키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를

했다. 이 노래의 가사 가운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조사의 초점이었다.
노적봉은 유달산의 별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적 섬멸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산이다.
곧 삼백년 원한이란 300년 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대목이 암암리에
민족공감의 고리 구실을 한 것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원한’이 아니라 남녀사랑을 상징하는 ‘원앙’
 
이라고 변명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삼백년 원한 품’은 ‘三柏淵 願顔風’ 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게 바꿔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곡절이 담긴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노래가
 
아니라 민족 저항의 표출이었다.
 
 민족가수로 아로새겨진 이난영은
작곡가요 악극단을 거느린 대중가요의 대부였던
김  해  송과 결혼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의
 납북으로 생이별, 자녀에게 노래를 가르쳐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가 활동하게 했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시신은 파주 광탄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 이듬해에 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져 그녀가 읊었던
저항정서만은 귀향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연고 없는 땅에서 방황해왔다.
 
그 고독한 영혼을 40년 만에야
태어난 고향이요 노래의 고향이기도 한
목포로 이장해서 고향을 찾았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라는
 
노래비 속의 구절을
 
‘당신이 흘린 눈물은 보석입니다’로
 
 바꿔 새겨야 할 판이다.
 
 
 
 

 

 

 

 

 

이난영 동영상 목포의 눈물

 

 

 

 

 

목포시립 교향악단 동영상 목포는 항구다 

 

 

 

 

목포시립 교향악단 동영상 목포의 눈물

 

 

 

 

 

 

 

 

 

김해송 이난영의 딸 김씨스터즈 

 

 

 

 

1957년 대한 공론사에 KBS공개홀을 열고 공연하는 젊였을 때의 김씨스터즈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등장한 보컬그룹은 
`김시스터즈`라는 여성 트리오였고. 그들은 당시
트로트의 여왕 이난영의 두 딸과 한 명 친척으로
이뤄진 팀이었습니다.  그들이 팀을 결성하게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팝스계는 이미 1950년대 초반에
중창단이 널리 유행했습니다. 그 여파가 국내에도 밀려와
 8군쇼 무대에서 최초의 중창단이 등장한것이
 
<김치 깍두기>(1956년)의 김 시스터즈였습니다.
 
고(故) 이난영 여사의 딸인 그녀들은 이른바
패키지 쇼를 구성해 무대에서 남동생들인 김 보이스와
 함께 북치고 나팔불고 하면서 GI들에게 열광적인 인기였으며
그 여파로 미국으로 건너가 <찰리 브라운>이라는 곡을
 발표해 지금껏 국내 가수로서는 제일먼저 미국시장에
 음반을 내놓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