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1930년대 가수왕 왕수복과 노래, 고도의 정한

이장춘 2011. 1. 13. 21:57








일제강점기, JODK 경성방송국의

우리말 방송  전담채널이 새로 생기면서

한국어와 일본어 2중 방송을 실사하던 1933년

 4월 26일, 그때로 부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까지의 기간은 가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전성기이고

이 시대 최고의 가수는 왕수복이었다. 방송을 비롯한 공연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그리고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삼천리 지를 비롯한 잡지 등에도 가장 많이 오른 가수

이름이다.    당대의 문호 이효석과 사랑이 물거품 되면서

여류시인    노천명과 결혼을 약속한 김광진과 결혼

으로 이어져 노천명을 미혼으로  남게 하면서

 화제를 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왕수복 王壽福, 고도(孤島)의 정한(情恨) 왕성실



그 시절 그 인기를 가늠 해보기

 위해 민족잡지 삼천리지가 1935년에

발표한 인기투표 결과를 올린다.  1935년

1월부터 10월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10,130명이  응답, 남녀

가수별로 발표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여자부문


왕수복 1,903

선우일선 1,166

이난영 873

전 옥 377

김복희 348



남자부문


채규엽 1,844

김용환 1,335

고복수 674

강홍식 468

최남용 333



이 통계는 그 시절 가수 활동상의

가늠자가 되어왔다.    일제 강점기에 널리

 알려진 여자가수  이애리수,  강석연 등은  그 이전의

 선배가수이고 남자가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여자

가수 황금심, 장세정 등은 뒤에 활동한 가수다.





1920년대부터 가요 작곡가로

스스로 노래를 부른 김용환 (김정구의 형)은

 여자가수를 찾기 어렵던 시절에  평양기생출신

 왕수복을 찾아 1933년 8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 ‘한탄’을 음반으로 내 놓았다. 이 노래가

 왕수복의 데뷔곡이다.   왕수복은 2개월 뒤 1933년년

 10월 포리돌 레코드사 전속으로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음반취입에 나선다. 



33년.10월.8일 동아일보



 그때 취입한 노래가 바로

‘고도의 정한' (孤島의 情恨)으로 이

노래와 함께 왕수복의 인기는 치 솟았고

이로부터 왕수복은 최고의 가수반열에 올랐다. 

그래서 이 노래를 왕수복의 사실상 데뷔곡이라고도

 한다.   오늘 들으시는 음악동영상이다. 



 

33.12.23 동아일보





왕수복이 고도의 정한을 취입한지

 한 달 보름정도가 지나 경성방송국에서는

만주와 대만을 포함한 일본전역에 중계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새로 생겨 그 첫 프로그램으로 왕수복의

노래가 실려 나갔다. 1934년 1월 8일 JODK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춰 왕수복의 대 히트곡 ‘고도의 정한’과

 신민요 ‘아리랑’ ‘雪의 沙漠’ 세곡이

전파를 탄 것이었다, 



왼쪽은 광고모델로 나온 왕수복이고 오른쪽 위는

왕수복의 남편 김광진 아래는 고도의 정한 음반



 그때 고도의 정한 음반이

120만매가 팔렸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도의 정한은

일찍이 춘하추동방송에 올려놓았고 아리랑은

 2012년 11월 16일 문화재청이 1955년 9월의 왕수복

카자흐스탄 공연작품을 공개 한 적이 있어서 올려

놓았지만 “雪의 沙漠”은 아직 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왕수복의 전성기 1934년에

김용환, 윤건영과 함께 부른 김형원(석송)

작사, 안기영 작곡 ‘그리운 강남’은 오랜 세월

금지곡의 딱지가 붙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우리민족과

 함께 해 온 노래로 어린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른 ‘고무줄넘기’ 노래로도 널리 알려저 있다.  저작권과

관련 이 노래를 듣는데 제약이 있지만 오래전부터

춘하추동방송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춘하추동방송 초기부터 올라

있었던 또 한곡의 노래 ’인생의 봄‘은 .

’고도의 정한‘과 같은 음반 전, 후면에 실린

노래였지만 고도의 정한 그늘에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했어도 왕수복의 초기 작품이라

 귀한 노래로 대접 받는다.


춘하추동방송이 블로그를

새로 열던 2005년 그 시절 파일을

어렵게 구해서 ‘사연 깊은 옛노래’ 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고도의 정한‘ 과 ’인생의

봄‘을 올렸을 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왕수복의

노래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 고 해서 이 노래를

들려드렸다는 분들이 계셨다. 그때 필자는

 노래를 필요로 하신 분들에게 파일로 보내

드리겠다는 공지를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요즈음은

인터넷 상에서도 왕수복의 노래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자료도 많음을 본다. 

 그 자료 중에는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시는 유경환

여사님 남편 송방송 저 ‘한겨레 음악대사전’이 2012년에

출판되어 이 안에 자세한 내용이 있고 또 영남대 국문학과

 이동순 교수가 매일경제에 기고한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왕수복 편 상, 하가 있다. 





왕수복의 생애



이해를 돕기 위해 왕수복 관련

신문기사와 함께 요약된 생애를 올린다.


1917년 평안남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본명 왕성실(王誠實). 보통학교에도

 다니기 어려워 11살 때부터 기생수업을 받고 기생에

입문했다.   그때는 이난영처럼 순수 가수도 있었지만, 

 대부분 레코드사나 작곡가들이 노래에 소질이 있는 배우나

기생들의 노래를 취입해서 레코드를 팔고 히트를 하면

이름을 떨치곤 하던 시절에 평양기생 어린

 왕수복이 재질을 인정받았다.





1933년 당시 최고의 반열에 있던

작곡가이자 가수 김용환에 의해서 발탁된

  17살의 어린 왕수복이 부른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

두곡의 노래가 실린 음반이 날게 돛인 듯 팔려나갔다. 

 그 시대에 120만장의 음반이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음반에 실린 노래는 방송국에서 전파에 실리면서 더 힘을

 얻었다.  돈이 없어 기생을 했지만 이제 수중에 돈도 마련되었으니

 기생의 길은 청산하고 좀 더 높은 뜻을 펴고자 23살 때 일본

유학을 가서 성악공부를 했다. 이때는 대중문화 전성기를

지나 중일전쟁 등 차츰 어려운 시절로 접어

 들어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왕수복에게

레코드 취입을 권유했지만 그는 갈 길을 

 갔다.   그의 꿈은 최승희가 우리 전통무용을

서양무용에 접목시켜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었듯이

우리나라의 민요 등 전통 음악을 서양음악과 접목시켜

 세계적인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흔히 신민요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민요가 주류를

이루었고 일본 도오꾜오 음악 발표회에서 우리 전통

민요 아리랑을 서양창법으로 불러 화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님의 노래에는 민족혼이 깃들어

있었다. 나라 잃은 동포에게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우리 노래를 일본말로 불러야 한다고 했을 때는,

노래 부르는 것을 그만 두기도 했다.





유학길에서 돌아와 이효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려 했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나 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왕수복에게 힘을 준 분은 김광진이었지만

김광진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시인 노천명에게는 일생을

 처녀로 마쳐야 하는 불행을 안겨 주었다. 

 




해방되던 해에 김광진과 결혼한

왕수복은 두 분의 고향이기도 한 평양으로

 돌아가고, 곧이어 남북의 왕래가 막히면서 방송에서

날마다 흘러나오던 님의 노래는 오랫동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왕수복은 북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가수가 되었고

 43살이 되던 1959년에는 공훈배우가 되었다.   최승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가나 연예인, 문학가들이 축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김일성과 김정일 대를 이으면서 대우를 받았다. 1997년 8순을

맞아 민요 독창회를 갖기도 했다.       남편 김광진은 김일성대학

교수로 김일성의 경제 선생님이기도 했다.      2003년 86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김일성, 김정일 대를 이어 공훈배우로

영웅으로  애국열사 능에 안장된 가수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2016.08.03 15:54

누구나 태어나서 나름대로 자신의 

주어진 삶을 따르던가 개척하든가 하며 살고

가지만, 그의 생에 대한 평가는 후세들의 몫이 되지요.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여진 모습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겠지만, 후세의 평가야 어찌 되든간에

자신의 생을 마음따라 충실히 살고간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겨레 음악 대사전에서

 이분의 항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 ^



고도의 정한
 
작사 이운방
작곡 전기현
노래 왕수복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바닷가 저쪽에선 돌아오는 배
 뱃사공 노래소리 가까워 오건만
한번 간 그 옛님은 소식 없구나
 
 어린 맘 머리 풀어 맹세하더니
 시악씨 가슴 속에 맺히였건만
잔잔한 파도소리 님의 노래인가
잠들은 바다의 밤  쓸쓸도하다.



인 생 의 봄

 

 

주대명 작사

박용수 작곡

왕수복 노래

 

 

노란 꽃잎 붉은 꽃잎 봄 따라 피고

인생의 봄 청춘이라 내 마음도 피네

새벽이슬 맞어 가며 곱게 피여서

인생의 봄 청춘을 노래 부르세

 

아즈랑이 풀 그늘의 봄맞이 노래

인생의 봄 청춘이라 노래 부르세

지나간 봄 가신님을 더듬지 말고

오시는 인생의 봄을 노래 부르세

 


그리운 강남


 

작사 김석송

(김형원)

작곡 안기영

노래 윤건영, 왕수복. 김용환 
 

1)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2)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3)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감은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발목 상한지 오램이라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4) 그라운 저 강남 건너 가랴면

제비때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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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 1930년대의 가수왕 노래 아리랑, 고도의 정한, 월야의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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