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JODK 경성방송국의 우리말 방송 전담채널이 새로 생기면서 한국어와 일본어 2중 방송을 실사하던 1933년 4월 26일, 그때로 부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까지의 기간은 가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전성기이고 이 시대 최고의 가수는 왕수복이었다. 방송을 비롯한 공연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그리고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삼천리 지를 비롯한 잡지 등에도 가장 많이 오른 가수 이름이다. 당대의 문호 이효석과 사랑이 물거품 되면서 여류시인 노천명과 결혼을 약속한 김광진과 결혼 으로 이어져 노천명을 미혼으로 남게 하면서 화제를 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왕수복 王壽福, 고도(孤島)의 정한(情恨) 왕성실 그 시절 그 인기를 가늠 해보기 위해 민족잡지 삼천리지가 1935년에 발표한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