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정오! 경성방송국에서는 일본천황의 항복목소리가 들렸다. 일본이 세운 그 방송채널에서 소위 신이라던 천황이 인간으로 내려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의 소리를 전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제일먼저 그 소리를 전하고 들었다. 그날 경성방송국에서는 그 방송을 듣기위해 조선방송인들과 일본방송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2시가 되자 누군가가 「기립」 하는 구령을 웨치고 그 구령따라 모두 일어서서 그 방송을 들었다. 그날의 방송 상태가 좋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확실치는 않았어도 일본천황의 항복 목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광복 70년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그때 그 시절 방송과 노래 조선방송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일본방송인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절망의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이 지나가고 조선방송인들은 일본말로 된 천황의 목소리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을 내 보냈다. 포괄적으로 표현된 항복문서를 이해하기 힘든 국민들을 위해 알기 쉽게 해설을 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후 4시에는 조선 사람들끼리 스튜디오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부르며 얼싸 안았다.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애국가 가사도 잘 모르고 곡도 잘 맞지 않았지만 힘차게 불렀다. 해방을 맞던때의 방송인들 올 드랭 사인 곡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노래였던가?...8월 16일 조선방송인들은 일찍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잘 다듬어진 큰 판자 한편을 구하고 자리에서 먹을 갈아 큰 글씨로 SEOUL RADIO STATION이라는 현판을 써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일본의 방송이 아니라 조선의 방송이다. 그때까지 한사람도 없던 방송기자를 아나운서 중에서 한사람 임명해서 현장 취재에 내 보냈다. 형식도 없이 문서도 없이 조선 방송인들이 보는 앞에서 제2보도과장 이혜구는 구두로 기자를 임명해서 현장 취재에 내 보낸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이다. 그날 서대문 형무소가 열리고 옥살이를 하던 독립운동가 들이 옥문을 나와 시가행진을 벌렸다. 시민들도 거리로 나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며 얼싸 않았다. 16일 서대문 형무소를 나오는 독립 운동가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교과서를 비롯 해서 대한민국 소중한 역사자료다. 맨 앞줄 팔을 걷고 깃발을 높이올린 분은 해외에서 들려오는 단파방송을 들어, 독립운동을 도와 오다가 경찰에 잡혀 옥살이를 한 경성방송국 기술자 성기석이라고 했다. 1945년 8월 감격적인 해방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지각변동에 대비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민족신문이 폐간되었고 어제까지 발행되던 일본신문, 통신도 없어졌다. 급하게 마련되어 발행된 그날의 통신에는 「해방만세」 「자유만세」 「독립만세」 밖에 없었다.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외침의 감동들 담아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통신에 더 이상의 말을 쓸 준비가 없었다. 이것이 해방 될 때의 우리 모습이었다. 해방공간! 말 그대로 공간이었다. 통치자도 없고 정부도 없고 서로 자기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주장하면서 정국은 막연하기만 한 때 였다. 방송국의 장악이야말로 자기 세력을 국민에게 접목시키는 결정적인 매체여서 방송국 장악을 위한 세력 간의 갈등은 불을 뿜었다. 독립을 위해 싸울 때는 독립이라는 지향하는 목표가 같았지만 독립을 맞으면서 자기들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려는데 각기 이해관계가 달랐다. 가장먼저 활동을 전개 한 것이 건국준비 위원회였다. 방송국 편성과 임병현의 집이 건국 준비위원회 임시사무실이었고 8월 15일부터 활동에 들어가면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을 선임했다. 2.새 호출부호 사용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JODK 이 호출부호는 해방 다음날 부터 달라진다. 8월 15일은 그대로 넘겼지만 16일 출근하면서부터 우리말 방송을 이어왔던 직원들은 방송국 명칭부터 새로 정해서 현판을 걸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정해진 이름이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이다.「경성 중앙방송국」 간판은 그대로 두고 우선 문제안 아나운서가 스스로 먹을 갈아 합판에 영어로 「SEOUL RADIO STAITION」 이라고 써서 현관에 걸었다. 그런데 워낙 급하게 써 걸다 보니 STATION이라고 써야 할 것을 I자가 더 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썼다고 했다. 간판을 건 그 자리에서 방송국 간부와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안 아나운서는 이혜구 제2보도과장으로부터 "오늘부터 기사 취재에 임하라"는 구두 발령을 받는다. 이것이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의 탄생이었지만 그때는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도 잘 모르고 열심히 취재만 하러 다녔다는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3. 방송국 접수소동 8.15 일본천왕의 항복방송을 하던 다음날 8월 16일부터 건국준비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좌익계열의 방송국 접수 기도는 집요했고 갖은 협박과 공갈이 수반되었다. 16일 아침 목총을 들고 방송국 경비를 하겠다고 들어온 청년들은 방송국을 자기들에게 남기라는 요구를 해 왔다. 오랜 세월 방송국과 함께 해 왔던 이혜구 제 2 보도과장을 비롯해서 이정섭, 김억, 김진섭 등은 이들을 맞아서 방송국을 내어 줄 수 없고 앞으로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협조 해 가자면서 설득했다. 이런 와중에서 또다시 일본군이 방송국을 점령했다. 조선방송협회에 근무하던 일본방송인들의 모임 조선방송협회 에서 1980년대에 발행한 회고록을 보면 그때 일본 방송인들이 일본군 당국에 방송국 진입을 요구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패망하고 쫓겨 갔어야 할 일본군이 착검한 장총으로 무장하고 방송국을 점령해서 그들의 군화발로 짓밟은 것이다. 그로부터 미군이 들어오던 9월 9일까지 그들은 방송국을 점령 하고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고 항복조인식을 하던 날 물러났다. 그러자 또 방송국이 자기들 것이라고 나서는 세력이 나타났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일단의 무리들이 방송국을 찾아와서는 방송국을 자기들에게 인계하라느니, 무슨 내용의 방송을 하라느니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 인공내각을 구성했으니 방송을 통해서 발표하라느니 해방공간의 무정부 상태에서 납득 할 수 없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어려움 속에서도 방송국을 지켜온 방송인들은 정당한 통치권을 행사 할 수 있는 정부가 아닌 어느 임의단체에 방송국을 절대로 넘겨 줄 수는 없다면서 큰 갈등이 빚어진 가운데 9월 15일을 미군이 접수 미 군정소속이 되었다. 4. 해방후 저명인사 첫방송 안재홍 해방을 맞아 무정부 상태가 되고 국민모두가 어찌 할바를 모르는 상황을 맞아 방송국에서는 국민들의 마음을 안정 시키고 앞으로 나라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고 있으면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안재홍을 방송출연자로 모셨다. 그러나 방송국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이 안재홍의 방송국 출입을 저지하면서 일본군과 실랑이를 거듭했다. 안재홍선생님은 그날 한복을 입었다고 했는데 그 사진이 없다. 방송국은 총독부 정무총감과의 통화로 안재홍의 출입이 허용되어 예정보다 늦은 오후 두시가 넘은 시간에 방송녹음을 했다. 이날 안재홍은 “우리민족의 앞날에는 희망이 올 따름이니 냉정하고 침착하라” 는 요지의 방송녹음을 해서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하는 터에 계속적인 반복 방송으로 뉴스해갈과 치안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5. 해방후 일본군 방송국 점령 미군이 올 때까지는 방송국을 자기들이 지키겠다며 8월 17일에 들어온 일본군이 장총에 착검을 하고 스튜디오와 사무실 등 방송국을 차지해 버렸고 우리 방송인들은 해방된 방송국 안에서 오히려 포로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그때의 일을 문제안 기자는 "그 놈들 하는 꼴을 지켜 보자니, 보통 기분 나쁜 게 아니었지만, 속수무책 이었어요. 18일부터 9월 9일까지 주로 음악만 내 보냈지요.”라고 그때 그 일을 털어놓았다. 6. 소련 진주와 남북방송 단절 1945년 8월 26일 우리나라와 국경이 맞 닿아있는 소련은 8.15해방 전 8월 13일 청진방송국을 폭파하는 등 벌써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를 점령 했다. 일본의 항복에 즈음해서는 미주리 함상의 항복조인도 있기 전에 (미주리한 조인 : 1945년 9월 2일) 8월 20일 원산항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8월 22일 평양에 도착, 일본인을 내 보내면서 8월 26일부터 서울과 연결된 전용방송 회선을 절단시켰다. 국민들은 3.8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몰랐던 그때 남북 간의 방송은 단절되었고 분단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남북방송국간에 중계방송도 하고 방송이 나가지 않은 시간에는 소식도 주고받던 그 방송회선이었는데 갑자기 그 회선이 단절되어 우리는 방송회선 사고인줄 알았다. 회선복구를 위해 힘을 기울이려 했지만 복구 될 수 없는 회선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이 일은 3.8선을 기점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키로 한 이래 3.8선을 실감케 하는 최초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25 때 북한을 수복해서 방송한 잠시 기간을 제외하고는 남·북 간의 방송회선은 단절되어 있다. 카이로 회담이나 포츠담회담 결과가 남북분단의 씨앗이라면 북한의 소련진주 곧 이은 방송 단절은 남북 분단이 현실화 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8월 25일 까지는 중앙방송국과 북한을 포함한 전국 지방 방송국이 전화회전으로 링크를 구성해서 전국 방송을 했다. 전쟁목적 달성을 위해 편의상 미군과 소련 군대가 나누어 들어온다고 해도 국민들은 남과 북이 갈라질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따라서 방송이 끊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8월 26일부터 남. 북한방송과 연결된 유선 선로가 끊어지고 북한에서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을 때 단순한 선로 고장으로만 알았다. 회선 중단 상태가 지속 되면서 북한방송을 모니터도 하고 검토도 해 보았으나 몇일이 지나도 북한방송에서는 여전히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고 소련군의 진주소식과 환영방송을 되풀이 하는 등 몇 일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북한에서 서울방송을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는 남한에 아직 미군이 들어오기도 전 이었는데 이런 상태로 시일이 지나다가 갑자기 평양방송에서 9월 말부터 북한에 임시 정부가 선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되면서 북한의 추이를 평양방송을 통해서 알게 되는 그야말로 민족비극 남·북 분단의 싹이 트고 있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소련은 계획된 시나리오를 실천 해 가고 있었으며 북한의 방송은 이미 정통성이 사라져 버렸다. 스타린과 그 앞잡이 김일성을 우상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되어 가면서 방송인들은 기회를 보다가 남한으로 온 분들이 많았다. 인기아나운서 홍양보를 비롯해서 장세균, 김광국 등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들과 김원용 등 많은 기술자 들이 사선을 넘어 월남했다. 회선이 단절되기전 까지 북한에는 평양을 비롯해서 청진, 함흥. 원산, 신의주, 해주, 성진 등 7개의 방송국이 있었다. *.일제가 항복하기 전인 1945년 2월에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 모여서 일본 패망 뒤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일본이 패망하면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기로 합의에 따라 소련은 잽싸게 북한을 점령하고 제1차로 서울방송 중계를 중지 시키면서 3.8선을 경계로 분단을 현실화 시켜, 6.25를 거치며 휴전선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말았다. 7. 미군진주와 방송
9월 9일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9월 8일 밤, 방송국에는 미리 와 있던 미군 선발대가 들어와 사정을 살폈고 9월 9일은 미군이 서울에 입성한 날이었다. 원래는 하루전에 오려고 했지만 해상의 기후가 고르지 않아 하루가 늦어진 것이다. 방송국은 그 역사적인 순간을 중계 방송해야 된다고 준비를 서둘렀지만 현실을 잘 모르는 미군은 방송국의 취재나 중계방송을 허용하지 않는 등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의 방송국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이혜구 과장과 유일한 방송 취재기자 문제안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다. (조선 일보는 그해 11월 23일에 복간 되었고 동아일보는 12월 1일에 복간되어서 주요 신문이 없을 때였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당일인 9월 8일 중잉방송국에서는 미군의 인천상륙상황을 녹음취재하기 위해 이혜구 제2보도과장이 용산 일본군기지에 부평을 통과 할 수 있는 완장을 청구하러 갔다. 당연히 완장을 받아 현장 취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 일을 맞고 있던 일본군 장교가 "자기는 신문기자에게 완장을 주라는 명령만 받았지 방송국 녹음반 까지 주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안 된다"고 했다. 이혜구과장은 방송국도 보도기관이니 허락해야 된다고 한참 실랑이를 했으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나운서들은 군의 허가가 없더라도 갈수 있는데 까지 가서 되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랜 기간 방송국 생활을 했던 운전기사 민병선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기가 운전 하겠다고 지원해서 강행방법을 의논하고 있을 때 마침 미군으로부터 방송기자를 인천 으로 파견하라는 쪽지가 왔다. 그것은 미군 진주의 준비를 위해서 이미 8월 26일에 상륙 해 있던 미군선발대 정보장교가 보낸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한덕봉, 이종일, 이순기, 양기승 등으로 구성된 방송 녹음 반은 인천으로 즉시 달려가 미군들의 움직임을 녹음해서 기사와 함께 서울로 급히 보내 이날 밤 미군의 상륙은 역사적인 큰 뉴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방송 되었다. 미군상륙으로 인천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지만 하지중장의 명령에 따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인천 전역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일찍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가게 문들도 모두 문을 닫아 취재팀이 일을 끝내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았지만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미군은 다음날 9월 9일 아침 서울로 이동했고 방송 취재팀도 이들을 따라 서울로 왔다. 문제안기자의 말애 따르면 "이날 미군의 서울입성을 실황중계하기 위해 민재호, 문제안이 서울역 앞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화려한 용어를 쓸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중계방송 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보무도 당당히 행군해 들어올 줄 알았던 미군은 자동차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기대했던 중계방송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고 했다. 미군은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 근처에서일부가 행군 해 들어갔지만 선로이동의 어려움 등으로 이동방송을 할 수 없었던 터라 중계방송은 더 이상 할 처지가 못 되었고 오후에 있을 조인식 실황 중계방송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부터 역사적인 중앙청에서 하지와 아배간의 항복 조인식이 있었다. 총독부에 휘날리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오르면서 미국 군정의 시작을 알렸다. 항복조인식은 중앙청 (당시는 총독부) 제일 회의실에서 있었고 그 실황은 민재호 아나운서와 일본인 아나운서 한명이 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중계 방송해서 세상에 알렸다. 이때도 중계뱡송에 참여할 인원을 놓고 실랑이가 있었다. 8일 인천에 갔던 엔지니어 팀과 우리방송인으로 민재호 아나운서, 문제안기자 그리고 일본방송인 각각 두 사람씩 현장에 갔지만 민재호 아나운서와 일본인 아나운서 한사람씩만 현장에 들어가 중계방송을 할 수가 있었다. 그날 조인식에 참여한 장운표 아나운서는 인천에서부터 방송국 아나운서임을 밝히고 독자적인 취재를 하게 되어 역사적인 조인식 현장에서 추재 활동을 했고 문제안 기자는 그 많은 역사적인 현장에서 취재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인 현장에 가지 못한 것을 안타가워 했다.
조인식은 양측 문이 열리면서 하지중장 일행과 아배총독 일행이 예정시간에 들어왔다. 이때 아배 총독은 할복자살 미수의 상처 입은 몸을 부축 받으면서 천천히 입장 했다. UP, AP로이터통신 그리고 자유중국 기자 등 20여명과 연합국 측 영화사 카메라 멘들도 취재 했고 식이 끝난 4시 35분에는 중앙청 앞뜰의 국기 게양대 앞에서 미군 군악대의 취주와 중앙청 울타리를 둘러싼 군중들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본 국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랐다.
8. 2차대전 마지막 격전장 청진방송국의 비극 소련군이 진주 하면서 격전을 벌린 청진방송국은 우리나라에서 2차 대전 중 파괴된 유일한 방송국이다. 청진방송국은 우리나라 최북단에 자리 잡은 방송국으로 중국, 소련과 국경이 멀지않은 지역이어서 일본이 전략적 으로 10Kw 대 출력으로 설치한 방송국이기도 하다. 지방방송국으로는 부산, 평양에 이어 세 번 째로 설치된 방송국이고 고말산 중턱 동해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면서 청진 시내에서도 4 - 5Km나 떨어진 지역이어서 시내 내왕이 쉽지도 않은 지역이었다. 이 청진방송국을 2차대전 끝자락에서 소련군이 점령의 첫째 목표로 삼아 격전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곧이어 청진 앞바다에 나타나 제1 공격목표이기도 한 청진방송국에 함포사격을 가해서 방송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8월 13일에 이르러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방송국은 폭파되어 사산 조각이 되고 이 안에 있던 방송인들이나 일본군이 모두 산화하는 비극 속에서 청진방송국은 사라젔으며 일본인 방송인과 가족을 포함한 40여명은 청진방송국장 부인 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의 자폭이라고도 하고 소련군의 포격 때문이었다고도 하지만 그때 그 상황을 정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청진방송국장 부인이 시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흥방송국까지 와서 그때의 얘기를 했지만 그 내용도 정확한 것은 될 수 없었다. 책임을 맡았던 군 부대장이 한 말도 있지만 그도 직접 그곳에 참여한 것은 아니어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청진방송국에는 조선인 직원들도 있었지만 중경방송과 VOA방송등을 통해서 상황을 다소 알고 있었고 조선인은 일본에 협조하지 마라는 방송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사전에 방송국을 떠나 마지막 포격에 피해를 입은 조선 방송인은 없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일에 관한 얘기가 별로 없지만 일본 방송사는 청진방송국장 부인의 얘기를 토대로 해서 쓴 함흥 방송국장 얘기를 중심으로 방송사에 기록이 있고 또 일본 전사에는 군 부대장의 말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 있다. 자세한 얘기는 관련글을 연결한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해방이 되었을 때, 겨우 백일정도였던 사람이 그 감격을 완전히 느낀 다는건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 볼 때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애국심이 그 든든한 뿌리가 약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이지만,어느나라건, 역사와 자기네 고유의 언어교육은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한국방송 90년 (6) 방송의 독립과 KBS 시발점 최초의 직제 임원 http://blog.daum.net/jc21th/17783104 한국방송 90년 (3) 해방의 날로부터 항복조인식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3101 한국방송 90년 역사 (2) 경성방송국 JODK편 http://blog.daum.net/jc21th/17783100 한국방송 90년 역사 (1) 2017년 2월 16일 시작하는 말 동영상, 일본 히로히토(도) 항복 목소리와 항복문서 1945년 8월 15일 http://blog.daum.net/jc21th/17781127 1945년 광복의 날을 맞은 경성방송국, 그 최후의 날 http://blog.daum.net/jc21th/17780905 2차대전 마지막 격전장 청진방송국의 비극 http://blog.daum.net/jc21th/17780757 해방정국 한달간의 무정부 상태와 방송국 접수소동 http://blog.daum.net/jc21th/17780912 대한민국의 첫 방송기자(문제안)가 탄생하던 날 1945년 8월 16일 http://blog.daum.net/jc21th/17780906 문제안 선생님 육성과 영상으로 보는 8.15 해방의 날 http://blog.daum.net/jc21th/17780164 남. 북 분단 비극의 싹 8.26 북한의 남한방송 일방적 중단 http://blog.daum.net/jc21th/17780911 해방공간의 첫 방송출연자 안재홍과 방송장악을 위한 세력갈등 http://blog.daum.net/jc21th/17780907 해방을 맞던날 방송국에선, 그때 아나운서들의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02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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