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역사 90년

한국방송 90년 역사 (6) 방송의 독립과 KBS 시발점 최초의 직제 임원

이장춘 2017. 2. 6. 22:11



 

 

유튜부에서 보기  https://youtu.be/a45lZI1N3ts

 

 

1. 방송의 독립



해방이 되었다지만 일본군이

 방송국을 점령하고 있고 일본방송인

 있을 때까지는 독립된 방송국이 아니었다.

 한 달 가까운 세월이 흘러 9월 9일 미군이 들어오고

 일본이 항복조인을 하던 날 우리방송인들은 일본방송인

들을 밀어 내고 KBS콜사인으로 우리방송을 했다. 1927년

 2월 16일 단일 채널로 방송하다가 1933년 4월 26일부터

 실시된 우리말 전담채널 제2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파관재를 실시하면서 다시 단일방송채널로 되어

 일본어방송 채널인 제1방송 더부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었다.


전파관제 때 제2방송 채널이

 없어져 우리말 방송이 중단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제1방송 더부살이를

한 것이지행이도 우리말 방송이 중단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45년 9월 9일부터 우리방송

채널로 돌아 왔을 때 처음에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병행하다가        일본말을 차츰 줄여 그해

 12월 초까지 일본말 방송은 사라졌다.


일본방송인들은 9월 말까지

해직되고 대부분 물러갔지만 나카무라

아나운서는 군정청의 요청으로 12월 초까지

 머물며 방송을 했다. 전쟁 중 전파관재로 사용이

중지되었던 50Kw 대 출력은  해방되어 방송하려고

했을 때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4개월여에 걸친

보수공사를 실시해서 그해 12월 25일부터 방송을

 할수 있게 되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아래

  ‘KBS 호출부호   시발점과 변천’

에서 설명한다.





2. KBS 호출부호 시발점과 변천



해방과 동시에 JODK라는

 (일본이 정한) 국제 호출부호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8월 16일부터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

영문자로

SEOUL RADIO STAITION」


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9월 9일 오후 4시 미군이

 중앙청에서 이배 총독으로부터

 항복서명을 받고 일장기가 내려지면서

 그날 오후 5시부터 경성방송국 제1방송이

 우리 손으로 돌아 올 때부터 KBS 콜사인으로

 방송되었다.    1945년 9월 9일부터 1947년

9월 말까지 임시로 사용된 국제 콜사인은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의, 긴 영문이었다.


여기에서 KBS 라고 하는

 영어 약칭이 쓰인 것이다.  이때는

15분마다 이 콜사인을 넣었다.   방송

프로그램이 30분 짜리이면 15분이 지난 후

프로그램을   잠시 끊고 중간에 이 콜사인을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선통신규칙에 충실한

 나머지 청취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은 한국방송공사 정관에 "KBS"는 ‘Korea

Broadcasting System’ 의 약자임 

명시되어 있다. 


경성 중앙방송국 호칭은

언제까지 썼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

이나 얘기를 들려줄 분은 없다. 군정청이

 1945년 9월 14일을 기해서 경성 표기를 서울로

 바꾸도록 일괄조치 했으므로 이때부터 서울중앙

방송국 호칭을 썼을 것으로 본다. 1953년 8월부터

 약 4년간 서울 지방방송국 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지역방송국은 해당 지역 명에 "방송국"을 붙이면

되는 것이어서 따로 생각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해방될 때 상황을 이끌었던

 문제안 기자와 이덕근 아나운서의

 기록을 인용한다.



문제안 기자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땡’ 하고 도쿄에서 오는 오후 5시 시보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꺼버려!’ 하고 제가 외쳤

습니다. 누군가 달려들어 스위치를 끊고, 윤용로

(尹用老)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국말

방송은 이제부터 제1방송으로 방송 합니다’

 하고 마이크에 대고 알렸습니다.”



이덕근 아나운서




이날(1945년 9월 9일)이

방송국으로서는 가장 뜻 깊은 날이

 되었다. 하오 4시에 한국인 직원들이 일본인

직원들에게 제1방송과 제2방송의 지휘를 바꾸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직원들은 그런 명령은

미군만이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 약간의 말썽이

있었다. 높은 언성이 오갔는데 여기에 화가 난 내가

 "기미라 이쓰마에 간바루 쓰모리까" (“자네들

언제까지 버틸 것이냐?") 고한마디 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이때가 5시로 뉴스시간이었다.

제1방송은 동경에서 오는 시보와 뉴스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인 직원들이 아무 말 못하는

사이에    한국인 직원이 제1방송실로 뛰어 올라가

시보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뉴스를 끊고 우리말 방송을

해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혜구씨가 제1방송과

제2방송을 바꾸는 절차를 서식으로 확인하자고

요구하여 즉석에서 미농지에 대고   문안을

 만들고 일본인     직원이   서무과에서

도장함(函)을  갖고 와서 찍었다.


이혜구 과장이 먼저 부른 사람이

문제안씨였다.     이 서류를 체신국에

제출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9월 9일, 이때부터

지금까지 쓰던 "JODK" 콜사인은 물론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의 명칭도 없애고 새로 "KBS" 콜사인을 채택

했다. 방송국이 한국인의 손에 넘어오자 경성 중앙방송국장

 겸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이던 일본인 시노하라는 전국 각

 지방방송국을 향해 "여러분 이제 한국은 독립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한국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고

 과학자다운 말을 했다.


해방되던 그때 근무했던

 두 방송인을 통해서 그날의 얘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쓰던 호출부호,

 "JODK" 콜사인이 사라진 것은 물론 '「SEOUL

RADIO STAITION」「서울 라디오 스테이션」도

사라지고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KBS」가 이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그간에 방송사 명칭이나

시스템은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사단법인

대한방송협회,   군정청 방송국, 국영방송,

 공영방송으로 변천되어 왔지만   ‘KBS’는 1945년

9월 9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어 왔다.     처음에는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

 라는 ‘긴 호출부호를 원문 그대로 방송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고 들었는데 어느 때부터 「KOREAN

 BROADCASTING SYSTEM」으로 바뀌었는지

또 어느 때부터 이니셜 ‘KBS' 만 사용

했는지 확인이 잘 안 된다.


(필자는 HL 국제호출부호가

사용 될 때부터 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사용했다는 설이

 있어서 확인요함)


1972년 한국방송공사법

(1973년 3월 3일 공사발족)이 제정

공포 될 때 회사의   이름은 그 공사법

제1조에 의해 「한국방송공사」라 정했고,

이 법의 위임에 따라 제정된    한국방송공사

정관에서는 우리말 회사명과 더불어   영어명칭도

 규정했다.  그 때까지 오랜 기간 사용돼온「KOREAN

 BROADCASTING  SYSTEM      (약칭 KBS)」 

「한국방송공사」의   영어명칭으로, 그리고

그 이니셜인「KBS」를 영어이름 약칭

으로 채택한 것이다.





호출부호 HL은 미국 뉴저지 주

에틀란타시에서 열린 국제 전기 통신기구

(ITU - International Te-le Communication Union)

에서 1947년    9월 3일 부여받아 10월 1일부터 사용

되었고 방송의 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방송의 날

 제정 유래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쓸 것임)


HL은 KBS는 물론 MBC나

 SBS등의 본사ㆍ지역국ㆍ계열사 또

아마츄어 무선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시간이나 프로그램이 바뀔 때 이

 호출부호를 의무적으로   방송하도록 되어

 있다. 참고로 필자가 1963년 방송국에

들어 왔을 때는 KBS와 해당방송

 호출부호 를 함께 썼다.


예를 들면


『KBS 여기는 서울 중앙방송국 제1방송 입니다. HLKA』

『KBS 여기는 서울 중앙방송국 제2방송 입니다. HLCA』

『KBS 여기는 서울입니다. HLSA』(국제방송국 대공방송)

『KBS여기는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Voice of Free Korea)입니다.』

(국제방송국 해외방송)

『KBS 여기는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입니다. HLCK』

지방방송국은 KBS에 각 방송국 호출부호를 썼다.



3. 운명의 1945년 9월 15일 방송국에선


9월 15일은 방송국에

 변화가 많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본인 운영(간부)진에 대한 군정청의

 해임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우리 방송인들이

 회의를 열어서 새로운 직제를 정하고 방송국 운영진

선임했다.    또 그 회의가 조선방송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는동안     건국준비 위원회가 ‘인민공화국

내각을 구성’ 했다면서     방송을 통해서 그 명단을

발표하라며 큰 소란을 피웠다. 그런 가운데  그날

 저녁 예고 없이  무장을 하고   찾아든  미군이

 방송국을 접수하면서    방송이 하루

가까이 중단된 날이기도 했다.


6.25 전쟁기간을 제외하고는

 KBS 중앙방송국이 그토록 장시간

  중단된 적은 없었다. 이날은 방송사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차례로 자세한 설명을 올릴 것이다.



4. 방송국 운영(간부)진 선임



9월 15일 일본인 운영

(간부)진에 대한 군정청의

해임명령이 이루워 짐에 따라

방송국에서는  전체 직원회의를

 열어         임시직제를 마련하고

운영진(간부진)을 선춯 했다.



조선방송협회장

이정섭




경성중앙방송국장

이혜구

서무부장 김억

편성부장 김진섭

방송부장 이계원



우리방송인들이 자율적으로 

선임한 최초의 방송운영진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미군의 방송국접수가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부터 방송을 해 오던

 방송인들은 사의를 표명했지만 군정청의 만류로

방송인들은 일단 모두 유임하기로 했다. 그때 일을

   경성중앙방송국장 이혜구는 그의 저서  ‘문채록’  

‘종횡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하루는 직원들이 방송국장실에

소집되었다. 그 날짜는 확실치 않지만

10월 16일    이승만 박사 귀국 전이었다.

국장 테이블 뒤에    얼굴이 하얗고 갸름한

미국인 캪튼 “퍼시빌”이 우리를 맞대하고

앉아서 직원의 성명과 경력을 일일이

 묻고 나더니 방송을 종전대로 계속

하라고 지시하였다.


일제시대에 방송에 종사한

 직원은 일단 사양하였으나 캪튼은

 방송경력을 가진 사람이 안하면 누가

 하느냐고 일소에 붙여 버렸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들어 설 때까지

 다시 맡기로 하였다.


위 글 이혜구 ‘문채록’ ‘종횡담’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군은

1945년 10월 1일자로 조선방송협회

 (38선 이남의 10개의 방송국)의 일본인

직원과    간부는 모두 파면되고 

조선인으로 새로 선임했다.



조선방송협회장 이정섭


기술부장 한덕봉

서무과장 권태웅

총무부장 이정섭


조선방송협회 산하에

중앙방송국괴

전국의 각 지방방송국이

있었습니다.

 혼돈 없으시길 바랍니다,


중앙방송국장 이혜구


편성과장 김진섭

 방송과장 이계원

 업무과장 김   억


 

1945년 10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 보도 내용 

 

10월 1일 미국 정부 당사자의

발표에 의하면 조선방송협회 (北緯 38도

 이남의 10개소의 방송국을 포함)의 일본인 직원과

 과장은 모두 파면되고 새로 조선인이 취임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당분간 이들 일본인은 고문과 같이 유임한다. 또

해상방송을 하고 있던 인천 해상방송국을 폐지하고

 직원들은 지방체신국으로 전근시키기로 되었다.

방송협회의 조선인 간부는 다음과 같다.





會長代理 李晶燮

庶務課長 權泰雄

總務部長 李晶燮

技術部長 韓德奉 

 


지방 방송국장


부산 박찬주

대구 이현택

이리 허   

광주 엄상선

대전 김봉열

목포 진말봉

마산 오기영

춘천 지윤상

청주 문돈식,

강능 전영설


이 임명되었다.

  


해방 되던때 조선방송협회에

 근무하던 직원은   일본인 간자(甘蔗)

회장을 비롯해서 모두     1,034명이었고

가운데 일본인은 281명이었다. 일본인이

숫자는 적었어도 주요 직책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보직을 갖은 우리방송인은

이혜구 제2보도과장과    이정섭 기획과장,

권태웅 총무과장, 한덕봉 기술과 부과장,

 이리 업무과장 신경석이 있었다.


 이분들은 해방된 뒤

우리방송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이밖에도

 오랫동안   경성방송국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했던 시인 김억,   수필가

김진섭, 이계원 등이 새로운 보직을

 받아 방송국을 이끌어갔다. 



청말 김경영 선생님 글

2017.02.08 10:03


김무생아나운서님!

아니 참빛교회집사님, 5남

김경영집사입니다. 블로그에 한번

방문한다 하면서도 미루다 이제야 등업을

하게 되었네요자료들을 보며     한국방송의

 현대사를  한 눈에 보는듯 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자주 등업해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무생폭발열차 화이팅~~!!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한국방송 90년 (6) 방송의 독립과 KBS 시발점 최초의 직제 임원

http://blog.daum.net/jc21th/17783104


한국방송 90년 (3) 해방의 날로부터 항복조인식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3101


한국방송 90년 역사 (2) 경성방송국 JODK편

http://blog.daum.net/jc21th/17783100


한국방송 90년 역사 (1) 2017년 2월 16일 시작하는 말


해방 후 최초로 선임된 전국 방송국 책임자


해방정국의 방송국, 미 군정청 접수와 방송고문단

 http://blog.daum.net/jc21th/17780914


해방공간 1945년 9월의 방송가와 KBS 콜사인, 방송의 날

 http://blog.daum.net/jc21th/1778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