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G2mE6shOkKI 여로 TV방송사상 최고의 시청율 70%! 1972년 그때 그 드라마 이납섭, 장욱제, 태현실을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서게 해로 여로 女路, 45년 반세기가 흐른 오늘까지도 그 선풍적인 인기를 능가하는 프로그램 은 없었다. 그 시대를 살던 분들은 여로의 선풍적인 현장을 기억하며 영구를 떠 올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화에서 드라마 에서 영구를 흉내 내려고 하는 배우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의 그 영구를 흉내 낼 수 없었다. 춘하추동방송에 글을 올리던 때로부터 여로에 관한 글을 올렸고 오늘 그 글들을 정리해서 올리면서 그동안 올렸던 글들을 한데 모어 연결했다. 여로 女路, 이납섭, 장욱제(장욱재), 태현실, 주제곡 이미자 녹화테이프를 보관 할 수 없던 시절 이라 이토록 귀한 역사적인 프로그램마저 한편도 제대로 보존된 프로그램은 없다. KBS가 보유한 몇토막의 여로 드라마가 그 전부다. 오늘의 춘하추동방송 머리 동영상! 그 몇토막의 동영상을 활용해서 재 편집한 동영상을 보고 계신다. 이정도 라도 남아 있어서 그때의 그 드라마 그리고 영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짧고도 짧은 그날의 여로에 조금의 살을 붙여 오늘의 동영상을 올렸다. 여로 女路 프로그램 이름이 말해 주듯이 한 여자의 힐생을 통해서 일제강점기부터 한게레, 한민족의 삶의 애환을 그린 프로그램이라 여자 주인공이 당연히 돗 보일 수 있었던 이 프로그램에서 뜻 밖에도 영구라는 남자 주인공이 인기몰이를 하면서 여자 주인공을 비롯해서 모든 출연자들는 당대의 최대 스타로 부상했다. 동영상에서 여자 주인공 태현실이 들려주었듯이 영구는 특유의 연기력 애드리브를 통해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 주어 날이면 날마다 시청자들은 여로를 보지 않으면 하루를 넘길 수 없었다. TV수상기 80만대이던 시절, 서울인구가 500만이 채 안되던 시절, 시 골 농촌 큰 마을이라야 한, 두 대의 수상기가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 ! 수상기가 있는 집이면 동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도시에서도 수상기가 없는 사람들은 이웃집으로 또 다방으로, 만홧가게로 모여들었다. 코 묻은 돈을 모으던 동내 만홧가게는 입장료를 받고도 앉을 자리가 없어 만홧가게를 해서 돈을 번 분들도 꾀 생겼다. 버스도 택시도 그 시간에는 장사가 안 되었다. 해수욕장에서 여로를 시청하려는 피서객들이 TV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바람에 백사장이 텅텅 비었다는 일화도 있었는가 하 주부들이 저녁을 준비할 시간에 드라마가 방영되어 전국의 부엌에서는 밥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구(장욱제)의 머리 가운데 부분에 허옇게 생긴 기계 충 모양이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재로 기계 충 머리비즘(?)이 그리도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흉내 내는 사람들까지 생겨서 웃지 못 할 머리비즘 유행병이 돌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호황을 이루었던 영화관이 어려움을 겪고 그 시간에 영화관을 찾은 사람이 있어도 여로 방영시간이 되어서는 여로를 보아야 해서 영화관 복도나 휴게실 등에는 TV를 설치해서 여로를 보여주는 기이한 풍경도 있었다.. 남자들의 퇴근시간이 빨라져 가정주부들의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주인공 영구가 울면 따라서 울고, 병신 짓을 하면 따라서 병신 짓을 하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피서지 해수욕장에 놀러간 사람들이 여로를 보기 위해 TV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이로부터 라디오 전성시대는 저물어가고 TV시대를 맞으면서 TV에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고TV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도구로 변했다. 돈이 없어도 대학졸업 초봉 5개월분에서 7개월분을 주어야 사는 16인치 흑백 수상기를 사기 위해 모여 들었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사려고 했고 월남에 갔다 돌아온 병정들은 수상기 티켓 두 장 씩은 가지고 와서 스스로 보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외국 갔다 돌아올 때면 수상기가 제일 큰 재산목록이었다. 1960년대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생활의 반려자를 삼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아오던 국민들은 1970년대 들어 1971년 TBC의 아씨와 곧 이은 1972년4월 3일부터 방영된 여로를 거치며 생활의 풍속도를 바꾸어 버렸다. TV의 전국 방송망구축과 국산 TV생산으로 수상기가 급격히 늘어나던 때와 맞물려 그때까지의 라디오 전성시대, 영화 전성시대는 뒤안길로 접어들고 TV시대를 맞이했다. 여로가 방영되기 전 까지만 해도 80만대에 불과하던 TV수상기는 1970년대를 거치며 600만대에 이르렀고 1980년에는 칼라 TV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때 여로 시청률이 70%가 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청률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웃이나, 다방, 만홧가게 등에서 던지 TV를 볼 수 있는 분들은 만사를 뒤로하고 그 프로그램을 보아야 했고 TV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TV를 보았던 시절에 시청률 자체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여로 내용 1972년 4월 3일 부터 12월까지 저녁 7시 반부터 50분까지 211회가 방영 되었다 . 여주인공 분이는 (태현실) 일제 강점기로부터 5. 16후까지 20년간 격동기를 살아온 대한민의 강인한 여성상의 표출이기도 했다. 여로는 멜로드라마 이면서도 멜로드라마를 뛰어넘는 드라마라고 평가 되었다. 작품의 제목을 딴 상품과 상호가 생겨났고, 남자 주인공 이름인‘영구’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여로'는 전형적인 시대 비극이었다. 1942년부터 1962년까지를 배경으로 가난 때문에여주 유지인 최주사의 아들 영구의 짝으로 씨받이 겸해서 팔려온 술집 작부 출신의 분이가 겪는 고생담이다. 신랑 영구는 지능이 모자라고 신체가 불편 해서 지능은 기껏해야 '아버지야 제기차기 하자'는 말을 할 정도에 불과했다. 나이 스물이 되서도 글 한 줄 읽을 줄 몰랐다. 분이는 비록 머리가 모자라지만 남편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려 하고 영구도 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분이는 시집온 그날부터 극성맞은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권미혜) 사이에서갖은 고초를 당했다. 시어머니 윤 씨는 며느리 분이를 구박하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달중(김무영)이 툭하면 시어머니와 흉계를 꾸며 어려움은 더했다.아들 기웅(송승환)을 낳고 행복한 시간도 잠깐, 분이는 술집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탄로나 남편, 아들과 생이별을 당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분이와 영구는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지만 과거가 들통 나 시어머니에게 쫓겨난다. 6.25 기간 동안 피란지 부산에서 국밥집을 하며 큰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또 10년이 흐르고 국밥장사를 해서 모은 돈을 사회에 환원한 분이의 미담 기사가 신문에 실려 마침내 대전역 대합실에서 온 가족이 눈물의 상봉을 한다. 분이가 사놓은 옛날 최주사의 집으로 가는 마지막만은 해피엔딩이었다.
영구 역의 장욱제와 그의 부인 분이로 나온 태현실은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다. 두분은 생년월일 1942년 11월 11일또 같다. 생일이 같은것을 안날로 부터 생일을 함께 지냈다고 했다. 태현실이 말 하기를 '이런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면 처제 자녀를 둔다고 했는데 그래서 여로가 그히도 큰 히트를 한 것 같다'. 는 말을했다. 여로는그 뒤로 영화나 연극, 드라마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이남섭은 전 KBS사장 홍두표, 전 서울대학교 강현두 교수 등과 함께 KBS-TV 1기 PD였다. 불문학 전공인 님은 작가이고 연출가 이며 TV드라마, 연극, 영화에도 소질을 발휘해서 여로 외에도 임자 있었네, 10분 쇼 등의 극본을 쓰는 등 많은활동을 했다. 불행히도 1987년 일직이 세상을 뜨셨다. 깡마른 체구에 밤낮 없이 일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방송인 이었다. 부인 고 김난영은 KBS-TV 1기 탤런트로 많은 활동을 했지만 이남섭에앞서 세상을 떴다. 프로듀서 김연진이 말하는 이남섭 이남섭 선배 하면 비상한 두뇌와예리한 감각이 생각되면서 아내 김난영이 오버랩되는 것은 부부관계를 떠나 각기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발전을 위해 선구자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작품(작가), 연출(프로듀서) , 연기(탤런트), 이 세 분야 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 멋진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는 신념 하에 텔레비전 드라마를 트리오(trio)의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 연출자로서의 이남섭 선배는 비록 20년 남짓 활동했으나 한국방송사에 길이 남을 큰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 한다.(한국방송작가협회 50년사) <작고작가 회고> 일전 협회보에문공위 이계진 의원이 작품「여로」를 구하려 했으나 끝내 구하지 못해 실망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더 자세히 글을 아래 연결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PC나 CD에 저장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여건이 그러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여담이지만 「여로」라기에 旅路인줄 알았더니 女路라 했다. <여자의 길>이 하도 흔하니 그랬겠지. 자꾸 들으니 그럴 법도 했다.
여로 남자 주연 장욱제(영구) 장욱제는 KBS-TV 탈랜트 4기로 입문해서 방송에 출연하던 중 1972년 여로에 출연하고 그 여로가방송사상 최고의 인기드라마로 빛을 보면서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영구, 바보의 대명사로 오늘까지도 그 이름은 널리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로에서 영구, 병신으로 이메이지가 굳혀진 장욱제의 실제 모습이 궁금하다는분이 많으셔서 그때의 장욱제 실제 모습을 어렵게 구해서 춘하추동 방송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써올린 글을 아래 연결했다. 여로 여자 주연 태현실(분이) 한양대학교 연극 영화과를 다니던 중 1961년 KBS-TV 1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때부터 방송 출연을 하면서 영화에도 출연하다가 1972년 여로에서 주인공 분이 역을 맡으면서 일약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대 스타가 되었다. 자세한 글은 아래 연결한다. 위, 아래 사진은 여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위는 2.유신박(연예계장), 3.김용환 (음악효과), 4.이남섭(극본,연출), 5.박종국(TV 부장), 6.장욱제(남자주연), 7.태현실(여자주연), 8.최창봉(중앙방송 국장), 9.권오진(제2조정과장), 10.오승룡(조정계장),11.김광식, 12.이기호, 13박제영 (음향), 14. 윤광선, 16. 인운섭, 19. 박종대 (카메라)이다. 그날 행사에 사진촬영은 이일로 감독이 담당해서 위 사진에는 님의 얼굴이 없다고 했다. 이일로로 부터 성함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세월이 흘렀고 또 사진 얼글이 작은 데다가 선명치 않으므로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확인 할 수 있는데까지 더 확인해서 성함을 써 넣을 것이다. 아래는 번호따라(이일로님 확인) 1.김용환(음악효과), 2.이남섭(극본, 연출), 3.박제영(음향), 4.유신박(연예계장), 5.박종국 (TV 부장), 6.장욱제(남자주연), 7. 이일로(기술감독), 8.태현실(여자주인공), 9.최창봉(중앙방송국장), 10.권오진(제2조정과장), 11.김무영(탤런트 출연자) 이다. 이 사진은 KBS사우회 회보 2015년 3월호 에 "이 한 장의 사진" 난에도 올라있다. 그날의 사진을 담당했던 이일로는 다음 글을 남겼다. ‘여로’의 마지막 녹화를 마치고 출연진과 스태프, 그리고 최창봉 국장 등 간부들이 당시 을지로에 있던 중국집 아서원에서 쫑(終)파티를 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전주호 선생님 글 (여로 기술감독) 여로 기술감독 전주호 입니다. 에피소드가 매우 많지요. 지금은 작고 하시었지만 여로 작가 겸 PD 이남섭씨 부인 김난영 여사 장욱재 태현실 등등 기술 스탶과 한 50여명이 일주일 6회분읕 아침 10시부터 드라이 리허샬과 카매라 리허샬이 끝난후 녹화에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 6시 아니면 10시에 끝나고 했다. 이럴 때면 김난영씨가 집에서 곰국을 3바게스씩 끌여 와서 밤 12시에 야식으로 나누어 먹곤 했으니 지금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시간외 수당이나 야근 수당 한 푼 받지 않고 오직 책임감과 사명감 으로만 일했으니 당시의 방송국 직원듵이 아니었으면 현재의 KBS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방송제작스탭과 기술스탭들은 당시에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공휴일도 없이 1년 365일을 오직 방송국에 출근하여 근무했으니 애사정신이 아니고 우국충정의 역군이 아니겠는가! 유경환 ( 유카리나) 여사님) 글
여로가 인생의 여로인줄로 생각했었는데, 여자의 인생길 女路였군요. 제가 잠시 떠나있던 시절의 일이여서, 아는게 없지만, 대단한 인기를 몰고왔던 작품이였군요. 제가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보았던 프로그램은 1968년경의 김순철, 남자 오현경 이 나오는 '짚세기 신고 왔네' '파란눈의 머느리'여서 기억을 하고있지요.^ ^춘하추동방송은 이렇듯 어디서 쉽게 구하기 힘든 자료나 기록물 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더욱 그 존재성이 큰 블로그라 생각됩니다. 휴머니스트 님 2017.08.02 22:37 우와 벌써 세월이 45년 전 일인가요^^여로의 방영시간이 되면 TV있는 집에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죠. 그때 여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죠. 태현실씨가 지혜로운 주인공역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죠^^ 김경영 선생님 글 존경하는 이장춘선배님. 한국방송사의 소중한 자료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과거로 회귀하며 아련한 추억과 함께 잊혀진 기억들이 떠올라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마이크 폭발열차'의 김무생아나운서님과 자주 만나다 보니 저도 준방송인?이 되었고 이렇게 인연이 닿았네요감사드리고 더욱 건강하셔서 귀중한 자료들 계속 정리해 주십시오~^^ 여로 주제가 작사 이남섭 작곡 백영호 조래 이미자
그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낄땐 봄나비 나래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날으는 낙엽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무심한 강물위에 잔주름 여울지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언젠가 오랜 옛날 볼우물 예뻤을때 뛰는가슴 사랑으로 부푼적도 있었는데 흐르는 세월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네 무심한 강바람에 흰머리 나부끼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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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의 작가 연출자 이남섭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144 드라마 여로주인공 장욱제(영구)의 실재 모습과 연기모습 http://blog.daum.net/jc21th/17780146 여로의 주인공 장욱제 연기생활과 그의 삶 http://blog.daum.net/jc21th/17780147 동영상. 여로 주인공 태현실이 말하는 여로와 삶의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149
최고 인기드라마 여로의 주제가 / 이미자 http://blog.daum.net/jc21th/17780730 여로 동영상, 다시본 장욱제(영구)와 태현실(분이) KBS-TV 인기드라마 1972년 여로 / 한국방송사상 최고의 시청율 http://blog.daum.net/jc21th/17780143 KBS TV방송을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11 ), 드라마 여로 http://blog.daum.net/jc21th/17780071 여로 종합편, 장욱제(영구), 태현실(분이), 작가 이남섭, 주제곡 이미자
화 보
2011년 2월 장욱제와 태현실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G2mE6shOkKI 여로 동영상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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