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그렇지 않아요. 단지 얼굴이 맑다는 얘기는 들었었지(웃음). 그런데 소리는 일찍 트였어요. 한학을 하신 선친 덕분이지요. 광복이 됐을 때가 초등학교 2 학년. 선친이 고향인 충남 부여 홍산고교 교사였는데, 한글로 나온 신문을 다 갖다 주시고는 소리 내어 읽게 하셨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큰소리로 신문과 교과서 를 읽었습니다. 소리 내 읽다 보니 다 외워지더군요.
이/한: 낭독 훈련을 하셨으니
아나운서가 제격이었겠네요.
허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선친이 중풍으로 쓰 러지시는 바람에 고학으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생활고 를 해결하러 18살 때 초등교사 자격을 취득했지요, 초 임지가 충북 청주였는데, 제가 배웠던 대로 낭독을 중 시하며 가르쳤습니다. 저도 학생들이 물러가면 우편으 로 배달돼온 서울신문을 예전처럼 큰 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7년간 문교부 지정학교 연구교사 로만 있었으니 평가도 좋았던 셈이지요. 그때 같은 학 교 여선생을 반려자로 만나는 행운도 따랐지만, 교편 생활이 적성에 맞지는 많았어요.
원래 제 꿈은 배우였습니다. 고향에서 동네 청년들을 조직해 연극을 만든 적이 있어요. 대본 작성부터 연출, 주연까지 다 했는데, 공연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마을사 람들이 몰려들었던 기억도 나고, 학생들 하교 후에 듣 는 라디오 뉴스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래서 결단 을 내렸습니다. 1962년에 중앙방송국 탤런트 1기 응시 원서를 냈지요. 그런데 수험표를 받으러 가니 수험표가 없는 거예요. 우편으로 보낸 게 마감일 지나 도착했으 니 별 수 없잖아요. 그 이듬해 아나운서 시험을 봤지요.
이/한: 혹시 당시 수험번호를
기억하시는지요?
129번이었습니다.(야!) 아나운서만 방송을 하던 그 시절, 아나운서는 대단한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경쟁 률은 99대 1이었는데, 1차가 음성 테스트, 2차가 실 기, 3차가 면접이었죠. 면접시험까지 통과한 40명이 국어, 헌법, 세계사 등 8과목, 공보부 필답시험을 봤습 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 10명, 여자 10명, 공무원 시험 으로는 최초로 많은 아나운서를 선발한 해였는데, 동 기 중에 저만 끝까지 남았습니다.
이/한: 어떤 프로그램을 맡으셨나요?
지방 근무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 텔레비전 뉴스를 했어요. 라디오 뉴스가 훨씬 영향력이 컸던 때입니다. 특히 <정오뉴스>는 스피커가 있는 곳이면 모두 틀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파급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대 부분 아나운서실장이 담당했지요. 그런데 1965년 중 반 어느 날, 호랑이 방송과장으로 유명한 장기범 선배 님이 아나운서실에 들어오시자마자 큰소리로 “김승한 씨! 내일부터 김승한 씨가 <정오뉴스>를 하세요” 하시 더군요. 입사한 지 만 3년도 안 된 햇병아리를 <정오뉴 스>에 배당하는 모험을 하신 거죠. 훗날 “내 눈이 틀리 지 않았다”고 제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제1라디오 <정오뉴스>를 20 년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장 과장님이 1968년에 “국립영화제작소에 가 봐!” 해서 말씀하신 분을 찾아갔더니 <대한뉴스> 오디 션이더군요. 그때부터 1985년까지 제가 담당했던 <대 한뉴스> 테이프 1,000여 개, 그 외 KBS 영상실록 광복 50년 특집 다큐멘터리 등 내레이션 100여 개 등이 국 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한: 궁금합니다.
장기범 과장님이 왜 선택하셨는지.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해야 하니, 참... ‘좋은 흐름과 억양,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모습’ 이지 않나 싶어요. 당시는 손으로 기사를 적던 시절이 라 기자들의 악필도 잘 읽어내야 했지요. 그래서 저는 5분 뉴스는 꼭 30분 전에, 10분 뉴스는 40분 전에 도착 했어요.(30분 전 또는 40분 전 ‘출발’이 아니라 ‘도착’!) 때론 뉴스 편집이 더 늦을 정도로 너댓 번을 되풀이해 서 읽으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장기범 과장님은 그 걸 눈에 담아두셨었나 봅니다. 저는 퇴근할 때도 지난 뉴스를 가져가 자기 전에 다시 읽었습니다. 술에 취했 어도 뉴스를 읽어야 잠이 왔습니다.
이/한: 다른 프로그램을
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처음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를 맡고 보니 다른 프 로그램 할 시간과 여력이 생기지 않습디다. 또 군사독 재 시절,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형 토목·건축의 기공 식, 준공식 등 의식 중계방송도 무척 많았으니까요. 사 실 축구 중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질 않았습니다. 이/한: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은 무엇이었습니까? 1983년 10월에 아웅산묘역 폭파사건이 있었습니 다. 희생당한 분들의 시신이 도착하는 당일 낮 2시경 보도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시신이 김포공항 에 3시면 도착하는데 운구행렬 중계방송이 편성돼서 방송을 해주셔야겠다”고. 신문에 게재된 희생자 명단 만 오려서 급히 공항으로 갔습니다. 수송기가 연착돼 방송 준비시간은 확보가 됐는데, 문제는 관이 무작위 로 나오는 겁니다. 어떤 분의 관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 에서 의전병은 규칙에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 방송 원고는 없고 말해야 할 시간은 넘치는 상황이었 습니다. 이국에서 희생당한 분들과 그 가족의 비통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가슴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방송했 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게 의식 중계방송이지요.
이/한: 방송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신지요?
장기범 아나운서입니다. 면접시험 때 5명의 면접관 중 가운데 앉으신 분이 묻더군요. “미국에도 외무부장 관이 있습니까?” “미국에선 국무부장관이라고 합니다” “아나운서 봉급이 얼마 되지 않는데, 그냥 교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 게 답했지요. 그분도 후에 들으니 교사 생활을 하셨습 디다. 저를 아나운서의 길에 들어오게 해주시고, <정오 뉴스>, <대한뉴스> 배정 등 인정해주시고, 호의로 대해 주셨습니다. 항상 강조하셨어요. “아나운서는 ‘쪼’가 붙 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합니다만,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 시간 함께한 이규항 아나운서를 참 좋아합니다.
이/한: 선배님 방송은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버 릇없습니다만, 구식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사람이 구식인데(웃음). 정말 그 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도 원고를 대하는 태도에 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네요. 멋을 내고 맛을 내는 것 은 오래가지 못해요. 일부러 멋 부리고 맛 내면 사람들 이 금방 싫증냅니다. 자연스럽게 해야 돼요. 그리고 저 는 뉴스건 내레이션이건 1분에 350-370자 정도를 읽 었어요. 그게 제가 제 억양으로 숨차지 않고 자연스럽 게 낭독할 수 있는 글자 수였지요. 그러다 1985년 부 장으로 진급됐을 때, 간부가 되고나서도 프로그램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습니다.
이/한: 책임자가 되어서는
무엇을 강조하셨습니까?
실장이 되고나서 칠판에 ‘아나운서의 탤런트화 - 변 해야 산다!’고 적고, 1990년 당시 입사한 17기 김병찬, 손범수, 정은아 등 신입사원 교육 방식도 변화를 주었 습니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건전한 끼를 제대로 발산 할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바꾸었다고 자부합니다. 저 는 신인 아나운서들에게 ‘모방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 하지요. 뒤따라한 사람은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자신 만의 색을 찾아 선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한: 아나운서교육장에 대한
감회도 남다르시겠어요.
아나운서는 1927년 방송 개시 이래 늘 시기, 질투의 대상이었지요.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아나운서실 책상 을 재고 있더군요. 기획관리실에 문의했더니 “5분 뉴스 나 하고 잡담하며 쉬는 아나운서실엔 책상 빼고 테이블 만 놓으면 된다.”라고 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 서 사장 주재 확대 간부회의에서 “아나운서는 대기조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항의해 원점으로 되돌려놓았지요. 그 후 5층에서 3층으로 더 큰 사무실을 배정받고 녹화 시설을 갖춘 별도의 교육장도 마련했던 겁니다.
이/한: 실장 시절 추진하신 일,
더 들려주세요.
이규항 김상준 아나운서 공로로 KBS 한국어연구회 가 1990년도 세종문화상을 수상한 일, 연변 연길 흑룡 강성 아나운서들 서울 교육 실시, 1993년 아나운서실 최초로 홍보 책자 제작, 그리고 제가 실장 되었을 때 아 나운서실이 라디오본부 소속이었어요. 아니면 편성 또 는 보도본부 소속이었는데, 사장 직속 부서가 되는 게 숙원사업이었죠. 서영훈 사장이 저희 요구를 들어줬는 데, 제가 전주총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다시 본부 소 속이 되어 안타까웠습니다.
이/한: 그 후 아나운서실 위원으로
정년퇴임 하신 거죠?
정년퇴임 아니었어요. 1994년에 경영진에서 인력 감축을 한다고 하더군요. 직장인으로, 방송인으로 앞 만 보며 열심히 살았고 성실히 봉직했는데... 정년을 1 년 앞두고 명예퇴직 1호로 KBS를 떠났습니다. 이후 불교TV 4년, 그렇게 35년간 아나운서로 일했습니다.
이/한: 동료들이 선배님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고맙고 또 고맙지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상대를 보고 판단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저 자체가 실수가 많 은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기에 제 잣대의 눈금은 느슨할 수밖에 없어요. 포용하고 교 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삶,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추억이 깃든 본관 지하 1층 아나운서
교육장에서 후배 이재후, 한승헌과 함께
이/한: 세월이 흘러서 보니
방송은 무엇이던가요?
노력입니다. ‘방송이기 전에 사람이 돼야한다’는 말 은 진실입니다. 사람이 방송이고 방송이 사람입니다. 좋은 방송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치우치지 않 은 상식, 따뜻한 인간미, 보편적인 관점, 성실함 등. ‘내가 누군데, 이까짓 5분 뉴스...’ 운운하는 사람은 좋 은 방송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사진에서 느낀 인상처럼 간결하고 단호한 그는 평생을 소 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눈으로 읽지 않고 반드시 입으로 읽었다. 그 읽음의 세월은 항상 긴장이었고 숨가빴을 것이 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택한 아나운서의 길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회사 앞 중국음식점에서 아 주 작은 청주 딱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 작별하는 시간, 문 득 그의 등이 궁금해졌다. 남자의 등은 얼굴만큼이나 그 사 람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는가? 여의도공원 쪽을 향해 걸어 가는 그의 등은 아프리카 표범의 등처럼 넘실대며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