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김승한 아나운서 특별대담, 이재후, 한상헌 아나운서

이장춘 2017. 3. 23. 19:59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VtjR5G3pR7s



김승한 아나운서! 1963년 방송국에

 들어와 잠시 지역방송국 근무시기전주방송

총국장 시절을 제외하고  방송국을 퇴직 할때까지

30년가까운 길고 신세월 아나운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줄곧 아나운서실을 지켜온 KBS아나운서실의 산증인이다. 

입사 초기  TV방송 뉴스를 했던 시절로부터     라디오전성

시대에 국민 모두가 듣는 하루 중 가장 중요했던 라디오 뉴스 

낮 12시 뉴스를  김승한 신인 아나운서가 맡아   방송한 이래

 길고 긴 세월 뉴스나 해설방송으로  그리고 행사중계방송

아나운서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18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대한민국 모든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 상영되었던

 대한뉴스 해설자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기억하는

그의 생생한 체험담을 담은 동영상이다.



김승한 아나운서 특별대담, 이재후, 한상헌 아나운서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25호

(2017년 3월 15일자) 초대석에 실릴

 KBS 이재후·한상헌 아나운서의 특별대담

으로 2월 14일 KBS  아나운 서  교육을 위한

스튜디오에서 2시간에 걸쳐  실시된  인터뷰를

27분으로 축소 편집하고      한국나나운서클럽

이재후 · 한상억 이 쓴 기사를 함께 올려 내용이 

보완 될 수 있도록 했다.    끝부분에 김승한

 아나운서 방송사료사진도 함께 올렸다.



한국아나운서클럽 초대석 종이신문






한국아나운서클럽 초대석 내용 




 



 - 유창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뉴스캐스터의 표상


이재후/한상헌(이하 ‘이/한’):


‘1963년 8월 입사’면 당시 유일한 텔레비전

방송국이었죠? 얼굴에 자신이 있으셨군요!


아유, 그렇지 않아요. 단지 얼굴이 맑다는 얘기는
들었었지(웃음). 그런데 소리는 일찍 트였어요. 한학을
하신 선친 덕분이지요. 광복이 됐을 때가 초등학교 2
학년. 선친이 고향인 충남 부여 홍산고교 교사였는데,
한글로 나온 신문을 다 갖다 주시고는 소리 내어 읽게
하셨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큰소리로 신문과 교과서
를 읽었습니다. 소리 내 읽다 보니 다 외워지더군요.


이/한: 낭독 훈련을 하셨으니

 아나운서가 제격이었겠네요.


허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선친이 중풍으로 쓰
러지시는 바람에 고학으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생활고
를 해결하러 18살 때 초등교사 자격을 취득했지요, 초
임지가 충북 청주였는데, 제가 배웠던 대로 낭독을 중
시하며 가르쳤습니다. 저도 학생들이 물러가면 우편으
로 배달돼온 서울신문을 예전처럼 큰 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7년간 문교부 지정학교 연구교사
로만 있었으니 평가도 좋았던 셈이지요. 그때 같은 학
교 여선생을 반려자로 만나는 행운도 따랐지만, 교편
생활이 적성에 맞지는 많았어요.


원래 제 꿈은 배우였습니다. 고향에서 동네 청년들을
조직해 연극을 만든 적이 있어요. 대본 작성부터 연출,
주연까지 다 했는데, 공연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마을사
람들이 몰려들었던 기억도 나고, 학생들 하교 후에 듣
는 라디오 뉴스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래서 결단
을 내렸습니다. 1962년에 중앙방송국 탤런트 1기 응시
원서를 냈지요. 그런데 수험표를 받으러 가니 수험표가
없는 거예요. 우편으로 보낸 게 마감일 지나 도착했으
니 별 수 없잖아요. 그 이듬해 아나운서 시험을 봤지요.


이/한: 혹시 당시 수험번호를

기억하시는지요?


129번이었습니다.(야!) 아나운서만 방송을 하던 그
시절, 아나운서는 대단한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경쟁
률은 99대 1이었는데, 1차가 음성 테스트, 2차가 실
기, 3차가 면접이었죠. 면접시험까지 통과한 40명이
국어, 헌법, 세계사 등 8과목, 공보부 필답시험을 봤습
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 10명, 여자 10명, 공무원 시험
으로는 최초로 많은 아나운서를 선발한 해였는데, 동
기 중에 저만 끝까지 남았습니다.


이/한: 어떤 프로그램을 맡으셨나요?


지방 근무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 텔레비전 뉴스를
했어요. 라디오 뉴스가 훨씬 영향력이 컸던 때입니다.
특히 <정오뉴스>는 스피커가 있는 곳이면 모두 틀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파급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대
부분 아나운서실장이 담당했지요. 그런데 1965년 중
반 어느 날, 호랑이 방송과장으로 유명한 장기범 선배
님이 아나운서실에 들어오시자마자 큰소리로 “김승한
씨! 내일부터 김승한 씨가 <정오뉴스>를 하세요” 하시
더군요. 입사한 지 만 3년도 안 된 햇병아리를 <정오뉴
스>에 배당하는 모험을 하신 거죠. 훗날 “내 눈이 틀리
지 않았다”고 제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제1라디오 <정오뉴스>를 20
년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장 과장님이 1968년에 “국립영화제작소에 가
봐!” 해서 말씀하신 분을 찾아갔더니 <대한뉴스> 오디
션이더군요. 그때부터 1985년까지 제가 담당했던 <대
한뉴스> 테이프 1,000여 개, 그 외 KBS 영상실록 광복
50년 특집 다큐멘터리 등 내레이션 100여 개 등이 국
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한: 궁금합니다.

장기범 과장님이 왜 선택하셨는지.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해야 하니, 참... ‘좋은 흐름과
억양,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모습’
이지 않나 싶어요. 당시는 손으로 기사를 적던 시절이
라 기자들의 악필도 잘 읽어내야 했지요. 그래서 저는
5분 뉴스는 꼭 30분 전에, 10분 뉴스는 40분 전에 도착
했어요.(30분 전 또는 40분 전 ‘출발’이 아니라 ‘도착’!)
때론 뉴스 편집이 더 늦을 정도로 너댓 번을 되풀이해
서 읽으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장기범 과장님은 그
걸 눈에 담아두셨었나 봅니다. 저는 퇴근할 때도 지난
뉴스를 가져가 자기 전에 다시 읽었습니다. 술에 취했
어도 뉴스를 읽어야 잠이 왔습니다.


이/한: 다른 프로그램을

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처음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를 맡고 보니 다른 프
로그램 할 시간과 여력이 생기지 않습디다. 또 군사독
재 시절,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형 토목·건축의 기공
식, 준공식 등 의식 중계방송도 무척 많았으니까요. 사
실 축구 중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질 않았습니다.
이/한: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은 무엇이었습니까?
1983년 10월에 아웅산묘역 폭파사건이 있었습니
다. 희생당한 분들의 시신이 도착하는 당일 낮 2시경
보도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시신이 김포공항
에 3시면 도착하는데 운구행렬 중계방송이 편성돼서
방송을 해주셔야겠다”고. 신문에 게재된 희생자 명단
만 오려서 급히 공항으로 갔습니다. 수송기가 연착돼
방송 준비시간은 확보가 됐는데, 문제는 관이 무작위
로 나오는 겁니다. 어떤 분의 관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
에서 의전병은 규칙에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
방송 원고는 없고 말해야 할 시간은 넘치는 상황이었
습니다. 이국에서 희생당한 분들과 그 가족의 비통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가슴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방송했
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게 의식 중계방송이지요.


이/한: 방송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신지요?


장기범 아나운서입니다. 면접시험 때 5명의 면접관
중 가운데 앉으신 분이 묻더군요. “미국에도 외무부장
관이 있습니까?” “미국에선 국무부장관이라고 합니다”
“아나운서 봉급이 얼마 되지 않는데, 그냥 교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
게 답했지요. 그분도 후에 들으니 교사 생활을 하셨습
디다. 저를 아나운서의 길에 들어오게 해주시고, <정오
뉴스>, <대한뉴스> 배정 등 인정해주시고, 호의로 대해
주셨습니다. 항상 강조하셨어요. “아나운서는 ‘쪼’가 붙
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합니다만,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 시간 함께한 이규항 아나운서를
참 좋아합니다.


이/한: 선배님 방송은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버
릇없습니다만, 구식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사람이 구식인데(웃음). 정말 그
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도 원고를 대하는 태도에
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네요. 멋을 내고 맛을 내는 것
은 오래가지 못해요. 일부러 멋 부리고 맛 내면 사람들
이 금방 싫증냅니다. 자연스럽게 해야 돼요. 그리고 저
는 뉴스건 내레이션이건 1분에 350-370자 정도를 읽
었어요. 그게 제가 제 억양으로 숨차지 않고 자연스럽
게 낭독할 수 있는 글자 수였지요. 그러다 1985년 부
장으로 진급됐을 때, 간부가 되고나서도 프로그램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습니다.


이/한: 책임자가 되어서는

 무엇을 강조하셨습니까?


실장이 되고나서 칠판에 ‘아나운서의 탤런트화 - 변
해야 산다!’고 적고, 1990년 당시 입사한 17기 김병찬,
손범수, 정은아 등 신입사원 교육 방식도 변화를 주었
습니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건전한 끼를 제대로 발산
할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바꾸었다고 자부합니다. 저
는 신인 아나운서들에게 ‘모방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
하지요. 뒤따라한 사람은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자신
만의 색을 찾아 선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한: 아나운서교육장에 대한

 감회도 남다르시겠어요.


아나운서는 1927년 방송 개시 이래 늘 시기, 질투의
대상이었지요.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아나운서실 책상
을 재고 있더군요. 기획관리실에 문의했더니 “5분 뉴스
나 하고 잡담하며 쉬는 아나운서실엔 책상 빼고 테이블
만 놓으면 된다.”라고 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
서 사장 주재 확대 간부회의에서 “아나운서는 대기조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항의해 원점으로 되돌려놓았지요.
그 후 5층에서 3층으로 더 큰 사무실을 배정받고 녹화
시설을 갖춘 별도의 교육장도 마련했던 겁니다.


이/한: 실장 시절 추진하신 일,

더 들려주세요.


이규항 김상준 아나운서 공로로 KBS 한국어연구회
가 1990년도 세종문화상을 수상한 일, 연변 연길 흑룡
강성 아나운서들 서울 교육 실시, 1993년 아나운서실
최초로 홍보 책자 제작, 그리고 제가 실장 되었을 때 아
나운서실이 라디오본부 소속이었어요. 아니면 편성 또
는 보도본부 소속이었는데, 사장 직속 부서가 되는 게
숙원사업이었죠. 서영훈 사장이 저희 요구를 들어줬는
데, 제가 전주총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다시 본부 소
속이 되어 안타까웠습니다.


이/한: 그 후 아나운서실 위원으로

 정년퇴임 하신 거죠?


정년퇴임 아니었어요. 1994년에 경영진에서 인력
감축을 한다고 하더군요. 직장인으로, 방송인으로 앞
만 보며 열심히 살았고 성실히 봉직했는데... 정년을 1
년 앞두고 명예퇴직 1호로 KBS를 떠났습니다. 이후
불교TV 4년, 그렇게 35년간 아나운서로 일했습니다.


이/한: 동료들이 선배님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고맙고 또 고맙지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상대를
보고 판단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저 자체가 실수가 많
은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기에
제 잣대의 눈금은 느슨할 수밖에 없어요. 포용하고 교
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삶,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추억이 깃든 본관 지하 1층 아나운서
교육장에서 후배 이재후, 한승헌과 함께


이/한: 세월이 흘러서 보니

방송은 무엇이던가요?



노력입니다. ‘방송이기 전에 사람이 돼야한다’는 말
은 진실입니다. 사람이 방송이고 방송이 사람입니다.
좋은 방송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치우치지 않
은 상식, 따뜻한 인간미, 보편적인 관점, 성실함 등.
‘내가 누군데, 이까짓 5분 뉴스...’ 운운하는 사람은 좋
은 방송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사진에서 느낀 인상처럼 간결하고 단호한 그는 평생을 소
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눈으로 읽지 않고 반드시 입으로
읽었다. 그 읽음의 세월은 항상 긴장이었고 숨가빴을 것이
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택한 아나운서의 길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회사 앞 중국음식점에서 아
주 작은 청주 딱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 작별하는 시간, 문
득 그의 등이 궁금해졌다. 남자의 등은 얼굴만큼이나 그 사
람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는가? 여의도공원 쪽을 향해 걸어
가는 그의 등은 아프리카 표범의 등처럼 넘실대며 빛나고
있었다.


글 / KBS 이재후,한상헌




김승한 아나운서 방송사료사진



장기범 아나운서와 함께 한 김승한 아나운서





TV방송초기 뉴스생방송 (김승한 아나운서)





1963년 아나운서 동기생 명단

 (번호따라-국제방송 아나운서포함)

1.김승한, 2.강진희, 3.김기행, 4. 이은경 

5.      6.     7.     8.       9.박경철, 10. 최선,

 11.이승일, 12.소병규, 13. 이승상, 14.    15.   16.   

   17.       18.     19.    20.변웅전,   21.   22.      23.    

  24.최경호   이강원, 이복자, 최기정, 안군자, 김청신

김정자, 심광진, 최화자, 김상옥, 이종화,.

최광순, 최이자, 이문양



신입 아나운서 강습을 마치고 앞줄 왼쪽부터

 유병은(중앙 기술과장), 박능상 (TV기술과장), 장기범

 (방송과장), (   ), 김영권(TV제작과장), 김재연 (TV국장),

이홍수(중앙국장), 홍천(관리국장), 이인관 (기감), 노정팔

 (국제국장), 서규석 (관리과 지도계장) 63년 입사 아나운서

 함께 강익수, 임택근, 박상규 님 등 방송국

간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왼족 두번째부터 이팔웅, 김승한, (     )

배덕환, 안용민, 소병규, 이규항, 김기행


왼쪽부터 최계환, 최두헌, 강찬선, 김규홍

박동수, 최규락, 장기범, 이창호, 김승한


왼쪽부터 이정부, 송무근, 김규홍, 이세진,

김승한, 최규락, 박동수, 최계환, 최선



앞줄 왼쪽부터 배덕환, 이병열,

최두헌, 김난숙, 김규은, 조길자, 김정자,

송경원, 이계영, 임문택, 윤미자, 이승상,  

뒷줄 아규헝, 김기행, 이영열, 인주희,

 이팔웅, 이광재, 송한규,  변웅전,

김승한, 안용민, 소병규





앞줄 왼쪽부터 인주희, 이병열, 최두헌,

이광재, 송한규, 배덕환, 안용민, 김기행, 이팔웅,

김승한, 김규은, 변웅전, 조길자,  김정자, 김난숙,

이규항, 송경원, 이계영, (     ), 김재영,

윤미자, 소병규, (      )임문택



앞줄 왼쪽부터 인주희, 이병열, 최두헌,

이광재, 송한규, 배덕환, 안용민, 김규은, 조길자,

 김정자, 김난숙, 송경원, 이계영, 윤미자, (    ),

김기행, 이팔웅, 김승한, 변웅전, 이규항

 (   ), 김재영, 소병규, 임문택




앞줄 왼쪽부터 인주희, 이병열, 최두헌,

장기범, 이광재, 송한규, 배덕환, 둘째줄 (    ),

김기행, 임문택, 안용민, 김규은,  김정자, 김난숙,

송경원, 이계영, 이팔웅, 샛째줄 소병규,  (    ),

김승한, 변웅전, (      ), 이규항, 이근배


1968년도 아나운서 언 파레드를 마치고

왼쪽부터 (     ), (     ), (      ), 최두헌, 강찬선

이광재, 이병열, (       ), (        ), (        ), 배덕환

(       ),   김   용?, (       ), 안용민, 김정자, 이원춘,

 이근배, 이공순, (      ), 이팔웅, 최규락, 정회준,

 (         ), 변웅전, 김승한, 이규항, (        ),

(         ), 소병규, 정경래, 임문택



앞줄 왼쪽부터 배덕환, 최두헌, 송경원

이계영, (        ), 강찬선, 김정자, 김규은, 이난숙

이규항, (    ), 김규항, 송한규, 안용민, 김승한, 임문택

이팔웅, 이기행, 이병열, 이원춘, 인주희, 이근배 


앞줄 (      ), 이광재, 배덕환, (       )

뒷줄  소병규, (      ),  (       ), (        )

안용민, 송경원, 김규은, 이팔웅, 김기행,

김승한, (    ), 이규항


앞줄 왼쪽부터 김기행, 소병규, 이승상, 변웅전, 김승한



왼쪽부터 김수웅, 이신웅, 전영효, 서병주,

 노정팔, 이상익, (      ).  김성호, 김승한



왼쪽부타 춴창호, 이규항, 김승한(앞)

지영서. 우지은 오른쪽 서기원, 이계진



왼쪽부터 이계진, 김승한, 이장우, 이규항, 이세진




남초 이정부 아나운서


*1962년의 국가적 손실 하나...  

俳優 志望生이 었던 金丞漢 아나운서가

 당시 郵便으로 부쳤던 KBS 탤런트 志願書가

試驗날까지 到着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까지도

 韓國이 아카데미상 受賞 배우를 誕生 시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실.     * 1963년의 韓國放送界의

所得 하나...,,타고난 大 俳優깜이신   김승한

 아나운서를 映畵界에 빼앗기지않고

KBS가 아나운 서로 뽑은 일



동원 윤성원 아나운서



제가 존경하는분 김승한 대선배님

인터뷰 대담도  전자신문으로 보게끔 해주신

  이 이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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