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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역사 5. 한국방송의 역사를 위하여 김동식: 이장춘

이장춘 2016. 5. 26. 05:37

 

 


방송역사와 춘하추동방송!

이장춘의 춘하추동방송역사는 이장춘이

 36년간에 걸쳐 방송국에 재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장춘은 방송국에서 이례적으로 여러 업무를

담당했고 1973년 KBS 공사창립 기초작업을 수행했다.  새로

발족한   KBS 공사 직제에 따라 기획관리실 관리부 차장을 역임

하면서 공사창립의 틀을 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었다. KBS 재직 중 

1983년 문공회가 창립될 때 창립회원이 되었으며 방송국 퇴직후

 KBS 사우회 부회장, 감사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원로방송인 모임 사단법인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이사로 재직 중이다.


오랜 세월의 방송국 생활, 또 방송인들의

 만남을 통한 체험과 성원을 바탕으로 춘하추동

방송역사를 쓰기 시작한지 1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2015년은  춘하추동방송 10년이 되는 해로 이를 계기로

 여러 차례의 방송인터뷰와 KBS사우회, 한국아나운서클럽

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춘하추동방송에 관한 내용이

 알려졌고 춘하추동방송에 그 글들을 올렸다.


5차례에 걸쳐 연재된 이 글의 내용은

 2015년 12월 30일에 발행된 책 공영방송 제5호

김동식의 마이크를 끄고」라는 카테고리의 152페이지

 부터 185 페이지 까지 34페이지에 해당하는 글이다. 이 글을

쓰기위해 인하대학교 김동식 교수가 공영방송 편집위원 한양대

 특임교수 표정훈 교수와 공영방송 간사 김종화님이 배석한 가운데

   2015년 11월 16일 오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4시간 반에 걸쳐  이장춘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 다섯 번째 글 춘하추동방송역사 5.

한국방송의 역사를 위하여를마지막으로 이글을 모두 마친다.

 이 글의 사진은 이장춘이 넣었다. 5편의 글과 관련 글을

함께 보실 수 있도록 글을 연결했다.



춘하추동방송역사 5. 한국방송의 역사를 위하여

책 공영방송 5권 이장춘 편 마지막회 대담 김동식교수

 





김동식 : 제가 듣기로는

 KBS의 역사와 관련된 프로그램

제작과정에 많은 자문과 조언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장춘 : 2011년에 TV 50년사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방송에 출연해서 증언해 줄 원로들 섭외를

 해줬죠.      나중에 해당 기념식에서 밥도 한 끼 얻어

먹었고요.   (웃음) KBS 스포츠 50년 역사에 관한 프로그램

에는 일종의 자문을 해줬어요. PD하고 작가들한테. “스포츠 방송

이라는 게 결코 단순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이광재 아나운서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하는 순간에 온 국민이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집중한다는 건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 되는 기초 위에서    대한민국이 발전한

거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특집을 만들면

좋겠다.” 대충 이런 얘기였죠.





그해 12월 말에 TV 50년 특집방송

담당 PD한테 전화가 왔어요. 아나운서였던

황우겸 선생을 특집 방송에 출연시키려 하는데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용인

사시는데 서울까지 선뜻 오시기 힘든 게 당연하지요. 사실

그분을 출연시켜야 한다고 제가 처음 말을 했으니 결자해지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용인까지 차를 몰았죠. “선배님,   

왜 안 가신다고 하셨어요?”  했더니     “아유, 힘들어. 

힘드니 좀 봐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말씀드렸죠.

“이건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지금 제가 봐

드리고 안 봐드리고 할 때가 아닙

니다. 가셔야 합니다!”





김동식 : 무서운 후배시군요.

역사적    책임감으로 선배를….(웃음)

이장춘 : 황우겸 선생이 결국 “알았어, 알았어”

 하셨어요.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KBS의 역사적 순간을

기리고 증언하는 일이잖아요. ‘최초 실외 TV스포츠중계방송

캐스터’로 자막이 표시되면서 황우겸 선배님이 증언하시는 장면,

 또 남산 송신소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특집방송에서 볼 때

가슴 뭉클하더군요. 2011년 12월 29일에 ‘KBS TV 50년’

기념 리셉션이 KBS 로비에서 열렸어요.





1961년 KBS 최초 TV방송

추진위원장이었던 최창봉 선생을

비롯해서 황우겸, 정항구, 오승룡 선배도

참석하셨지요. 최창봉 선생이 축사를 하는데, 제가

 보니까 이걸 녹음하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늘 지니고

 다니는 소형 녹음기를 급히 꺼내려는데, 그날따라 갖고 가질

않은 겁니다. 아이쿠!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와 같은 축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역사인데 말입니다. KBS가 안 하면 춘하추동 방송국

이라도 해야 하는데, 녹음기가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작은

 행사라도 KBS에서 일어나는 행사는  그 자체가 방송의

역사입니다.  기록해야죠. 녹음해야죠.녹화해야죠.

  잘 보관해야죠.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김동식 : 최창봉 선생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분인데, 정말 아쉬운 장면입

니다. 아울러, 기록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도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장춘 : 언젠가 KBS

자료부장이 뵙자고 하더군요.

KBS로 갔더니 사진 앨범 하나를 내놓아요.

살펴보니 참 귀한 앨범이에요. 1930년대 우리나라

스포츠 방송의 원조인 박충근 선생의 앨범인 겁니다. 축구와

 권투 중계의 원조인 분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자료실에 무슨 앨범 하나가 굴러다니기에 뭔가 싶어서    선배님한테

여쭤보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박충근 선생의 사진이 시기 별로

 쫙 정리돼 있지 않겠습니까.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야! 이거

대단한 거다.” 탄성을 내질렀다니까.  자료부장이 “선배님

하고 같이 근무하신 분인가요?”   묻더라고.   내가

대답했지. “예끼 이 사람아, 이 분이 1907

년생인데 내가 어떻게…….” (웃음)





여하튼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한 번 들려서

물어봤어요. 그 앨범에 관해 아는 직원이 아무도

없더군요. ‘아이쿠’ 싶더라고. 자료부장이 일단 보관

해둔 건 분명한데, 부서를 옮겨 다니다 보니 그 뒤로

 후임자들을 거치면서 행방불명이 된 거지. 이러다 보니,

 내가 KBS에서 자료 요청을 받으면 빌려주기는 하는데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니까. (책장에서 잠시 자료

더미를 뒤진 뒤) 이거 뭔지 알아 맞춰보세요.


김동식 : 이게 그러니까,

방송 프로그램 처음이나 마지막

인서트(insert) 용으로 들어

가는 것 같은데요.





이장춘 : 이게 ID카드라는 겁니다.

KBS에는  이게 보관되어 있지 않아요.

나한테만 있지.   KBS에서 빌려 달라기에 좀

 빌려주기도 했었죠. KBS가 TV 방송 시작할 때부터

 미술을 담당한 정규봉 씨가 직접 작업한 겁니다. 흑백 TV

시대에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 이걸 썼거든. 지금이야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지만 그 땐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직접 그리고

 했던 겁니다. 방송 미술 분야에서 참 중요한 자료인데,

정규봉 씨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ID카드 포함해서 그 사람의 자료

 대부분이 저한테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이걸 보시라고. 이산가족 찾기 방송 관련 사진들을

이렇게 다 모아놨어요. 얼마 전에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됐는데, 감회가 참 깊더

라고. 정규봉 씨가 자기 욕심으로 자료를 집에 가져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말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KBS에 놔두면 다 없어

지거든.   정규봉 씨가 나보고 꼭 만나자고 하더라고. “나 죽기 전에

 한 번 꼭 만나. 나한테 있는 거 줄 게” 이러더라고. 그래서 차를

 몰고 정규봉 씨 집에 갔더니 자료를 주더라고. 차 트렁크에

다 싣지 못해서 뒷자리에까지 가득 실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일어나서 직접 실어

주기까지 했어요.






동식 : 「춘하추동 방송」에 있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 관련

자료들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이장춘 : 내가 자료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자료들을 추려서 블로그에 올렸지. 정규봉 씨가

별세한 뒤에 부인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아버지 자료를 보고,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고 하더라는 거야. 정규봉 씨가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KBS에 놔두면 다 흩어지니까, 형이 보관

하고 있다가 형이 없애버리든지. KBS에 주든지 형이 알아서

해!” 70년대 말, 80년대 초부터 ID카드라는 게 사라졌지.

정규봉 씨가 홍보부 차장으로 갔거든요. 홍보부

에서 일하다보니 사진도 찍고 정리할

 기회가 생긴 거지.


김동식 : (책장을 살피다가)

여기 필름도 있는데요.


이장춘 : 예전에는 필름을

프로그램 별로 일정량씩 배정해줬어요.

그런데 워낙 물자도 귀하고 예산도 빠듯하다

보니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주질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오늘 방송 나갈 때 쓴 다음에 지워서 내일 나갈 때

쓰는 거지. 요즘엔 모든 게 디지털 방식이니까 용량이 문제가

되질 않는데 그 땐 다 이렇게 아날로그니까 보관하기가 힘들어요.

내가 당시에 방송을 다섯 개를 맡았었는데, 지우고 다시 쓰는 걸

잘 조절해서 이렇게 남아 있는 겁니다. 이게 뭐 내가 애사심이

 유달리 강해서 남겨 놓은 건 아니고.(웃음) 다만 이거

 모아놓으면 좋겠다 싶어서 모아 놓은 거지.


김동식 : 현재 「춘하추동방송」의

 누적 방문객 수는 200만 명이 넘습니다.

 인터뷰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글과 자료를 읽으며

놀랐고, 직접 뵙고 말씀 나누면서 선생님의 열정에

더더욱 놀랍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이장춘 : 제가 이제 뭐 다른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한 지금 일에 최선을

 다해야죠. 지금도 나는 KBS에 어떻게 하면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될 것인가, 또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쉬지 않아요. 놀지

않습니다. 새벽에 두 시간 정도는 해외에 있는 방송인들과

통화하고 카톡하고 이메일 주고받고 합니다. 엠파스

 블로그 시절 5년 동안 150만 명이 방문했어요.


 2010년 다음으로 옮긴 후부터

방송 관련 자료 위주로 운영해왔는데요.

 하루 평균 2,500명이 방문을 합니다. 지난 2015년

4월 24일에 제 블로그, 그러니까 「춘하추동방송」이

 10주년을 맞이했어요.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가진 것

자체가 저에게는 참 뜻 깊은 ‘10주년 기념행사’입니다.

이제 춘하추동방송 20주년을 향해 가야죠. 한 마디

더하자면, 방송하는 사람들이 방송 역사를

 알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김동식 :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방송의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생신이시죠? 그래서

저희가 케익 사가지고 왔습니다.    (웃음) 늘

 건강하시구요.   「춘하추동방송」을 통해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영방송 책 34페이지를 옮긴 글
춘하추동방송역사 1회부터 5회까지 길고
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을
올립니다. 3년동안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며, 날마다
글을 올려주시며 고락을 같이했던 팔방미남 윤후현 선생님이
 이 글 4회를 올리고 있는 시간에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이 왔습
니다. 어제까지이 글 2회에 댓글을 달아 주셨던 윤후현 선생님께서
 밤 사이에 세상을 뜨시다니 청천벽력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 2회 댓글로 올렸던 선생님의 마지막 글을 함께 올려
윤후현선생님을 기립니다.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꿈 하늘나라에서 이루소서
 

남초 이정부 아나운서 글

춘하추동방송의 역사가 곧 KBS한국방송의
역사라는 것을 실감케하는 “마이크를 끄고”..두분의
대담은 충격과 감명을 함께 안겨주었습니다. 고 정규봉
(저도 가까 웠던 분)선배도 엄청난 자료 더미를 가저와 아예
이장춘 선배님 개인에게 보관해 달라고 맡기기도 했다는 기막힌
얘기를 들으며 7년이나 후배인 제가 다닐 때까지도 직원들
 스스로가 입에 자주 담았던 “KBS는 주인이 없어”라는
자조적인 말이 떠올랐습니다.

88년전부터 방송을 내보낸 KBS의
첫 번째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방송 사료를
 지킨 사람이 방송국이 아니라 바로 춘하추동방송의
이장춘 국장님이란 역사적 사실...저같은 사람은 한 번도
 채 살지 못하는 방송 생애를 두 번씩이나 살고계신
 선배님이 놀랍고, 자랑스럽습니다.



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마지막

 2016년 5월 24일



KBS 방송역사의 산 증인,

 발로뛰는 현장기자,이신 이장춘

사장님!파란만장한 방송국생활과 어렸을적

고향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 글을 보니 어쩜

어린 시절 제 고향에서 의 기억이 떠 오릅니다. 이장춘

사장님!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시골 마을에서 중학교를
나왔다니 저와 일맥상통하는 학창시절의 추억도 있습니다.
강진촌놈이 광주까지 진출하여   광주상고 졸업 후, 당시

(1966년도),하이칼라인 은행시험(상업은행)에 실패 후,

 전남 지방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면서기,

읍서기, 군직원으로 28년간 강진군청에서

근무 하였습니다.


이장춘 사장님!은 방송인의 길을

 저는 공무원의 길을 걸어 왔는데, 본업

졸업 후 이장춘 사장님은 옛날 일을 다시 시작

하시고, 저는 또 노래를 좋아하여 엉뚱하게 가수를

하고 있습니다. 고향소식과 방송애환 그리고 선후배

방송인들의 소식 감사합니다.     다음 3편이

 기대가 됩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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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춘하추동방송역사 1, KBS TV방송 역사의 기원 남산송신소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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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역사 3. 이장춘과 한국방송공사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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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의 대북방송 「두고 온 형제에게」 시그널과 그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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