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40계단이라면 6.25를 전후한 숱한 사연을 안고 있어서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고 오늘날은 그 시절을 재현해 놓은 조형물을 갖추어 문화의 거리, 관광지로 조성, 찾는이들이 많다. 이 40계단을 오르면 옛날의 부산방송국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남성초등학교 진입로가 되어 흔적이 사라졌다. 이 방송국은 서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1935년에 세워진 부산방송국이다. 그때는 방송국이 높은지대에 있어야 잘 들린다고 해서 부산시내에서 가깝고 시내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복병산 중턱에 방송국을 세웠다. 옛날의 부산역전에서 40계단을 올라가 또다시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하는 경상도 부산부 대청동 1정목 7번지에 위치한 대지 542평과 안테나를 건립 할 임야 1,538평에 방송국을 세운것이다. 6.25때 임시중앙방송국 시절을 거쳐 부산방송국에서 TV자체방송을 실시 하기위해 72년 6월 26일 초량으로 옮기기까지 40년 가까운 세월 이곳에서 방송을 하면서 그 방송국에 얽힌 숱한 사연들이 있지만 그때 그 방송국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 경남인들과 애환을 같이했던 그 방송국 특히 6.25때 중앙방송국 역할을 하면서 숱한 사연을 안은 그 방송국 부산에서 영원히 잊혀 져서는 안되는 그 방송국이다. 6.25때 복병산 중덕의 대청동 부산방송국에서 바라본 영도 고갈산의 모습과 방송인들이 함께 촬영한 모습이 담긴 사진(아래)이다. 1953년 4월 방송국 앞뜰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송영호 방송과장을 비롯해서 번호따라 2.이상송, 3.송영호 5.강찬선, 6.노천명, 7.김창구, 8.방필주, 10.이상만, 11.안병원, 13.조백봉, 14.강정수, 15.문시형, 17.배준호, 19.최요안, 20.김용환, 21.강익수, 이밖에 공승규, 조규택님 등그 시절 유명한 방송인 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 시절에는 40계단 위에 있었던 방송국에서 본 영도 고갈산은 벌거벗었다. 방송국에서 눈 앞에 바로 보이는 고갈산이 영도에 가려면 영도다리를 건너야 했다. 배가 드나들기 위해서는 다리가 들려야 해서 피난민들의 사연과 함께 사연들이 깃들었던 다리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모습이고 이 길로는 배가 다니지도 않지만 이곳을 찾아 옛날을 회상하는 관광객을 위해 일정한 시간(오후 2시) 을 정해서 옛날처럼 다리를 들어 올려 보이는 시간을 마련해서 구경거리로 삼고있다. 40계단과 더불어 이곳을 찾는 분들의 명물이다. 위는 오늘날의 영도다리다. 오른쪽 철 다리가 들리는 부분이지만 오후 2시, 그 시간을 못 맞추어 들리는 장면을 촬영하지 못했다. 아래는 옛날의 영도다리다. 큰 범선들이 항구에 들어올떼 이 다리를 올려 지나갔다. 지금은 외항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올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관광객을 위해서 올린다. 1935년에 지어진 그 방송국은 지금의 면 사무소보다도 더 작은 건물이었다. 6.25때는 그 건물에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온 피난 방송인들이 모여들었고 주변에는 피난민들이 만든 판자집으로 가득찼다. 마지 못해서 사는 세상이었으니 판잣집에서라도 사는 사람들은 복받은 사람들이었다. 3년간을 그렇게 살다가 휴전이 이루어질 무렵부터 정부를 비롯해서 차츰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지만 또 인근에서 살던 사람들이 생활 터전을 찾아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이른바 부산역 화재사건이라는 대 화재가 발생했다. 산 중턱에 자리 하고 있던 방송국이라 안전지대라고 생각해서 방송국에 짐을 옮겨 놓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방송국도 타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중앙방송국이 서울로 옮긴 다음이라 불행중 다행이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부산을 배경으로 한 6.25가 넣은 불후의 명가요다. 6.25로 밀리고 밀려 최남단의 도시이자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으로 대한민국정부를 비롯, 남북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숱한 화재話題를 남긴 곳이기에 그 사연을 담은 노래 또한 수없이 많다. 그 노래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인물 박시춘, 유호 1947년부터 KBS 경음악단 지휘자로,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여 KBS전파에 띄웠던 명콤비, 그 분들은 부산 피난시절에도 국민과 국군들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리고 피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노래를 만들어 냈다. 피난살이에서 떠나면서 만들어낸 이별의 부산정거장! 오늘날 까지도 널리 불리는 이 노래는 많은 노래중에서도그 시절을 상징 하는 대표적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대청동에서 옮긴지 얼마 안된 초량동 사옥에서 1974년 6월부터 1975년 1월까지 약 7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세월이 흘러 부산방송국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숱한 사연들을 접했다. 그러던 중 2016년 3월 17일 부산을 찾아 40계단 앞을 지나며 여러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다. 부산 관광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방송역사 확인차 수많은 자료를 보존하고 있는 올해 93세의 고세혁 선배님을 만난다는 일념으로 간 것이어서 그 일만 보고 왔지만 떠 오르는 생각들이 많다. 그날 부산역에 나오셔서 기다리시겠다던 고 선배님이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곁에 노인 한분이 서 계신다. 이분이 바로 고세혁 선배님 이었는데 6-7년동안 너무 변해버린 고선배님을 선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곁에가 자세히 보니 이분이 바로 고선배님이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확 인하는 순간이었다. 80대후반까지 부산에서 먼 KBS사우회 서울 모임에 자주 참석 해주셔서 뵈었는데 서울 모임에 참석 안하신지가 6-7년이 되었고 올해 93라고 하시니 그동안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리셨다. 더할나위 없이 반가움 속에서도 그토록 변하신 모습, 걸음걸이도 많이 불편하신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찡하게 울려옴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힘찬 목소리는 예나 크게 다름 없이 힘이 있으시고 확대경을 통해서나마 글씨를 보시는 보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흐뭇한 마음이었다. 고선배님에 관한 얘기는 앞으로 더 할것이다.
지난기간 KBS사우회장을 지낸 정근춘님, 그리고 고세혁선배님과 부산역 에서 택시를 타고 영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영도다리에서 내려 부산역까지 도보로 오면서 옛날을 회상 해 보았지만 길은 옛길이 아니었다. 40계단은 알아도 그때 그 방송국을 아시는 분이 별로 없는듯 했다. 옛 부산 방송방송국 얘기는 본 춘하추동방송국에 여러편 있어서 연결하고 영도다리에서 부산역까지 걸으면서 촬영한 사진 몇장을 골라 올렸다. 화 보 구연도 부산사우회 전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오늘날의 40계단 사진이다. 1953년 화재로 새로 지은 40계단위의 KBS사옥 자동차로 갈때는 다른길을 이용한다. 오늘날의 영도다리에서 부산역까지 영도다리에서 영도 고갈산을 향해 촬영한 사진 (정근춘 KBS 전 사우회장) 영도다리 밑에서 영도다리를 배경으로 KBS부산사우회 구연도 전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영도다리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길이 214.63m의 다리이다. 일제가 보급 및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후인 1934년에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뭍과 섬을 이은 다리)이자 유일한 도개교(중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의 한쪽을 들어올려 통과시키는 다리)이다.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준공된 영도대교는 개통될 당시에는 ‘부산대교’로 불렸다. 총공사비 700만 8천원이 투입되었고 연 43만 8천여명의 인력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건설당시 매립 공사 과정에서 산이 무너져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고 교량 공사 과정에 희생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밤이면 공사장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공사 기간 중 17명이 사망하였고, 41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장소이자 한국 근대사의 애환을 간직한 영도대교가 47년 만에 다시 들어올려졌다. 하루 최대 7차례까지 도개하던 영도대교는 교통량 증가로 차츰 도개횟수를 줄였고 다리 밑쪽으로 상수도관을 설치하면서 1966년 도개를 멈췄다. 2013년 11월 27일 기존 왕복 4차로 다리에서 도개 기능을 갖춘 6차로 확장된 새 다리는 도개 부분에 1천t급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75도 각도로 정오 12시부터 15분까지 세워졌다가 얼마전 오후 2시로 기간을 변경했다. 영도다리 밑에 잠시 서 있었더니 어느사이엔가 정근춘회장께서 사진을 촬영했다며 보내오셨다. 필자생애에 영도다리 부근에서 처음 촬영한 사진이다.. 여객터미널(왼쪽)과 화물선 터미널(오른쪽) 앞에서 본 여객선 터미널, 앞 길가에는 동백꽃이 피었다. 최신형 사옥 부산역 이별의 부산정거장
작사 유 호 (호동아) 작곡 박시춘 노래 남인수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기적이 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 두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40계단 층층대에 홀로앉은 저 나그네, 울지말고 속시원히 말 좀 하세요. 경상도 아가씨,노래와 함께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최초의 지방방송국 부산 JBAK가 건설 되던 때 1935년 9월 21일 (HLK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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