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DJ방송의 개척자 최동욱, 최창봉을 통해 본 DJ방송 50년 Disk Jockey 반세기

이장춘 2016. 3. 26. 05:18

 


이 글은 우리나라 DJ방송 개척자 최동욱님이

 춘하추동방송에 제공한 특별원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개념의 DJ방송은 1964년 10월 5일 최동욱이 진행한

 3시의 다이얼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하 존칭생략) 

우리나라 TV방송의 원조 최창봉은 최초의 TV방송 HLKZ 재직시 1956년

 6개월간의 미국연수를 통해서 우리나라방송과 다른 새로운 방송형태를 보았

니다. 그로부터 세월이지나 1963년 4월 25일 문을 연 동아방송국 책임자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방송을 실시해야 된다는 꿈을 실현시키려 했고

그 꿈의 한축을 실현시켜 준 이가 바로 ‘최동욱’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BS에서

방송된 “히트 퍼레이드”에서 스크립터와 진행을 맡는 등  새로운 형태의 음악

방송을 시도해 오던 최동욱은 1962년 10월부터 동아방송의 개국요원으로

특채되어 개국준비 팀에 합류하고 고전음악, 국악, 창, 해외의

유행음악 (파퓰러 송)에서 가요에 이르기 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고루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최동욱은

音樂課 所屬 프로듀서로 주간 프로그램 12개를

 담당했고. 이 가운데 “Top Tune Show" 를 기획해서

 미국의 최신음악을 매일 방송하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한국 가요도 매일 신곡을 레코드회사 발매를 기준으로 소개하는

‘오늘이 가요’ 도 담담하면서    팝송과 가요를 함께 담당했습니다.

최동욱은 개국때부터 ‘탑튠쇼’를 통해 방송에서 최초로 디스크 자키를

 개발하고 직접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하겠다는 시도를 하다가 마침내

최창봉 국장의 결단으로 그 뜻이 받아 들여저 최동욱의 ‘DJ방송.

‘디스크 자키’가 탄생한 것입니다. ‘3시의 다이얼’ 그로부터

 최동욱은  이 프로그램의 선곡, 믹싱  (엔지니어링),

어나운싱,  프로듀싱 까지 혼자서 도맡아 하는

 한국 방송에서 최초로 디스크 자키가

탄생한 것입니다.


1964년 10월 5일! 현대적 개념의

우리나라 최최의 「디스크 자키」  50주년을

맞아  2014년 기념행사를 갖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최창봉은 축사를 통해 그날의  감회를 피력했습니다.  

DJ방송의 개척자 최동욱!, 그 방송을 있게 한 최창봉! 

두분의 얘기를 통해서 우리나라 DJ방송의

 역사와 내용을 더듬어 봅니다.




 


Disk Jockey 약사 (略史)_- 최동욱 


     

한국에서의 DJ


1960년대 초 까지만 해서 KBS를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방송된 음악 프로그램

에서곡목소개나 내용 소개를 원고에 의해 아나운서

들이 낭독하는 형태를 “DJ프로그램”이라는표현을 써

왔다. 그러나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방송하는

 전문 디스크 자키 란 존재하지 않았다.


뮤직홀 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과 대구 등지에

뮤직홀 (Music Hall) 붐 시대가 열렸었다. 극장식 의자

배열에 전면에 소형무대를 설치하고 대형 스피커를

배치하는 구성이였다. 현관에서 입장권을 미리 사고

 차 한잔을   얻어 마시며   2~3 시간씩 일인용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 공간이였다.


음악의 플레이는 업주가 고용하는

한 두 명의 Player (플레이어)가 음성 소개

 없이 레코드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업소에 따라서는

 간간히 흑판에 곡목을 적어 게시하기도 했다. 1955년무렵에는

 SP (Standard Play - 78회전)에서 LP (Long Play) 로 전환하는

 시기여서 LP 음반을 플레이할 경우에는 Play Box 유리창에 레코드

 자킷을 진열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까지 뮤직홀의 플레이 박스

에서 판을 트는 사람을 ‘Player' 라 칭했을 뿐,DJ, 디스크 자키

또는 DJ박스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클래시컬 전문

 음악감상실로는 인사동의 ‘르네쌍스’ 와 ‘무아’

 (종로 1가의 ‘무아’와 다름)가 있었다.


1960년 봄 학적 보유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복학한 고려대학교 3학년인

최동욱이 종로 2가 뮤직홀 'Die Shone' (디 쉐네) 에

자주 드나 들면서 이호범 (별명 후라이, 작고)의 권유로

뮤직홀에서 디스크 자키의 시도를 기획하고 업주의

승낙을 받아 냈다. 이것인 한국 뮤직홀에서

최초의 디스크 자키 의 등장이 되었다.

 

한국 뮤직홀 최초의 DJ


‘디 쉐네’에서 6개월동안 디스크 자키로

 꽤 화제가 되었던 최동욱은 1961년 봄에 화신백화점

 3층 (지금의 종로타워) 에 새로 개관된 고급 뮤직홀 ‘메트로’의

 지배인의 초치로 스카웃 되어 자리를 옮겼다. 이 때 보조 DJ 로

서울대 사법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정흥숙 (후에 MBC 아나운서,

중앙대학 가정대 학장, 현 명예교수) 과 팀이 되었다. 정흥숙은

뮤지홀의 최초 여성디스크자키가 된 셈이다.



MBC 아나운서 시절 정흥숙



최동욱이 ‘메트로’에 스카웃되어 간

‘디 쉐네’는 ‘라 스카라’에 있던 이종환을

초치해갔다.‘메트로’에서 본격적인 뮤직홀 DJ 로

 명성을 쌓고 있던 최동욱을 충무로의 뮤직홀 ‘카네기’에서

프로포즈 하여 2개월동안 한정적인 전제로 옮겨 갔다. 이번에는

충무로에서 종로2가 YMCA뒤, ‘디 쉐네’ 골목 바로 건너편으로 이전한

 ‘세시봉’에서 최동욱을 또 다시 스카웃하여 갔다. 이 때 ‘세시봉’에는

서울대 미대를 중퇴한 조용호와    경영자의 사촌여동생 아들인

이선권이 플레이어로 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디 쉐네’에서 또다시 스카웃 제의를  받아 들인

 최동욱이 ‘디 쉐네’에 캄백하였다.


물론 ‘디 쉐네’, ‘메트로’, ‘카네기’,

‘세시봉’ 에 스카웃된 최동욱은 각 뮤직홀에서 마다

최초로 마이크를 사용하여 곡목을 소개하며 턴테이블을

돌리면서 뮤직홀 디스크 자키 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61년부터 최동욱은 뮤직홀의 디스크 자키로 일을 하면서 서울중앙

방송국 (KBS) 라디오의 주간 팝송 프로그램 “금주의 히트 퍼레이드”의

구성작가 겸 진행자로 발탁되었다가 1963년동아방송이 개국될 무렵

 개국요원으로 1962년 가을부터 동아일보에 입사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종로 2가 천도제약 뒤 2층에

 새로운 뮤직홀 ‘뉴 월드’ (대표 김태관, 매니저 송종근)이

 개관하면서 최동욱을 음악실장으로 초치하고 그의 산하에 이종환,

이해석 (이석), 김 준, 정흥숙 등이 기용되었다. 뮤직홀은 그 이후에

시대백화점 1층에 ‘라 스카라’, 광화문에 ‘아카데미’ 까지가 명맥을

 이였고, 삼각동 입구의 ‘아폴로’, 명동극장 옆골목 2층에 자리한

 ‘시보네’, 동화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5층에 있던

동화음악궁전이 축소되어 명동으로 이전한

 ‘동화음악실’ 등이 있었다.


한국 방송 최초의 DJ


방송에서의 경우 디스키 자키 또한

뮤직홀에서 디스크 자키를 개발하여 스카웃

열풍에 휩쓸렸던 최동욱이 동아방송의 프로듀서로

입사한 1년 반 뒤인 1964년 10월 5일에 “Top Tune Show"를

통해 한국 방송에서 최초로 직업 전문 디스크 자키의 막을 올렸다.

(세간에서 1개월 또는 수주일 동안 실험방송 운운은 사실 무근한 허구적인

 내용임) 최동욱으로부터 1년 뒤에 MBC 에서 뉴월드 김태관사장의 천거로

 촉탁으로 입사한 이종환을 동아방송에 대응해서 “Top Tune Parade"

DJ로 발탁했고, 6개월 후에 라디오 서울 (후에 TBC 라디오)에서

성우 피세영을 "Music Telstar"의 로우 프로파일 DJ로

발탁하여 이른바 탑튠 3파전 시대를 열었다.


한국 방송 최초의 여성 DJ


그리고 1965년에는 유영옥(재미)이

 KBS에서 동아방송 아나운서로 옮겨 왔다가

VUNC (유엔군총사령부 방송)에서 1시간짜리

“The First Show"를 방송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디스크 자키가 되었다.


뮤직홀 시대에서 뮤직 쌀롱시대로 - 음악다방


음악감상실은 다방류의 허가 조건이기 때문에

 상설 무대 생연주가 금지 되어 있었다. 이런 취약점을

 보강한 영업형태가 이른바 ‘뮤직살롱’의 등장이였다. 퇴계로 2가

 콘티넨탈 호텔의 7층 (후에 2층)에 뮤직살롱이 그 시초였다. 8군 군 예대에

출연하는 연주자와 가수들이 주 무대를 꾸몄다. 사회는 이석이 단골이였고,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 유주용 등 4클로버스 와 모니카 유 등이 자주

무대에 섰다. 빅밴드로는 민들레악단이 주 무대를 꾸몄다.



젊은시절의 모니카 유, 가수이자 윤복희 남편이었던 유주용의 누나다.


 이 밴드에 앨토 색소포니스트 이백천

(후에 경음악평론과 방송 사회)이 끼어 있기도

 했다. 이어 미도파 백화점 4층의 미도파캬바레가 낮시간에

 ‘미도파쌀롱’을  열고 최동욱이 첫 사회자로 발탁되었고 김태웅

(지미)이 보조 사회를 맡았다. 후에 숙명여대 재학생 박인희가

 사회를  맡았다.    이곳에서 최동욱은 매주 토요일마다 세시의

 다이얼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매회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이를 본따 CBS 가 매일 낮에 ‘정오의 휴게실’을 설정하고 

위키리 (고인)를 고정 사회자로 세우기도 했다.


곧 이어 소공동 경향신문 옆골목에 ‘

라스 베가스’가 문을 열고 최동욱과 지미가

공동사회를 했다. 또 그 경향신문사 옆에 ‘포 시즌스’가

개업을 했다. 명동 한복판에서는 명동장 건물의 2층에 OB's Cabin이,

 3층에 코스모스 가 무대를 갖추고 가수와 그룹들이 출연하는 라이브 음악을

제공했다. 명동극장 옆골목 1층에 라이브 음악을 제공하는 ‘멕시코’가 성업하면서

 배삼용,   최동욱이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또 레코드 음악실 ‘시보네’를 개조한

‘실버타운’, 명동공원 옆 ‘오비타운’ (홍대재학생 이상벽 사회)등이 있었다.

 이 무렵 충무로 2가에서 종로 2가로 다시 소공동 치과대학 건너편 

월계수 다방을 개조하여 옮겨간 뮤직홀 ‘세시봉’이 서린동으로

 다시 옮겨 가 허가 조건인 레코드 음악 감상에 상설무대를

 시도하여 가수들을      등장시키다 급기야

업태위반으로 폐쇄되었다.


뮤직살롱은 무대의 유지에 막대한

출연비등의 경영란이 전제되어 3~4년간 지속

되다가 쇠잔했다. 이 틈에 음악감상실과는 달리 입장료를

 미리 받지 않고 레코드 음악을 위주로 들려주는 이른바 ‘음악다방’

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소공동의 매머드 음악다방 ‘  ’ 과 명동의 ‘심지’

광화문의 ‘초원’과 ‘여심’ 명동의 ‘꽃다방’소공동의 ‘향지’ 충무로의 ‘본전’다방

 등이 그 대표적인 업소였다. 한편 뮤직살롱과 맥주홀의 복합형태의 극장식 매주홀

(극장식당)이 붐을 이룬 것도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 까지의 풍류였다.

  무교동의 ‘월드컵’ ‘산수갑사’ 명동의 ‘라 데빵스’,    유네스코 살롱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맥주홀 등에서 1인 또는 2인 이내의 출연 조건으로 허가된 음악공간도

 70년대 통기타 붐을 편승하여 많은 가수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쿠스틱 기타의 자연가창하는 형태의 1인 또는 2인의 노래

 형태를 포크 송 또는 포크가수로 오용하는

아이러니가 속출하기도 했다. ( * )

  


최창봉이사장 ‘DJ 탄생 50주년 기념 및 DJ날’ 축사로 DJ 방송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회장 최동욱)는

 6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DJ 탄생 50주년 기념 및 DJ날’ 행사를 갖었다. 행사에는

 장사익, 쟈니 브러더스, 이동원, 신계행, 류키 등 가수들의

공연도 진행되었다. 이 행사에서 최동욱의 최초  DJ 방송이

있게한 당시의 동아방송국장이었던 최창봉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DJ 방송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함께 올린다.






최창봉 축사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전 KBS부사장, MBC문화방송 사장



오늘은 매우 뜻 깊고 또 무척 감동스러운

날입니다. 내가 1960대 초,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의 방송계를 둘러보았을 때 몇 가지 감명과 새로움에

 대한 자극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라디오 방송

에서의 퍼서탤리티의 역할과 활동 이였습니다. 뉴스는 아나운서

대신 앵커가 진행하고 있었고, 음악 프로그램은 아나운서가

아닌 ‘퍼서낼리티’들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퍼서낼리티 는 디스크 자키 가운데 15년

이상의 관록을 가진 전문방송인으로 프로그램의

 제작에서 송출, 취재와 대담에서 뉴스에 이르기 까지

전천후 라디오 탤런트인 것이죠.   나는 1962년 후반에

동아일보사에서 신문언론사로는 처음으로 방송을 겸업하는

동아방송의 개국하는 일을 맡은 바 있습니다. 1963년 4월

25일에 개국한 동아방송은 여러 프로그램들이 라디오

 방송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포맷과 시행에

 따른 남다른 고초가 따랐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 라디오 방송에서

디스크 자키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방송계에서는 처음으로

전문 디스크 자키 전용 스튜디오를 2개나 설계하도록 꾀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원고를 받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표정도 감추어야 하는 아나운서에 의한 개성있는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에는 제약과 한도가 있었습니다.   DJ전용

스튜디오는  완성했으나   정작 이를 활용 할만한 전문 DJ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1964년 10월 초 드디어 프로듀서

인 최동욱에 의해 그 여망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감격스런 DJ가 첫 탄생이 된지

 꼭 5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라는 것에 한없는 축하와

그동안의 노고에 큰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이것은 의미깊은

 한국방송의 큰 전환점을 된 것 입니다.   최동욱은 더불어 방송이

 나가지 않던 당시 데드 아워인 오후 시간대에 “세시의 다이얼”을 통해

 종합 리퀘스트 포맷으로 정진해 방송시간이 아니던 이 시간대를 청취율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으로 승화했습니다. 1966년부터 연속 3년동안

문화공보부의 공식 여론조사에서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에 앞서 그는 “Top Tune Show"를

통해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방송시간 무렵이면 방송국으로 몰려드는 긴 행렬이

이뤄지면서 소위 ‘오빠부대’의 출현도 이 때가 처음이였습

니다. 이러한 기록적인 방송에 대한 열정과 감동이 오늘 이 뜻 깊은

모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지난해부터 라디오의 르네상스가

일어나 본격적인 ‘라디오는 뉴스와 음악이다’라는 방송본연의 위치로

되돌리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디스크 자키라는 명칭도

퍼서낼리티 로 바꿔 쓰면서 3~4시간의 개성있는

 DJ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역량있는 디스크 자키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주인공이 될 것을 기대 합니다. 오늘

 한국방송 디스크 자키 탄생 50주년을 기리면서 한국방송

디스크자키협회가 DJ날로 설정한 것은 우리 방송역사상

기념비적이고, 자랑할 만 한 쾌거로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한국 방송 디스크자키 탄생 50주년과 한국방송디스크자키

협회가 선정한 DJ날을 마음 다해 축하해 마지

않습니다.감사합니다.





디스크 자키에 대한 최동욱의 단상 (斷想)


뮤직홀, 음악다방, 뮤직 살롱에 대한 정의

그로 더불은 장소, 인명 등이 인터넷 상 여기 저기서

 짜깁기 로 쓴 글들이 많아 안타가운 일입이다. 우선 작성자가

시대적 정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앞뒤가 뒤바뀌는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뮤직홀이라는 시대적

문화공간에 대한 이해가 소개되거나 정리된

 글이 전혀 없는 점 입입니다.


우선 뮤직홀에서는 판만 틀어주는

 Player 란 사람이 있었지 디스크 자키라는

말을 쓴 일이 없었습니다. 78회전 SP를 들려 주다가

1955년 전후해서 LP가 소개되면서 동화음악궁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과 종로 2가 인사동 입구의 ‘르네상스’

(60년대 초에 종로 1가 희다방 4층으로 이전, 그 3층에

박원웅이 경영한 ‘무아’)에서 SP에서 LP 로

전환하는 매신저역할을 했습니다.


1955년에 번성하던 충무로의

 ‘세시봉’은 천선녀가 아니고 배우 김지미가

 모 군장성의 자금으로 문을 열었고, 당시 국회부의장

이던 조용호 부친의 부인이 한 여장부 같은 여인과 동업을 했죠. 

 숙명여대 대학생 배우 엄앵란이 단골이기도 했죠. 나도 자주 드나들었

습니다. 그러다 1960년에 종로 2가에 매머드급 뮤직홀 ‘디쉐네’가 생겨

 났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뮤직홀에서는 플레이어 들이 신청곡을 중심

으로 판을 틀어 주었습니다. 프라이 이호범이 여기에 단골이었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Rock 넘버만 나오면 앉은 자리에서

몸부림 춤을 추는 것으로 걸물이였습니다.


이 무렵 당시 대학생의 강제징집

 (학적보유병-학보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고려대학교 재학생인 최동욱이 업주와

상의하여 디쉐네 골목 입구에 있던 ‘종로소리사’에서

마이크를 설치하여 종전 플레이어들이 판만 틀어주던 소

극적 소개를 Talk (한국식 슬랭 ‘멘트’)를 넣는 파격적 시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뮤직홀에서 최초로 시도된 디스크 자크 였습

니다.   물론 이전 까지 뮤직홀에서 디스크 자키란 말을 쓴 적이

 없었죠. 뮤직홀에서 음악소개에 Talk를 넣는 일이 신기했고 주목을

 받으며 인기를 모았습니다.그러자 1961년에 이웃 화신백화점

 3층에 신설된 “메트로”에서 최동욱을 전격적으로 스카웃

하였고, 보조로 서울대 사법대학 3학년에 제학중이던

정흥숙 (후에 MBC아나운서, 중앙대학교 가정

대학장역임)이 발탁되었습니다.


“메트로”는 충무로의 ‘세시봉’이나

‘카네기’ 종로의 ‘디쉐네’보다 고급스런 분위기

였습니다. 기독교 방송 현역아나운서들이 최동욱의

Talk에 심취했고, 단골 고객가운데는 음악사업하던 김영과

레코드 제작업자이던 킹박도 있었습니다. 1961년 말쯤 충무로에

 있던 ‘세시봉’이   종로 2가 YMCA뒤 ‘디쉐네’ 바로 이웃에 이전

개업했습니다. 홀 규모가 ‘디쉐네’에 버금갔습니다. 이번에는

 종로 2가로 옮겨 온 ‘세시봉’에서 ‘메트로’에 있던

최동욱을 스카웃해 갔습니다.


당시 ‘세시봉’에서는 서울대 미대를

중퇴한 조용호와 고졸인 이선권이 플레이어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명동입구 남대문로 2가

 미도파백화점 옆에 세워진 시대백화점 1층에 ‘스카라’뮤직홀이

생겼고 MBC 아나운서 원종과과 중앙대에 다니던 이종환이 최동욱

스타일을 모방하고 DJ를 표방했습니다.이번에는 충무로 ‘카네기’에서

최동욱을 또 스카웃 하였고, 그는 이내 또 다시 ‘디쉐네’로 컴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종로 2가 천도제약 뒤 2층에 새로 개설된    ‘뉴 월드’에서 최동욱‘을

 DJ실장으로또 다시 스카웃해 갔습니다. 이 무렵 제과점 태극당은 그 후에

 생겼습니다. 최동욱은 이종환, 이해석 (이석), 김준, 정흥숙, 이귀철

 (전 대성음반 사장) 등을 DJ 로 배정하여 시간을 배정해 주었

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PD로 특채 된

최동욱은 일정이 바빠 지배인 송종근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방송에만 전염했습니다.


송종근은 음반판매점 충무로의

 ‘명곡사’(뉴월드 겸임 사장 김태관)의

지배인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MBC에 레코드를 납품하면서 간헐적인 음악 해설을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송종근은 음악적 지식이나 자료를

최동욱에게 자문받아 방송을 했지만 한계에 이르자 때마침

뉴월드가 폐업 정리를 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레코드를

MBC가 인수하는 조건으로 뉴월드의 이종환을

 송종근 대신 출연하는 협의가 이뤄졌습니다.


 이종환이 MBC에 처음에는

 단순 게스트 출연을 하다가 촉탁발령을

 받았고 곧 프로듀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뉴월드의 레코드를 동아방송이 인수했다는 설은

완전한 오류입이다.) 뮤직홀에서의 디스크 자키는 최동욱이

 ‘디쉐네’, ‘메트로’, '세시봉‘, ’카네기‘ 그리고 ’뉴월드‘에서 각각

처음으로 독점하면서 소개를 하였습니다. ‘디쉐네’의 후임으로는

이종환, ‘메트로’의 후임으로 아나운서 ‘김인권’ 이 바톤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태평로 3가 조선일보에서 개설한 아카데미극장 2층 아카데미

감상실에서 김태웅 (지미)가 DJ로 활동했습니다.     1963년에 들어

서면서 ‘뉴 월드’ 뮤직홀 이후에는  사실상 뮤직홀 시대의 전성기가

끝납니다. 얼마 후에 생겨난 명동극장 골목 2층에 개설된

시보네’ 나 삼각동 입구의 ‘아포로’ ‘태평양’들은 후기적

 뮤직홀로 규모도 적었고 스타 DJ 들의 출연이

없었던 소극적 영업 형태였습니다.


‘시보네’는 얼마 후에 ‘실버 타운’으로

간판을 바꾸고 장발 롹그룹들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 아래층 ‘멕시코’는 배삼룡이 보던 사회를

최동욱으로 바꿔 박인수, 라나 에 로스포 8군 소속 Rock

 Group 들이 출였했습니다. 1964년 명동에 명동장 빌딩에

식당 클럽이 생겨났습니다. 1층에 명동장이란 경양식당과

심지다방, 2층에 OB's Cabin, 3층에 코스모스 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최동욱은 심지다방에서 1개월 있으면서

김진성을 조수로 썼습니다. 그리고 3층 코스모스

에서 메인 MC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는 미도파 5층 미도파 캬바레가

낮시간에 개설한 미도파쌀롱과 경향신문 옆골롬

‘라스 베이거스’에 소도 MC로 활동하면서 김태웅을

보조 MC로 세웠습니다. 이 무렵 명동공원 (뒤에 제일

백화점) 뒤에 ‘OB House'란 맥주 살롱이 있었는데 여기에

  홍익대학생인 이상벽이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명동장 건물

 (코스모스 빌딩 이라 하지 않았음) 2층의 OB's Cabin에는 MBC

라디오 PD 김정호가 피아노를 치면서 가수들의 반주를 해 주었고,

서수남과 당시 그의 부인 현정애 (현인 딸)의 듀엣, 김 패밀리,

 임성훈, 이성애 등이 출연하는 라이브 무대를 갖고

있었고, 3층 코스모스 홀에는 히 식스 등

 보컬 그룹들의 출연 무대였습니다.


한국 포크의 발상지, 무교동 ‘세시봉’ 의

표기는 세시봉이 포크 뮤직의 발상지가 아니고

더욱이 무교동이 아니고 서린동입니다. 어쿠스틱 기타

 (세칭 통기타) 하나는 친다고 해서 포크 가수, 그가 부르는 노래를

포크송이라고 일컫는 자체가 모순이고 어불성설입니다. 더욱이 ‘세시봉’이

포크 뮤직의 발상지 라는 터무니 없는 엉터리 소개는 문제가 있습니다. 종로 2가

에서 소공동 월계수다방 자리로 옮긴 ‘세시봉’은 여장부 주인이 캐너다로 이민가면서

 그의 사촌 여동생인 이선권의 모친에게 인계한 것이고, 소공동에서 영업이 안되자

서린동 스타더스트 호텔 옆 흙벽 초라한 장소로 옮긴 겁니다. 주인은

이선권 어머니 이지만그의 남편이 일선에 나섰고, 이

선권이 플레이어 로 일하면서 피세영

 등을 DJ로 기용했습니다.


당시 뮤직홀이나 맥주 살롱 등의

요식업은 2인 이상의 연주자를 무대에

 세울 수 없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업소들이 1인 기타 가수들을 기용하여 출연

하게 한것인데 이것이 포크 가수, 이들이 부르는 노래도 포크 송으로

와전된 것이죠. 서린동의 ‘세시봉’ 도 1인 이상의 출연이 부가능했습니다.

초기에 조영남이 군복을 검정염색한 옷차림으로 기타를 들고 오갔고,

그 뒤 윤형주가 ‘세시봉’에서 허듯렛일 하던 송창식과 어울렸죠.

그러다 주간한국에서 공개행사 등을 개설하였고, 급기야

대량 가수들의 무대를 시도하다가 당국에서 업태

위반으로 수 차례 경고를 받던 중 영업실적도

 좋지 않게 되자 폐업한 것입니다.


2~3년전 MBC-TV 가 추석특집으로 낸

‘세시봉’은 사실과 70% 가 달랐지만, 요즘 상영중인

 ‘세시봉’란 영화의 내용은 사실과 90%가 다른 엉터리 픽션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음악 클럽 (살롱)에서 정규적인

무대를 두고 가수가 출연할 수 있었던 곳은명동장의 ‘OB's Cabin'뿐이였고,

그 뒤 극장식 맥주홀이 생겨 나면서 번창했습니다. 글 가운데 " ... ‘디쉐네’의

DJ 최동욱의 인기는 영화배우 신성일이 부럽지 않았다.... “는동아방송의 ‘세시의

다이얼’을 두고 세간에서 평가한 말입니다. 키 워드 가운데 ‘그룹 사운드’ 가 있는데

 이것은 영어에는 없는 말입니다.즉 일본에서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 비틀즈 형태의

 ‘3 guitars and A drum'에보컬을 곁들인 Vocal & Instrumental Group을 그들 나름대로

 ‘구루뿌 싸운즈’(Group Sounds)로 표기하던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들여다

 ‘그룹 사운드’로 한 것입니다.그러나 일본에서 1970년 이후 ‘구루뿌

싸운즈’란 말을 쓰지 않는 폐어가 되었습니다.


마치 프랑스 말 ‘Roman'(로망-영어의

Romance)을 일본에서 한자음으로 浪漫이라

 쓰고일본 발음 ‘로만’으로 쓰는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들여다 ‘낭만’이라 즐겨 쓰는 아이러니와같습니다 마는

 더 중요한 것은 요즘 일본에서 한자 浪漫(로만)이란 말을

 쓰지 않고 버리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유식한

음악 해설가가 아직까지도 낭만파, 낭만음악 따위의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현상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뮤직홀 (음악감상실)에 대한 정통성 있는 소개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점매우 안타깝게 생각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최동욱을 통해 본 DJ 방송 50년"

소식 잘 보았습니다. 학창시절부터 기억에

남는 음악방송 프로 로는"밤을 잊은 그대 에게,와

 "별이 빛나는 밤에"등 이고  방송끝에 DJ, 0 0 0 였습니다.라

는 맨트가 흘러 나왔습니다..저는 학창시절 부터 광주 광역시에서

살았는데  광주문화방송국,인가, KBS 광주방송국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옥, DJ가 생각이 납니다. 그가 진행하는 음악 방송에서   귀에

익은  팝송들을 배운 것 같습니다.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

방송 이장춘 사장님!^0^ ^0^ ^0^ ^0^ ^0^



한국방송과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창립 8주년 기념 Conference 

http://blog.daum.net/jc21th/17782184


DJ 방송역사와 곽규석, 최동욱, 이종환, 박인희 디스크 자키 disk jockey









최동욱.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