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에서 활동하는 여류시인 박복수! 박복수 시인과 필자의 인연은 2012년 미주방송인 협회 창립 35주년 기념 사진으로 부터 비롯된다. 유난히도 고운 한복차림의 박복수 시인! 그분이 바로 미주방송인협회 15대 회장을 역임하신 분이라는 것으로부터 관심이 모아져 그분에 관한 애기를 모으고 글을 쓰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렸다. 그동안 이메일을 통해서 주고 받은 얘기를 모으면서 세월이 지나 이제 멀리서나마 그분을 좀 더 알게되어 그동안 피상적으로 써 올렸던 글에 알맹이를 다소 넣어 보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 시인 박복수(여) (1) 유년, 젊은시절 그리고 6.25의 기억 필자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80대 중반의 할머니 시인이 사람들이 모인곳에서 시를 암송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가 하면 미국 문단에서 여러 활동을 하며 또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교회활동도 폭넓다. 박시인과 주고 받는 이메일에도 여러 다양한 글에 사진이나 동영상도 있고 시나 수필을 보내오신다. 물론 필자 보라고 보내 오시는 것이지만 그 글속에는 너무 곱고 아름다운 사연이 있고 고귀한 뜻을 담고 있어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좋은 일, 좋은얘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좋아하는 필자가 박시인의 글을 보며 감동받아 글을 올리다 보니 미처 몰랐던 일을 차츰 알게 되면서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몇편의 글을 먼저 써 올리고 거꾸로 박시인의 유년, 젊은시절 그리고 학창시절 격은 6.25의 기억을 첫번째 글로 삼아 이 글에 올리게 되었다. 1932년 서울 가회동 4남매중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유학을 다녀와 서울에서 외과의사를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6.25로 아버지는 납치 당해 어머니가 네 남매를 기르며 살았다. 박시인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1년 미국 U.C.L.A. 대학에 들어가 수학중 남편 박영곤과 결혼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공부하기가 어려워 졸업식에는 참여했어도 학점미달로 졸업장을 받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살았다. 먼저 박시인! 유년시절의 사진과 박시인이 직접 쓴 사연을 통해서 어린시절을 알아본다. 더 자세한 얘기는 제4편 「어머니와 라일락」 편에 있다.
유년시절의 박시인
박시인 2살 때 오빠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1934년, 서울 종로에선 제일 유명한 '아카데미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새양단 '꼬까' 를 입고 찍은 것인에 종로 거리에 있던 박시인 부모님의 단골 포목점 <윤 상회> 윤씨 아저씨가 이 양단 두루마기 감을 자르면서 " 우리 복수 두루마기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이네!" 라고 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귀한 옷을 입고 귀하게 찍은 사진인지를 짐작케 한다. 벌써 80년이 넘은 얘기지만 박시인은 그때의 기억을 담아 이메일로 보내 오셨다.
「유치원 시절, 늘 침모 아주머니가 옷감 남은 조각들을 주셔서 저의 상자에 모아 놓고 '조각 보'를 만들고 인두질도 하며 바누리질을 열심히 했었데요. 침모가 시장간다고 "아가 같이 가자" 하시면 아무리 급해도 가지고 놀던 헌겁들을 다 저의 바느질 상자에 차곡, 차곡 다 넣고야 따라 나왔데요.」라며 80년이 더 지난 얘기를 흥겹에 써 보내 주셨다. 박시인 유치원 때 사진(위) 사연
이 사진을 촬영하던 시절 아버지가 이발관에 가실 때 마다 대리고 가셔서 뒤는 남자 머리같이 바리캉으로 밀어 올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동경 유학 시절 방학 때면 어머니가 봄가을, 밑반찬을 해다 드렸는데 일본에 가면 우리는 여관에 들어 있었습니다. 여관 앞 에서 동내 애들과 노는데 어떤 사내아이가 "난자 오나고자 나이까!" 사내아이 인 줄 알고 같이 놀아 줬는데 계집애였구나 하고 가버려서 울고 들어 간 적이 있어 잊을 수 없는추억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가부끼' 라는 공연이 있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여 드리고 싶어 갔었습니다. 극장 안이 다다미 방에 신을 벗고 들어갔는데 제가 소변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사방을 둘러보시던 어머니가 사람들이 콩나물 박힌 듯이 꽉 차 있어 도저히 나갈 수 가 없으니까 " 조금만 참을 수 있니?" 하셨습니다. .
참다못한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만 ........ 부끄러워 울고 있던 저를 달래시던 아빠와 엄마……. 사람들이 다 가고 빈 방에 우리 식구만 남아 아버지가 부르신 종업원을 기다리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그 시절에는 '연락선' 이라는 배를 타고 '시모노새끼'까지 가서 기차로 동경엘 갔었습니다. 박시인 젊은시절 박시인 학창시절 1948년 그시절 잘나가던 성우, 조남사, 위진록 등의 추천으로 KBS 성우가 되었다. 고 하셨다. 위 사진은 6.25 첫방송으로 널리 알려진 위진록 선생님과 함께 마이크 앞애 선 모습이다. 6.25로 모든것이 사라져 버린 박시인에게 그 때의 자료는 없고 위 사진은 뒷날 기자분이 보내주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이 사진 촬영시기에 관해 늘 궁금 해 한다. 6.25 전 정동에 방송국이 있을때는 77DX라고 불리는 위 사진의 마이크는 사용되지 않았고 남산 방송국을 세우면서 처음 사용했기 때문이다.) 박시인은 뜻하지 않은 6.25를 맞아 피난길에 올랐다. 박시인은 그때의 애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6.25 동란으로 방송국에서 마련 해준 열차 화물칸에 실려, 가족과 함꼐 대구로 피난을 갔었다. 그 후, 부산방송국으로 남하 하던 중, 우리 방송인 들이 탄 버스가 대형 트럭과 충돌, 운전대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앞 유리창을 뚫고 거리에 던져졌다.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을 했다. 마침 그 병원 부속 간호학교 학생들이 문예지를 들고 몰려와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보여주던 책의 표지 전면엔 나의 무릎까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덕분에 병원에서는 공주 같은 과분한 특대를 받았다. 그 당시 내가 담당했던 심야프로그램 <문학의 밤>은 많은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 또한 모파상 (Guy de Maupassant)이 쓴 <여자의 일생> 은 언젠가 나도 우리 한민족의 여자의 일생을 쓰리라는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 나의 대한 기사는 <샛별>“장래가 기대된다.”는 기사였다. 허나 학업에 전력을 쏟기 위해서는 방송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젊은 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중의 으뜸인 이른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태양계 가족 중 계명성 (啓明星),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다는 뜻을 가진, 금성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방송인에 대한 미련과 함께, 나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으며 가슴 답답할 때면 나의 유일한 위로의 벗이 되어 주었다. 박시인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위는 서울대학교 졸업때의 사진이고 아래는 서울대학교 재학중 교수, 학우들과 함께 한 사진이다. 박시인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위 사진은 하와이에서 미국 유학길에 오르던 때이고 아래 사진은 미국 유학 다음날 헐리욷에서 촬영한 사진으로1961년이라고 되어 있다. 언제 하와이에 갔으며 왜 하와이를 거쳐야 했는지 등등 얘기는 추후에 보완 할 것이다. 박시인은 1961년 미국 LA에 있는 U.C.L.A. 대학을 들어갔다. 여기서 만난이가 바로 지금의 남편 박영곤님이다. 대학원 법대생 박영곤을 만나 남편 졸업 한학기 남기고 결혼식을 올려 가정을 이루면서 학업이 어려워진 것이다. 대학을 수료했어도 아이들 기르느라 학점이 미달되어 졸업장은 못받아 졸업이 아닌 수료라는 말을쓴다. 대학입학 축하 여행길에서의 사진 한장 더 올렸다. 위, 아래 사진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하와이 여행길에서 촬영한 사진 더 자세한 얘기는 박시인 약력을 올려드리고 얘기를 계속 더 써 나갈 것으으로 차츰 보완 할 것이다.
박복수님 약 력 Bok Sue Park 朴福穗
출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생년월일 : 1932년 e-mail: boksue@gmail.com 학 력
재미 방송인 올해 미수 박복수 시인께서 2019년 5월 20일
아! 이규항 음악가 님 ; 어느 가수보다 성악가보다 어느 꽃 보다 아름다운 그 음성, 그 노래 솜씨는 하늘이 내려 주신 특별한 선물,
이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비길 수 없는 이 망구가 처음 느껴 보는 감동, 감동이었습니다.
이규항 성악가님, 이장춘 작가님 BRAVO!! BRAVO!!
Nobel상 보다 세계 어느 상 보다 고귀한 하늘의 축복의 상은 두 분의 것이었음이 여실히 들어 났습니다.
두 분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축하합니다.
아낌없는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You are the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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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시인 박복수 (1) 유년, 젊은시절 그리고 6.25의 기억 재미 시인 박복수 (2) 금혼의 노래, 미주방송인회 협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728
재미 시인 박복수 (3) 시(詩)와 시암송 동영상 (윤동주 별헤는 밤) 재미 시인 박복수 (4) 어머니와 라일락, 2015년 을미년 연기 年記
미주방송인협회 제15대 회장 박 복수님 시인 시집 박복수 시인 블로그 바로가기 영분자 클릭 http://blog.daum.net/sarah48kim/49
6.25첫방송으로 널리 알려진 위진록 아나운서 (오른쪽 두번째), 미주방송인 협회 김정수 회장님(오른쪽) 양방수 총무국장님(왼쪽)과 함께 한 박복수님입니다. 박복수님 옆의 박영곤선생님은 남편이십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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