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라디오 (목포의 눈물-이난영)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여성 보컬그룹 최초의 한류스타 김씨스터즈! 숙자, 애자, 민자 그 김씨스터즈의 리더 언니 김숙자가 2015년 11월 2015년 11월 18일 (방송 16일)가요무대 30년을 맞은 특집프로그램에 출연 감동의 무대를 가젔습니다. 어머니의 노래 "목포의 눈물", 다방의 푸른꿈, 그리고 자신의 노래 김치깍두기를 부르며 사회자 김동건 아나운서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사회자 김동건은 가요무대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수 많이 불렸어도 오늘의 뜻깊고 감동적인 무대라고 했습니다. 이난영의 딸이고 김해송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명예의 전당에 올랐던 그 김씨스터즈의 리더 언니 김숙자! 그는 파주에 있던 어머니 이난영의 유골을 목포에 옮겨 수목장을 하러 왔다간지 9년만에 찾은 조국 대한민국에 와서 이날 무대에 섰다고 했습니다. 1957년, 고복수의 은퇴공연에서 불렀던 어머니 이난영의 노래가 녹음으로 울려 퍼지자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 섶을 달고 나왔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찌 할 수 없었다. 고 했습니다. 그날 그 영상과 사진에 얘기들을 모으고 가요무대 30년 글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올렸던 글 한편을 함께 실었습니다.
김시스터즈 이난영 딸 김숙자 김씨스터즈 최초 한류 보컬그룹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가 세계각국에서 방영되고 한국의 가수들이나 배우들이 세계각국을 누비며 한류열풍으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세계만방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KBS는 작년과 금년 2년간 미국, 월남, 중국 등 각 나라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빋으며 공개방송을 통해 K-POP를 선사했고 프로듀서 이수만을 비롯한 소녀시대등 많은 가수 연예인들이 각종 훈,표창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와서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류를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의 최승희를 들 수 있습니다. 최승희는 그 시절 미국이나 유럽에서 대단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의 춤 문화를 만방에 알렸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1954년 KBS어린이 합창단이 3개월간에 걸처 미국을 순회하면서 한국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등 어찌보면 이들도 한류의 원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한류스타의 원류는 김시스터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능 천재 연예인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의 딸로 태어난 세 자매는 6.25 전쟁 기간중 어려운 생활을 거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이름있는 여성 보컬그룹으로 성장해서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미국 유럽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1939년에 태어난 첫 아이로 부터 1940년대 초에 태어난 김씨스터즈가 대중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른 것은 1951년 부산가는 미군열차에서였습니다.
열 살을 갓 넘은 영자, 숙자, 애자, 새 자매는 열차에 탄 미군들을 상대로 노래의 뜻도 모르는 영어로 된 세계적인 히트 곡 두곡을 흉내 내어 불렀습니다. 가사도 틀리고 노래가 서툴렀겠지만 어쨌든 그로부터 그들은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6,25로 아버지를 잃고 먹고 살길이 없던 부산 피난 시절에 먹을 것이 생긴다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노래생활은 혹독한 어머니 이난영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미 8군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시스터즈의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방송국 공개방송에도 출연했고 극장무대에도 섰습니다. 오늘의 동영상은 그때 김씨스터즈가 KBS 공개홀에서 부른 "닐리리야" “봄 맞이" 입니다.
동영상 보기
닐리리아
봄 맞이
청춘목장을 처음 부르던 때 1956년 손석우 송민영 송민도 김씨스터즈'
국내에서 한참 인기를 끌던 김씨스터즈가 미국으로 떠난것은 1959년의 1월의 일입니다. 큰 언니 영자 대신에 외사촌 민자가 팀에 합류한 것은 이때였습니다. 39년생 딸 숙자와 40년생의 냇째 딸 애자 41년생의 외사촌 민자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동양 쇼의 메니져 톰 볼스와 18개월 계약 으로 라스베가스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주급 500불을 받아서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워낙 써야 할 곳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국내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 올수 없다는 어머니 이난영의 완곡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그의 명성이 알려 지면서 1964년에는 주급 20,000불을 받기로 이름 있는 쇼단과 계약이 채결되어 일약 대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미국에 알려져 미국을 돌며 공연을 가졌고 그때마다 갈채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 파리, 런던 등 전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을 가졌고 가는 곳 마다 아리랑을 불러 갈채를 받으면서 대한민국을 알렸습니다. 막내 민자가 사정이 생겨 탈퇴하고 큰 언니 영자가 다시 팀에 합류 한 것은 1973년의 일이고 1975년, 1980년에는 내한 공연을 가져 갈채를 받았습니다. 우수한 재능과 부지런한 성품을 지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은 지금도 세계만방에서 대한민국을 알리고 대한민국의 문화를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못다 쓴 부분은 아래 영문자 주소에 가사셔 보실 수 있습니다. 그곳의 동영상을 링크함과 동시에 엮인글로 연결 해 놓았습니다. 외국공연 동영상 더 보기
화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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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무대 30년특집 동영상 모음 1443회 KBS 2015년 11월 16일 http://blog.daum.net/jc21th/17782673
http://blog.daum.net/jc21th/17781371
저고리 씨스터와 아리랑 보이스, 김 시스터즈와 김보이스, 김해송과 이수만 http://blog.daum.net/jc21th/17782221
이시스터즈 http://blog.daum.net/jc21th/17782697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대한의 딸들, 보컬그룹 김 씨스터즈, 자랑스럽습니다.특이 목포의눈물, 노래의 주인공이신 불멸의 가수 이난영의 딸들이라 더 빛이 난 것 같습니다. 미국,영국, 프랑스등 세계무대에서 노래로써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그 들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 하니 고무적 입니다.이제 반백의 나이에 다시 고국의 가요무대에 서서 어머님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시울을 젹시셨다 하니 이 프로를 보는 나의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60.11.20이라고 사진에 찍흰 글자로 보아 60년 11월 20일 사진인데 제가 15살 때여서 이분들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거나 많지는 않지만, 그분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기억속에 살아있는 노래들도 있어요. 악기를 20여종의 악기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회자의 소개가 있었듯이 역시 말해줍니다. 한류스타의 시발이였군요
위, 이냔영과 김 시스터즈 아래 : 목포시가지와 삼학도 지금은 육지오 되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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