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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양창선) 구봉광산 극적구출 그때 그 얘기 현장취재 아나운서 오철환

이장춘 2015. 12. 4. 23:19

 

 

 

1967년 9월 7일 동아일보 호외를

머리사진으로 올렸다. 그 시절을 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양창선이라고 잘 못 보도된

김창선의 금광 갱 속에서 16일간의 사투, 그의 구출과

인간승리 장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한민국 모든

방송과 신문 등     언론매체는  충청남도  청양에 있는

구봉광산  김창선의 구출현장에그 촛점이 모아졌고

방정희 대통령은 담당 비서관을 직현장에

 파견 구출작전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그 김창선은 15일 8시간 35분

(368시간 35분)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그때까지 그런 예가 없어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김창선님의 최장 매몰기록은, 28년 뒤인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때 19살의 박승현양이 15일 17시간(377시간만에 극적으로 구조

될때가지 그 기록이 유지되었다. 그때 대전방송국 홍성중계소 오철환

 아나운서는 현지에서 갱속에 들어있는 창선과  얘기를 나누어

KBS 중앙방속국 방송을 통해서 세상에 알렸다.

 

 

 

 

그 김창선과 그때 그 현장을 취재한

 오철환 아나운서는 80대 중반이 되어 2014년

7월 김창선이 살고 있는 부여에서 만나 서로를

 껴안으며 얼싸 안았다. 오늘 글은 2015년 7월  KBS

사우회 이종태 아나운서가  김창선님과 그때의 오철환 

아나운서를 만나 나눈 얘기로 2014년 9월 1일자

 KBS 사우회보에 실린 내용이다.

 

 

김창선(양창선) 구봉광산 극적구출 그때 그 얘기 현장취재 아나운서 오철환

 

 

왼쪽부터 오철환, 양창선, 이종태

 

 

올해 82세인 오철환 회우,

47년전, 구봉광산 매몰광부 김창선씨를

 특종 인터뷰 했던오 철환 회우 올해 82세인 오철환

 회우, 1958년 KBS에 발을 들여놓은 후 대전, 남원, 춘천

 등지에서 근무하고 1986년 8월에 정년퇴직했다. 47년 전, 1967년

 9월 6일 청양 구봉 금광 매몰 사고에서 16일 만에 구조된 김창선 씨를

특종 취재했던 주인공으로 필시 그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다 이왕이면

오 회우와 김 씨와의 만남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드라이브를 겸해

김씨가 살고 있는 부여로 달렸다. 부여로 향하는 차중

에서 오 회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정리 : 이종태 대전편집위원)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내 나이 35살이었을 때 전 국민을

한때나마 감동 의 물결로 출렁이게 했던

그 때로 돌아가 특종하던 기분에 한번

젖어보고 싶어요.

 

- 그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홍성중계소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하던

1967년 8 월 22일, 이웃 군(郡)인 청양군청

이성언 통신원으 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지요.

 청양 구봉산에 있는 금광이 무너졌고 광부 한 사 람이

갇혀 있으니 빨리 취재를 오라는 내용이었습 니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갔지요. 파악된 내용은 1,200미터 지하

갱 속에 37살 김창선 씨가 갇혀 있 는데 다행히

막장에 설치된 전화기가 있어서 연락은

되고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 때 갱 속으로 들어가서

인터뷰를 하셨죠?

 

그럼요, 갱 속에 묻힌 지 열흘 째인

 9월 1일 오후 6시, 광산 기술자를 따라 나는

녹음기를 들고 지하 갱 1,200미터까지 들어갔어요.

칠흑같은 어둠 속 에서 갱내 전화로 김창선 씨와 겨우

 통화를 했죠. “KBS 오철환 입니다. 지금 기력은 어떠세요?”

 “아직은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먹을 물이라도 있습니까?”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고 있어요, 너무 추워

죽겠어요, 빨리 살려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구출 작업을 하고 있고 또 전 국민이 빨리 구

출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산소가 부족한 갱 속이어서 거친

호흡과 답답한 김 씨 목소리가 3분 정도

녹음되었고 그 날 밤 10시 KBS 뉴스로 전국에

방송되었습니다. 신문기자도 취재를 했지만 김씨 육성을

내보내는 라디오를 따 라 올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라디오가

판정승이 었지요.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김 씨 육성 뉴스가 나가자 

그 이튿날 모든 신문과 방송이 취재에 나섰 습니다. 대통령이 비서관

 현지에 보내 구출에 총 력을 다 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

으니까요. 당연히 국민의 눈과 귀는 충청도 산골,

청양군 구봉산 금광에 쏠렸습니다.

 

- 그 후에도 몇 번 더 들어가서 인터뷰를 했다지요.

 

그럼요, 갱내 취재는 우리 KBS만

 유일하게 녹음 인터뷰에 성공했고 중앙방송국

에서 김학영, 나형수, 정량 기자가 와서 같이 취재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녹음테이프는 산길을 달려 청양전화국에

가서 본사로 보내 전국에 방송했습니다. 지금으로 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취재여건이었습니다.

 

-그때 인터뷰 가운데 인상에

남는 내용을 꼽는다면…

 

내가 바깥소식을 전하면서 딸이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한 말씀

해 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김씨는 “정애야, 경옥이랑

싸우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말씀 잘 들어라, 그리고

정애엄마, 애들 좀 잘 돌봐줘요. 그리고 큰 형님께 한 말씀 드립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카들과 우리 애들 성공할 수 있도록 잘 부탁합니다.”라고

 마치 유언 같은 말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절망이 느껴지는 상황에서라면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얼 마나 마음을 울리던지… 나는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2, 3일 안에 구조될 수 있을 거예요. 모두가 구조에 매달리고

있고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지요.

 

- 그 당시 녹음기를 지게에 지고

다녀야 할 만큼 부피 가 컸다는데…

 

그런 큰 녹음기였다면 못 들어갔겠죠.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우연과 행 운이 함께 찾아 온 일이 있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얼마 전, 당시 청양출신 장영순 국회의원이 공보부 간부와 함께

홍성중계소에 왔어요, 어려움이 무엇 인가? 라고 내게 묻더군요. 바로

이때다, 하고 휴대하기 좋은 소형 녹음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당시로는 정말 귀한 것이어서 금방 보내 줄 것으로는 생각도 않았 는데 일주일

 만에 최신형 일본제   (SONY) 녹음기가 하나 왔더라고요. 그것으로 확실하게

 취재를 할 수 가 있었지요.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그 때 녹음기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육성녹음은 생각도 못했을 것 이고

신문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을 것입니다.

 

 

 - 김 씨는 얼마 후에 구출되나요?

 

매몰 16일 만인 9월 6일 오후 6시에

 구조되었습 니다. 그 날 밤 9시 KBS라디오가

 특집 뉴스로 1시 간을 현장에서 생방송했습니다.

중앙방송국에서 내려왔고 나도 출연해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얘기 했죠. 그때는 라디오 전성시대이고, 앰프라고

 하는 유선 라디오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을 때였으니   아마

청취율이 최고였을 겁니다. 16일 만의 구출은 당 시로는

 매몰 최장기록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지요.

 

구봉광산 특종 이야기를 하다

어느새 부여의 김 창선 씨 집에 도착했다.

특종보도로 인연이 되었던 오철환(82) 회우와

김창선(85) 씨는 반갑게 포옹했 다. 이번에는 김창선

씨에게 몇마디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네, 해병 봉사회에서 활동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 니다. 며칠 전 궁남지 서동

연꽃 축제에도 교통정 리하면서   참여했고

 9월 말 백제문화제 때도 봉사 할 겁니다.

(그는 해병대 출신이다)

 

-매몰로 인한 후유증 같은

것은 없었는지요?

 

참 오랫 동안 갱속에서 악전고투했는데

구출된 후, 신기하게도 매몰후유증 없이 건강이 빨리

회복 되었습니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 한 동안 양창선씨로 알려지고

 소문도 많았는데…

 

순전히 잘못 알려진 겁니다.

어떤 신문에서 잘못 쓴건데 그렇게

보도가 되다보니 그렇게 아는 사람이 지금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좀 알려지고 나니까

별별 소문이 다 나더군요, 하루에 넥타이를 네 번 씩

갈아매고 여자를 만나러 다닌다, 술과 노름 으로

인생 망쳤다. 연탄가스로 죽었다 등등

 

 

 (38살일 때 구봉광산에 매몰되었던

김창선 씨, 35 살 때 취재를 했던 오철환

 회우가 80대 중반에 만나 47년 전 이야기

조각을 맞추면서 추억에 젖었다.)

 

<다시 오철환 회우와의 인터뷰>

 

 -당시 취재했던 자료 가운데

혹시 아직도 가지고 있 는 것이 있는지요.

 그럼요, 당시 취재 원고와 테이프는 내 방송 인생

에서 소중한 물건이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마련한 것이지만 구식 녹음기도 있는데 이제

방송사료로 KBS에 기증하고 싶어요.

 

-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라면,

 

10년 전에 작고한 조창동선배를

들고 싶습니다. 참 어려운 시대였는데도

 인화에 솔선하시던 선배 님이 항상

 고맙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어떤 마음으로 살아 오셨는지?

 

좌우명은 근면 성실입니다. 4

남매를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은 알뜰한

집사람(노원숙)의 수고와 정 성 덕분입니다.

그리고 고마워 하고 있지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대한노인회 대전 서구 지회 부회장과      내가 사는 아파트

노인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파트 노인회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더군요. 노인회관에서 컴퓨터 강좌가 있는데

 재미있습니다. 공문서 작성도 하고…

 

 

-정정해 보입니다. 특별한 건강 비결이라도…

 

아직 아픈 데 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공부하 고 노인회에 가서

사하다보면 하루하루가 금방 지나가요.

즐겁고 바쁘게 사는 것이 건강한

비결인가 싶기도 합니다.

 

 - 근면 성실하게 큰 욕심 없이

 사는 삶이 건강을 지켜 주는 것 같습

니다. 47년 전 9월 청양구봉광산 특종

야기와 함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 김용현 회우)

 

만나고 싶었습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끈질긴 생명에 질긴 인연,입니다.

김창선 씨! 그 때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하셨지요.생환을 축하 드리오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계시니 감사합니다.방송을 들으며 긴장했던 그날의

 감격이 새롭습니다.추억속의 사건 소식을 재 조명

하여 보여주신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대담을 나눈 이종태 아나운서

 

 

 

아리랑 뉴욕 필 하모니.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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