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한국아나운서클럽 제19호 초대석 이장춘 2015년 9월 15일 발행

이장춘 2015. 10. 15. 00:40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18호에

춘하추동방송 10년에 관한 기사가 실리더니

19호에는 감사패 증정기사와 함께 춘하추동방송 초대석

기사가 실려 이채로습니다. 아나운서가 아닌 사람으로 초대석에

실린것은 노창성 이옥경 최초의 방송인의 딸노라노 여사 이래 처음있는

 일이고 편집장이  직접 취재해서 올린 글이라는것도 이채로웠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2015년 9월 15일자로 발행된 제19호 한국

아나운서클럽기사와 초대석 글 전문을 옮깁니다.   

 

 

 

 

회보 1면기사

 

 

<춘하추동방송> 블로그 개설

10주년 이장춘 운영자에게 감사패 증정

아나운서에 관한 100 여편 기록물과 <한국

아나운서클럽회보> PDF 탑재한 공로

 

 

8월 25일 아나운서클럽 정례모임
(사)한국아나운서클럽 정례모임이 49명

참석한 가운데 8월 2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여의도

열빈에서 열렸다.  임국희 회장은 “비가 오는데도 많이

주셔서 고맙다. 황우겸, 임택근, 전영우,박종세 고문님

들을 비롯한 많은 선배님들과 후배, 현역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기쁘다.”라는 인사말에 이어

 

 <춘하추동방송(http://blog.daum.net/jc21th)>

이장춘 운영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지난 10년간 아나운서에 관한

 100여 편의 기록물과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인쇄 상그대로 컴퓨터에서 볼수 있게 한 PDF(Portable
Document Format) 탑재搭載를 통해 아나운서들의고락苦樂을

널리 알린 공로이다.이장춘 운영자는 “매우기쁘다. 80대 원로부터

 20 새내기까지 세대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게

늘 영광스럽다. 특히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를 제작하는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클럽회보가 <춘하추동방송>에2011년 3월 창간호

부터 전부 실려 있으니, 컴퓨터만 가능하다면 글자 크기도

정하며 더 편안하게 볼 수있을 것이다. <춘하추동

송>이 내 것이라 생각하고많이 이용해

달라.”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초대석 글 회보 3면

 

 

 

 

1944년 항일단파방송연락운동 옥사자

이근창 선생 공적 밝혀내 68년 만에 건국훈장

 추서될 때 감개무량8월 25일 (사)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임국희) 정례모임에서 아나운서들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운영자가 감사패를

 받았다. 지면紙面이란 제한 없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방대한

 방송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춘하추동방송>은 2012년 다음 우수

블로그로 채택된 것으로 입증되듯 콘텐츠 제공자나 수용자

모두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방송의 날을 즈음해

 이장춘 운영자의 서울 방배동 자택을 방문해 

블로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황인우(전 KBS) 편집장

 

 

 

매일 자정이 넘어 누적 방문자 수 등 블로그 상황을 점검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올리며 세계를 누비는 작업실에서 이장춘 운영자와 함께한 필자 (주 : 황인우 편집장)

 

 

그 동안 참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셨어요.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방송 역사를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언 10년!    쁘고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참으로 보람 있고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나운서 역사는 이 땅의 방송역사와 일치하기에 글을 쓰

시작하면서부터 아나운서에 관한 글과 수많은 역사 기록물들을

 <춘하추동방송>에 올리게 되었지요. 대한민국 아나운서들과

이토록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자료가 없으면 저희 회보

발행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지요.


2011년 3월 15일,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가

 발간되면서 모든 방송사료放送史料들이 공유되었고

 <춘하추동방송>은늘 한국아나운서클럽과 함께하고 있습

니다.처음에는 아나운서가 아닌 이장춘이 아나운서클럽에

 여하는 것이 어색함도 있었지만, 이제는 따뜻한 정을

나누는 한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모이는

 곳이면 카메라와 녹음기를 고 현장에 나타

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지요.  

 

행사가 끝나자마자 블로그에 올리시는

 열정에 감동받고 늘자극받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벽을 넘고 전·현직,

세대를 초월해서 그리고 바다 건너, 국경 넘어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한국 아나운서라는 이름을 단

 분들과  얘기를 나누노라면   순식간에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1년이 지납니다.   서양화가이자 조각가이며 수필가인

이정부 아나운서가 붙여준 ‘청사 없는 방송국 연봉

 없는 방송국장’이란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미국에 계신 아나운서들과도 각별히 지내시지요?

 

미국에는 국내에서 활동하시던 많은 아나운서들이

 살고계십니다. 홍양보 아나운서는 생사불명이지만 호기수,

 위진록, 유덕훈 아나운서 등 6.25 전에 활동한 원로부터 김봉구,

김영우, 서정자(성우 출신), 노시창, 장인숙, 김정태, 김영호, 정영호,

 송현식, 권윤기, 홍우창, 강미란 아나운서등이 있지요. 그리고 민재호,

장기범, 최세훈 아나운서 가족 등과 대화를 나누며 지냅니다. 미국에서

고국을 그리시는 분들은<춘하추동방송>과 더 가까이 하시는 것 같아요.
특히 미주 한인방송의 시조 김영우 아나운서는 2014년 2월 은퇴하면서

 방송장비는 미국 남가주대(USC)에 기증하고, 일생 모은 자료를

 모두 제게 보내오셔서 방송과 미주이민사美洲移民史 사료

史料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김영우 나운서와는

 수시로 얘기를  나누고 있지요.


방송국에는 어느 직종으로 입사하셨습니까?


KBS사우회에서는 직종을 PD, 기자, 기술,

아나운서, 행정으로 분류해 놓았는데, 저는 ‘기타’로

 되어 있습니다. 1963년 입사해 PD, 기자, 행정직을 거쳐

 전산정보실장, 업무국장, 관재국장, 제주방송총국장을 지내고

 1998년 퇴직했습니다. 1973년에는 공사창립위원회에 편성되어

한국방송공사발족 작업을 했는데, 업무 전반을 살피기 위해 지역

 방송국과 라디오 중계소는 물론 고지에 있는 TV중계소까지

 돌아본 것이 블로그 운영에 밑거름이 되었지요.

 

원래 컴퓨터를 잘하셨나요?


비밀문서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60년대부터 타자와 운전을 배웠고 워드를

 했어요.  그러다 연세대 대학원에 교육 훈련 가

‘2000년대 TV 방송’에 대한 졸업논문을 작성한

계기가 되어 전산정보실장 보직을 받았고, 직책상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겠다 싶어 부하 직원

들에게 물어가며익혔지요.

 

블로그 개설 과정을 직접 소개해주세요.


KBS사우회 부회장이던 2005년

 4월 24일, 회원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고자

 엠파스(empas)에 방송 역사 등에 대한 글을 올리기

 시작해 (사)한국방송인동우회(이하 방우회)이사직을 맡게

되면서 범위가 확장이 되었지요. 그러다 엠파스 폐쇄로

 2010년 2월부터 ‘다음’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명칭은

‘긴 봄’, 즉 ‘1년 내내 봄’이라는 제 이름에서

착안해<춘하추동방송>이라 붙였지요.

 

어떻게 작업하십니까?


<춘하추동방송>과 함께하는 분들과

 만나고 컴퓨터 앞에서 사진과 동영상 편집, 선곡,

글을 써 올리느라 이장춘에게는 밤낮이 없습니다. 주로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어제의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새로운 하루를

 설계하고, 미국 등 해외에 계시는 분들과 대화를 나누지요. 전화요금

부담이 없는 와이파이 카카오톡을 활용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의
식중에 국내 분에게도 새벽에 카카오톡을 보내 잠을

 깨우는 실례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일도 많으시겠네요.


항일단파방송연락운동으로 옥사獄死하신

 이근창 선생이68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을

 때입니다. 옥사자 한 분을 찾기 위해 힘을 기울이던 중

 2012년에 이종익이라는 분으로부터 중요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13살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의 얼굴을 가리는 갓인 용수를

 쓴 이근창 선생님을 보았고 얼마 후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그 길로 제가 재판기록 등 공적을 확인해 국가보훈처에 상훈 신청을 냈고, 2012년

11월 17일 제73회 순국선열의 날에  1944년에 옥사하신 이근창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요. 아무 것도 몰랐던 세 살짜리 아들 이휘웅이 일흔 한 살이

 되어 그 훈장을 대신 받을 때 감개무량했지요. 올해도 그와 같은 항일

단파방송연락운동을 잊지 말자는물방비勿忘碑 행사가

 (사)방우회 주최로 오는 10월 8일 목요일 오후

 2시 KBS 본관 광장에서 열립니다.


방송 역사를 새로 쓰는 <춘하추동방송>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군요.


그 말은 방송학자 강현두 교수가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 축구

중계방송의 원조 박충근,해방 공간의 방송과장 이계원,

농구 중계방송의 원조 이현,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혁혁한공적을 남긴 방송계의 큰 별 송영호, 민재호, 윤길구,

문제안, 윤용노, 전인국, 위진록, 장기범, 서명석, 조봉순. 그리고 195·60년대,

방송국에는 아나운서만 있는 줄 알았던 때의 방송사료放送史料들이, 본인, 가족·

친지들로부터<춘하추동방송> 한 곳에 생생하게 모아졌기 때문이지요.아나운서는

 예나 지금이나 국민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아왔고, 비록 방송 내용에 관한 다소의

 불평이 있을 때라도 아나운서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요. 한국아나운

클럽 회원 여러분과 클럽회보를 읽으시는 분들, 그리고<춘하추동방송>과

 함께하시는 분들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빕니다. 감사합니다.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어느 나라이건 마찬가지 이껬지만,
방송의 역사란, 그 나라의 역사는 물론이고,
사회, 정치, 경제, 문화등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야의 보도를   담당하는 기관이므로 방송의 역사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보도를 하게되지요. 마찬가지로 이 춘하추동방송도
방송관계만의 기사를 넘어서, 독자(인터넷 )들도 다양해 지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애초 국장님의 모티브가 그랬듯이 이 춘하추동방송을 함께 주도해 가야할

 주체는 역시 방송인들이시지요. 공연한 욕심인지는 몰라도, 이 춘하추동방송

같은  파워를 가진 블로그를 이어갈 뜻있는 방송인들이 마음

모으고 실력과 열정과 관심을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한국아나운서클럽 2015년 가을 모임, 2015년 8월 25일

http://blog.daum.net/jc21th/17782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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