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호기수 (扈琪秀) 아나운서

이장춘 2015. 3. 8. 15:19

 



호기수 동영상 보기



 


호기수 (扈琪秀) 아나운서!

방송역사 90년에 여성 아나운서

세사람을 꼽으라면  그중 한사람은

호기수를 든다. 그 호기수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한지   10년세월! 오늘 미국

센프란시스코에 사시는 호기수아나운서 인척

전영일 선생님 도움으로 참으로 훌륭한 자료를

접했다. 지금 들려오는 음향!  미국에서올린

동영상에서  딴  음향과  2009년 미국

라디오코리아에 출연한 원로성우

구민의 목소리를 함께 섞어

만든 음향이다



호기수 (扈琪秀) 아나운서

 

 

 

 

위 사진은 오늘의 호기수 아나운서가

 딸  Dinah Surh와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이다.

이 동영상에는 필자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호기수아나운서

 (이하 존칭생략)의 젊은 모습이 있고 오늘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오늘의 

모습을 본다.  필자가 조사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올해 한국 연세로 91세가 된

호기수의 목소리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울 만큼 젊고 아름답다.   이 동영상은 딸

 Dinah Surh가 뉴욕 FOOD CONTEST에서 챔피언이 되어 언론에 보도되고 유명한

 FOOD 방송채널에서 방송하면서 가정을 방문, 어머니 호기수와 딸 Dinah

Surh를 상대로 방송국 사회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진행한

프로그램다. (밑에 동영상을 올렸다)  

 

 

호기수 아나운서와 루즈벨트 대통령 영부인 에레나 Eleanor(인권운동가)

 

 

이 동영상에서 호기수는 1947년

학생으로 도미 1948년부터 학생신분으로

VOA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방송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6.25 를 전후에서 VOA에서 일한 이계원,

민재호는 물론 이보다 앞서 근무했던 황재경, 박경호보다도 더 먼저다.

동영상에서 의 사진이 제시되었다. 위에 올린 사진은 VOA에 재직 할때

 사진이다.            함께 촬영한 분 당시의 현직 대통령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영부인이자 인권운동가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

여사로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확인)  이 사진과 함께  호기수의 젊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문제안 선생님에게 받은 사진과 1947년 2월 1일자 경향신문에 올라있는

사진이 있지만 이 사진으로는 모습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영일 선생님이

 문제안 선생님이 주셔서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 필자의 블로그를 찾은 것으로부터

 오늘의 결과가 있었기에 그 사진 역시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때 올려 놓았던 사진은 아래 있다.

 

 

 

 

호기수 아나운서에 관해서는

종전에 써 올린 글을 보신 후 밑에서

오늘의 얘기를 더 쓰고 동영상을

올리겠습니다,

 

 

2011년 5월 13일에 올렸던 글

 

 

 

 

해방 전,후 홍일점  인기 아나운서 호기수 (扈琪秀)님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 방송국에는 홍일점

호기수 아나운서가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미모에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던 호기수 아나운서는 1930년대

중후반 김문경 아나운서가 방송국 문을 나선이래. 경성방송국이

오랜만에 채용한 아나운서였습니다. (그간에 채용된 아나운서가

있을지라도 근무기록이 없습니다.)    해방 될 때 두 사람의

 여성 방송인 중 한사람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편성과

모윤숙님이고  한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

 제 2보도과 호기수 아나운서입니다.

 

 

 

 

 

위 사진은 1946년 3월 1일 3.1절 특집방송때

 호기수, 박인자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으로 문제안

선생님이 주셨고 아래는 1947년 2월 1일지 경향신문에

 있는 사진입니다. 경향신문 기사는 아래 있습니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1일자 호기수에 관한 기사

 



지금 들려오는 육성은 이승만 대통령

성대모사의 대명사로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아는

성우 구민님이 2009년 미국 L. A.에 있는 KBS 한국어 방송

라디오 코리아에서 방송한 내용으로 구민님은 성우가 된

동기를 호기수 아나운서에게서 찾습니다.

 

 

구민님

 

 

학교 합창단원의 일원으로 

방송국을 드나 들면서 기다랗게 삼단같이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그 아름다운 호기수 아나운서의

방송모습과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치 신선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고 본인도 비록 남자이기는 해도 마이크 앞에 서보고자 하는

충동이 생겨 방송을 시켜 달라고 졸라 그때의 어린이 인기

드라마 똘똘이 모험에 출현하게 되면서 일생동안

 성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 여자 아나운서라면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과 최초의 공채 아나운서이고

경성방송국의 개국아나운서 마현경, 우리말 전담방송을 위해 

1932년에 공개모집한 김문경, 최아지 아나운서가 있었습니디. 1930년대

중, 후반 김문경 아나운서가 방송국 문을 나서면서 여자아나운서 근무기록이  잘

나타나지 않다가 1944년 윤용노, 전인국 아나운서와 함께 한 사람의 여성 아나운서가

 들어왔으니 그 아나운서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호기수 아나운서입니다. 그때 같이 근무

하셨던 이덕근님의기록에 따르면 "호기수 아나운서는 진명여고를 나온후 방송국에 들어와

 여자 아나운서로서는  처음으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개발해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여자

아나운서의 개척자가 되었다." 고 했습니다.  호기수 아나운서는 6.25가 일어날 무렵

미국의 소리(VOA)에서 근무하기 시작해서 오랜기간 거기에 근무 하셨습니다.

호, 아나운서 어머니 신경애님은 6.25때 아나운서가 미국의 소리방송

아나운서로서 대북 방송 내용을 이유 광화문에서 북측으로

부터 총살에 처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명성을 날리던 대표적인 여자 아나운서

강영숙 아나운서에게 “선배 여자 아나운서 중에서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바로

이옥경, 호기수 선배를 떠 올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뒤를 이은분이 강영숙 아나운서라면서 우리 방송역사에서

이름 있는 세분을  들라면 강영숙 아나운서까지

세분을 드는데 서슴지 않습니다.

 

이옥경과 강영숙, 두 아나운서는

본 블로그 여러 곳에서 글을 썼습니다. 호기수

아나운서는 그동안 얘기로는 전해 왔지만 기록이 여의치 않아서

얘기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본인은 그동안 호기수 아나운서에 대해서

수소문 해왔습니다.  그러던중 Morning Calm 블로그를 운영하고 게시는

샌프란시스코 전영일선생님이 제 불로그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호기수님과는

인척이 되신다는 전 선생님은 저와 여러차례 얘기를 나누면서 호기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좋은 자료와 사진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샌프란 시스코와

뉴욕은 워낙 먼거리인데다가 호기수님이 87세나 되셔서 자료 구하기가 쉬운것이

아니셨던 같습니다. 그러던중 10월 20일 자세한 사연과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자료를 제공 해 주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우선 마련된 두장의 사진을 보내

오셨습니다.      이 사진은 호기수님이 10년전  샌프란시스코 언니를

 방문했을때 언니와 임신한 딸이 함께 한 사진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료가 모아지면 자세한 얘기를 쓸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모아진 자료를 바탕으로 예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노정팔님

 

노정팔선생님의 기록

 

해방을 전후해 가장 인기있었던 여자 아나운서는

호기수다. 그녀는 목소리가 맑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성격이 밝고 애교가 있어 어린이 시간에는 누구보다도 적임이었다. 

 "어린이 여러분 어서 라디오 앞으로 모이세요. 지금부터 어린이 소식을

 전해 드리겠어요." 하고 상냥하게 방송을 하면 아이들은 자석이 끌린것

처럼 라디오 앞으로 모여 들었다. 꾀꼬리 아나운서라는 별명이 붙은

그녀는 목소리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장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시선을 받았다. 노정팔님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6.25때 납북당한 윤용노 아나운서의

아들 윤진님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호기수

아나운서의 인품과 방송인의 자질에 관해서 자주 들어서

아버지와 같은 시절에 방송했던 훌륭한 아나운서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고 합니다.

 

 

 

 

호기수 아나운서의 선배이기도 한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은

호기수 아나운서가  8.15 해방을 맞던 날의 기뻐하며

눈물짛던 때의 인상 등의 얘기를 들려주시고 1946년 3.1절

 특집 중계방송에 같이 나갔다가 촬영된 사진이라면서 

사진 뒷먼에 내역까지 기록된 그 귀중한

사진을 제공 해 주셨습니다. 

 

 

 

 

홍일점 호기수 아나운서가 방송을 하고

있던 중 1945년 해방 후 박인자(朴仁子), 서병권(徐丙權)

두 여성아나운서가 들어왔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호기수 아나운서가

6.25무렵 VOA로 옮긴후 1951년 부산피난 시절 임택근, 황우겸, 강찬선,

이수열 아나운서와 함께 정순형아나운서가 들어왔지만 역시 오래 근무하지

않고 의사가 되었으며 부산 피난길에서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선발한 강영숙

아나운서가 1950년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청취자들의 친근한 벗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아나운서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전영일선생님이

 (Morning Calm 블로그 운영)

 그동안 보내주신 소식을

간략히 깁니다

 

춘하추동방송에 올라있는 호기수아나운서는

제가 어릴때  보았던 그때 그 모습입니다,  그는 저와

가까운 인척으로 그를 보아왔고 그와 그의 주변얘기를 들어

왔습니다.  호기수 어머니 신경애(당시 바이올리니스트)는 저의 친

외할머니가 되십니다.    신여성으로서 (연희전문 영문과교수 백남석이

미국유학중에) 시어머니로부터 이혼을 강요당한 후에 재가하여 낳은 딸이

 호기수 아나운서 이며 남편은 호명환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인데 납북

되었고, 호기수의 어머니 신경애는 호기수 아나운서의 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로서 대북 방송 내용을 이유로 광화문 에서 북측

으로부터 총살에 처해졌다는 옛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영일 선생님은 이번에 사진을 보내주시면서

사연을 자세히 기록해서 함께 보내 주셨습니다. 앞으로

자료가 더 수집되어  글을 쓸때 종합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전영일 (Morning Calm)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드리며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사진 4장 중에  위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

 방미때 화동이었던 Dinah Surh(박정희 대통령

앞에 족도리 쓴)를 소개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의 화동

어린딸이 오늘의  뉴욕 FOOD CONTEST에서 챔피언이 되어

언론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진 그 주인공이다.  그는 14년전인

 2001년 어머니가 센프란시스코에 사는 이모집을 방문 했을때

 임신중 다음 사진을 촬영했고 전영일선생님이 2011년

이 사진을 보내주어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 뉴욕 FOOD

 CONTEST에서 챔피연이 되어 각광을 받은

것이다. 기사 한토막을 인용했다

 

 

  

  

 

또 한장의 가족사진(위)동경여대를

졸업한 바이올린리스트인 친정 어머니 신경애 여사가

친구들과 반주를 주고 받으며연주하는 모습이고  벽에 걸려있는

한국의 민속, 전통의상 차림의 인형은액자들은(아래) 친정어머니 신경애

 여사의 손수 작품이라고 한다.  호기수 아버지는 6.25때 납북당한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이라 했고 어머니는이토록 훌륭한 예술적 재능과 솜씨를 지닌

지성인어었음을 알 수 있다. 1947년 그 어렵던 시절에 미국유학을 할 수 있었던

 집안의 딸, 또 학생시절, "미국의 소리방송 VOA"방송요원으로  스카웃 될 수

있었던 능력의 소유자 그는 바로 대한민국의 딸이요 대한민국 중

앙방송국 아나운서였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더 알아볼 일이다.  

 

 

 

 

 

 

호기수 아나운서의 모습이 나타난

또 한장의 사진이 있다. 뉴욕시장과 악수

하는 모습인데 호기수 아나운서가 입은 한복에

수 놓인 꽃은 우 리 대한민국의  國花인 무궁화로

 그 아름다움과 의미에 대한 설명이 있다.  

 

 

 

 

 

호기수 아나운서! 어쩌면 90이 넘은 오늘

지금도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옷에 수를 놓아 아름다운입고 그 의상을 설명하며

딸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손벽을 치는 그 모습에서, 그리

벽에 걸려있는 액자의 작품에서 한겨레 한민족의

 피가 고동치는 느낌을 짛게 느낀다.

 

필자는  한때 호기수 아나운서로 부터

6.25 전에 촬영한 사진을 본인으로 부터 직접 받으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납북당하고 어머니가 종로거리에서 학살당하는 그것도

 다름아닌 자기자신이 적대국의 심리전 방송을 한다는 이유에서 였다는  6.25의

아픔이 있고 또 6.25로 모든것이 잿더미가 되었을진데 본인이 미국에 들고 간 자료

외에 무슨 자료가 또 있겠는가. 를 생각하며 호기수 아나운서로부터 6.25 전의 자료를

본인으로부터 직접 구하려고 했던것이 무리였던것을 이제야 깨댤았고 자신으로부터

이정도의 얘기를 들을 수 있고 이 정도의 사진이라도 제시 받을 수 있게 된것은

천만다행.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하며 이 일을 위해서 5년간이나 힘을 기울여

 주신 전영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호기수

선생님의 여생에 행복하심을 기원하면서 오늘 동영상에서

얻을 수 있었던 자료 모두를 올려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신 분들과 함께 감상 하려고 한다.

 

 

딸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호기수 아나운서  

 

 

의상을 설명하는 호기수 아나운서

 

 

치마에 수 놓은 학

 

 

 

 

호기수 아나운서에 관해서

구민님의 육성을 들었고, 그때 함께

근무하셨던 이덕근,  노정팔 선생님의 글을

인용했으며  문제한 선생님, 윤용노 아나운서

아들 윤진선생님, 강영숙 아나운서의 말을

 받아 올렸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추가한다.

 

얄개의 작가 조흔파로 널리 알려진

조봉순 아나운서가 1956년 월간 방송지에 쓴

"방송 실패담"이란 글이다. 조봉순 선생은 1945년 해방되고

최초로 모집한 아나운서 시험함격해서 아나운서로 근무하다가

한교 선생님이 되고 또 작가가 되었으며 한때는 정계에 투신해서

활동 하던중 4.19가 일어났을때 KBS중앙방송국장으로 재직

했다. 여기 쓴 글은 상대방을 가명 이영옥으로 했지만

실은 호기수 아나운서와의 에피소드다.

 

 

 

 

1956年* 月刊 "放送" 지에서- 

 

女子아나운서中에 이영옥(가명)이라는

美人이 있었다. 그는 나하고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내가 "뉴스"를 마치면 곧 放送室로 들어와 레코드를 걸어 주곤 하였다.

"스위치"를 "레코드"라는 쪽으로 돌려놓으면 "마이크"와의 接續線은 絶斷되고

"레코드"만이 나가는 것이었고 "믹스"편으로 돌려놓으면 "레코드"와 "마이크" 가

같이 나가게 마련인데 어느 날 "뉴스"를 끝낸 나는 영옥양이 들어와 주는게

感激하여 "레코드"로 돌려놓을 "스위치"를 그만 "믹스"쪽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레코드"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영옥양은

 安心하고 내게다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참, 수고하셨어요. 점심은 제가

 한턱 낼 테니 같이 나가세요. 네?」

나는 "스위치"에 無關心한체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내죠.」

「돈 갖은것 있으세요?」 「없습니다.」

「없으면서 뭘 그러세요.」

「돈은 없지만 외상으로....」

「호호호. 우스워 죽겠네.

오늘도 제가 내겠어요.」

「그게 상식적입니다.」

「호호호」

「하하하」

 

나는 늘 그에게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처럼 남자만 보면 돈을 꾸어 달라는

 그러한 영옥이가 아니었다. 「점심 먹고 德壽宮에

散步라도 갑시다.」 「좋아요.」

 

이때 放送課長이 遑急히 放送室도

뛰어 들어오더니 "스위치"를 "레코드"쪽으로

돌려놓고 나서 눈을 흘긴다. 우리는 效果 音樂까지

넣으면서 戀愛劇 한幕을 放送한 셈이 되었다.

 

 

 

호기수 아나운서와 루즈벨트 대통령 영부인 에레나 Eleanor(인권운동가)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는

1884년 10월 11일에 태어나 1962년 11월 7일까지 산 미국

 제32대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이다. 2차대전을

 종결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은 관례를 깨고 3선대통령으로 12년을 재임한

대통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인 엘리너는 자신의 개인적 권리에서

두드러진 대중적 인물로 미국 역사에서 가장 활동적인 영부인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국제 연합 대사를 지내면서 1946년에는 국제 연합

인권 위원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만국 인권 선언을 기안하는

도움을 주었다. 1961년 국제 연합 총회로 돌아오다가, 그해 후반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하여 여성 지위 위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78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국장님께서 애타게 찾고계시던 분이

생존해 계시는 반가운 소식과 자료들을 받게

되셨으니 얼마나 기브고 반가우셨을런지 짐작이 갑니다.

1947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군요.   연세에 비해 너무도

건강한 모습과 목소리를 유지하시니 더욱 반가운 일입니다.

바라건대, 어디에 누군가가 이분에 대해 자료를

가지고 계신분이 있으면 좋겠군요.

 

 

답  

 

호기수 아나운서에 관한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주신

문제안, 전영일, 노정팔, 구민, 이덕근, 강영숙,

선생님과 함께 유여사님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유여사님과 윤후현 선생님을 비롯해서 춘하추동방송에

성원과, 격려  그리고  열정을 쏟아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윤후현(팔방미나)선생님 글

 

호기수 아나운서!의 이름을 들은적도
목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지만, 멀리 뉴욕의 하늘

래서 들려오는, 모녀가 불러주는 아리랑 노래소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인터뷰 장면을 보니, 요리 경연대회

(푸드 콘탠트)에서 한국의 불고기 바베큐 요리로 챔피언이

 되었구만요. 이국땅에서 들려오는 아리랑 노래소리,,

그리고 불고기 요리하는 장면이, 타국땅에서

 사시는 교포들에게 고국의 향수를 물신

 풍기게 하고 있습니다.

 

호기수 아나운서!에 대한

잊혀졌던 소식들을 전해 주신

춘하추동 방송 이장춘 사장님!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신 모습

으로 뵙기를 희망합니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릭

 

 

 미국의 전영일선생님 Morning Calm 블로그 가기

Morning Calm 

 

동영상 원본 보러가기

http://www.popscreen.com/v/67Oav/At-Home-our-Korean-Chef-Dinah-Surh

 

방송인 조봉순과 작가 조흔파

http://blog.daum.net/jc21th/17780646

 

해방되던 때 일본인 홍일점 아나운서 고가 도에 (高賀 登惠)

http://blog.daum.net/jc21th/17780814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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